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박노해 시인, ‘노동의 새벽’ 타는 목마름 ‘다른 삶’ 재능기부로 승화
인류구원의 땅 아시아 탐구, 6개국 120컷 아날로그 인화작품
▲‘다른 길’ 전 작품을 설명하는 박노해. 사진 = 왕진오 기자
[서울=CNB]왕진오 기자=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박노해 시인의 대표작 ‘노동의 새벽’에 나오는 문구이다. 그는 군사독재와 권위주의가 득세하던 80년대, 민주투사이자 저항의 아이콘으로 상징되던 사람이다.
그가 중동지역을 담은 사진을 선보인지 3년여 만에 아날로그 카메라로 아시아 여러 곳을 담은 사진을 들고 세상 나들이에 나섰다.
지난 4일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만난 박노해(본명 박기평 57세)시인은 지난 전시에서 사진으로 사랑의 순례여행을 걸었던 모습과는 달리 마치 득도의 경지에 이른 종교 지도자처럼 변한 모습이 역력했다.
붓 대신 카메라를 손에 쥐고 지난 15년간 ‘지구시대 유랑자’를 자처하며 말로는 다 전할 수 없는 진실과 목숨 걸고 참구해온 새로운 사유를 사진과 글로 담았다. 국경너머 인류의 고통과 슬픔을 껴안고, 세계 곳곳에서 자급 자립하는 삶의 공동체인 ‘나눔농부마을’을 세워가며 민주화 운동이 아닌 새로운 혁명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분단시대 절대 금기였던 사회주의를 처음 공개적으로 천명한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결성을 주도했고, 무기수가 되어 7년 6개월간 수감 생활을 겪다 1998년 김대중 정권에서 특별사면을 통해 출소했다. 옥중에서 집필해 1984년 출간한 ‘노동의 새벽’은 군사독재 정권의 금서조치에도 불구하고 백만 부 이상 팔린 시대의 필독서로 인기를 누렸다.
▲파도 속에 심은 나무가 숲을 이루다,Ulee Lheue village, Banda Aceh, Sumatra, Indonesia, 2013. ⓒ박노해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도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권력과 정치의 길을 거부하고 스스로 잊히는 길을 택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는 여전히 당시의 펜 끝에서 나오던 저항 의식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박노해 시인은 ‘혁명의 30년 세대 법칙’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20대 청년이 자기 시대의 인간 고통과 사회모순을 끌어안고 슬픔과 분노로 저항운동을 하는 시간이 15년, 그 운동의 성과로 주류사회의 힘을 갖고 15년, 그렇게 30년이 되면 그 세대는 ‘기득권’이 되어 그 감성도 생활도 첫 마음도 굳어지고 낡아지게 됩니다.”라며 “혁명 또한 끝이 없어서, 혁명은 혁명을 혁명하며 몸을 바꿔 젊은 세대의 영혼에서 되살아납니다.”고 오늘의 현실이 어떤 한계점에 도달한 것 같다는 느낌을 설명했다.
▲남김없이 피고 지고, Ruoergai, Amdo Tibet, 2012. ⓒ박노해
또한 “학교는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인류 최악의 수용소이다. 수억을 들여 졸업하고 나서 버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직장인들도, 자영업자도, 대표들도 모두가 마음속에 ‘다른 길’을 품고 있다”고 덧붙였다.
15년간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 중남미, 아시아의 구석구석 지도에 나오지 않는 마을들을 다닌 박노해는 “진정한 나를 찾아 사는 것, 자급자족하는 삶을 사는 것, 삶은 정치이며 혁명의 시작이다. 나는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로 시작해 사회와 세계를 돌아 나와 다시 삶으로 귀향할 것이다. 이번 ‘다른 길’사진전은 지구시대 우리 심연의 여행이고, 자기 자신을 향한 순례의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시의 의의를 표현했다.
‘노동의 새벽’이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된 올해 긴 침묵을 깨고 ‘아시아’를 주제로 사진전 ‘다른 길’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원할 주체로 아시아의 시대를 호명하고 깊은 물음을 던진다.
“아시아 시대의 부상은, 단순히 경제 권력이 이동하는 문제를 넘어 문명 전환의 숙제를 안겨주는 인류사적 사건이다. 세계 절반이 넘는 거대 인구 공동체가 성장과 진보라는 서구의 길을 뒤따라간 자리에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고 말한다.
▲남김없이 피고 지고, Ruoergai, Amdo Tibet, 2012. ⓒ박노해
전시 수익금은 지구마을 평화 나눔 활동에
이번 전시를 통해 인류 정신의 지붕인 티베트부터 예전에는 천국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지옥이라 불리는 땅 파키스탄을 거쳐 극단의 두 얼굴을 지닌 인도 그리고 버마, 라오스, 인도네시아까지 총 6개국에서 찍은 120여 컷 작품이 정통 흑백 아날로그 인화로 전시된다.
줌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아날로그 카메라에 35mm 단 렌즈와 자신만의 독창적 형식과 미학으로 즐겨 찾는 역광을 포착해 셔터를 눌렀고, 전통 방식의 인화기법을 사용해 대형 프린트를 뽑아냈다.
▲나날이 새롭게, Langmusi, Amdo Tibet, 2012. ⓒ박노해
이번 사진전은 정부나 기업의 협찬을 받지 않고 진행됐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가수 이효리와 윤도현, 배우 황정민과 배수빈, 조재현, 박철민, 장현성, 김상중, 개그맨 김준현 그리고 연극배우 유정아, JYJ 김재중, 소녀시대 수영, 개그우먼 김지민, 개리 등이 박노해가 쓴 사진 소개 글을 직접 낭송해 들려준다. 일종의 재능기부라 말하지만, 기업과 정부의 협찬 이상의 효과를 보고 있어 씁쓸함이 묻어난다.
전시와 함께 사진 에세이 ‘다른 길’(도서출판 느린걸음)도 함께 펴냈다. 사진작품들은 10개에서 20개의 에디션으로 구성되어 165만원에서 770만원에 판매된다. 수익금은 지구마을 평화 나눔 활동에 쓰일 예정으로 알려졌다. 전시는 세종문회회관 미술관에서 3월 3일까지.
- 왕진오 기자
왕진오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