[김연희 큐레이터 다이어리]예술은 인생의 오아시스
학창시절부터 동기부여와 목표의식이 뚜렷해야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성격 덕에, 나의 학부시절은 끊임없이 내 전공에 합당한 이유를 찾아 헤매는 데에 온전한 모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왜’라고 물어야 하는 의무감으로 단순히 그림이 좋은 이유를 제외하고, 이 세상에 예술이 왜 꼭 필요한지 존재의 이유가 절실했다. “나는 미술인으로서 이 사회에 어떠한 구실을 해야만 하는 것인가?“ “세상은 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할까?“
단순히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에 만족하지 못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 우편물을 배달해주는 집배원, 미래의 꿈나무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선생님, 사회의 질서와 치안 유지에 힘쓰는 경찰 등 이처럼 역할이 명료한 사회구성원들의 직업군과 같이 가장 1차원적인 답이 필요했다. 내 스스로의 가치에 자부심을 갖고 숙명이라 생각하는 내 업에 몰두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미술 비전공자인 독자들 가운데에도, 나의 사적인 고민과 일맥상통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왜 내 삶에 예술이 필요한 것인가?”
나를 합리화시킨 그 해답은 누구든 한번쯤 접했을 세계인의 필독서인 ‘안네의 일기’에서 찾게 되었다.
처참한 전쟁 속 은둔생활을 하며 절망과 좌절에 가득한 상황에서 어린 안네 프랑크는 일기의 형식을 취한 글을 써내려 가며 인간만의 차별화된 본능으로 두려움과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전시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전쟁 속에서도 최소한의 음식을 섭취하고 배설해 낸다. 어떠한 상황과 관계없이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감성이 존재하는 한, 그 감성을 오롯이 배설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능, 예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간단하게 말해, 먹고 싸는 것만큼 가장 1차원적으로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누가 인생은 기나긴 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대인은 수많은 역할 속에 갇혀 배설해야 하는 감성을 억누르며 살아가고 있다. 그 배설의 탈출구는 음악 감상이든, 독서든, 영화 감상이든, 그림이든. 다양한 매체의 수단을 통해서 공감과 위로로 힐링을 받는다.
때로는 지루한 여행에 짜릿한 자극제 일수도, 지친 여행길에 오아시스 같은 단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여행길이 각박하고 지치고 지루하다 불평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체로서 풍요롭고 윤택한 여행길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질적으로 가치 높은 예술과 함께 해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여행이 끝나는 순간 고되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유교적 사상이 짙은 사회적 환경에 익숙한 우리는 ‘관계’에 집중한다. 부모님의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선배로서 등등 관계에서 비롯된 타인의 시선에 맞추어 보이는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에 비해 오롯이 “나”에 집중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63스카이아트 미술관 전시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독일의 시골부부, 그림 구입하려 노동
우리와는 반대로 독일의 어느 시골의 가난한 노부부는 1년 내내 열심히 농사를 짓는다. 그들의 고된 노동의 목표는 자신들의 거실에 걸어두고 싶은 멋진 그림을 구입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들 삶의 가치관과 철학을 대변해주는 그림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멋진 외제차를 타고,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방을 들면 남들이 바라보는 부러운 시선으로 나의 행복지수는 높아질까? 나의 부와 비교하여 우위를 점령 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면 나의 행복 또한 사라지게 될 것을… 까칠까칠한 사탕껍질 같은 허황된 것에 행복의 잣대를 들이밀지 마라. 예술을 여행길 동반자로 섭외해 초행길 생각의 지도를 만들라는 말이다.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느껴보길 바래본다. 이왕 시작한 고난의 여행길, 즐거워야 하지 않겠는가? 백년 장수시대, 여행의 종지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니 말이다.
- 김연희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 큐레이터 (정리 = 왕진오 기자)
김연희 나무 모던 앤 컨템포러리 큐레이터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