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호 이성호 기자⁄ 2014.02.10 13:59:05
『‘한대볼’이란 말이 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기간에만 반짝 인기를 끌다가 국내에 들어오면 완전히 푸대접 받는 비인기종목 ‘핸드볼’을 속칭하는 단어다.
주목도 못 받고 대중들의 관심 밖인 안타까운 현실에서 핸드볼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한대볼’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기업인이 있다. 장미 육종회사인 코로사를 운영하고 있는 정명헌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2001년 직원을 겸한 선수들로 꾸린 코로사핸드볼팀을 창단, 이후 뛰어난 성적을 거둬 핸드볼계에 파란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 실업팀으로서 그 선두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대기업도 핸드볼 구단을 운영하기 힘든 상황아래서 직원이 10명도 안 되는 소규모 회사에서 핸드볼팀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재정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뚝심 있게 팀을 운영하고 있는 정명헌 대표. 웰컴론코로사 핸드볼팀의 구단주이기도 한 그를 만나봤다.』
정명헌 대표(55)는 중학교 시절 핸드볼을 처음 접했다. 동성중학교 바로 위에 위치한 동성고등학교에 핸드볼팀이 있었는데 중학교 교실 앞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고 연습게임을 하기도 해 구경을 자주 했다.
“당시에는 체육관에서 시합하는 것이 아니라 맨땅에서 코트를 그려놓고 했습니다. 주로 동성고와 핸드볼 명문인 성균관대가 연습경기를 가졌는데 성균관대는 국가대표가 6~7명 포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비등하게 진행돼 박진감이 넘쳤습니다.”
수업 마지막 시간에 시합이 시작되면 친구들과 속칭 땡땡이를 치고 연습경기를 관람했고 동성고가 대회를 출전하면 단체응원도 따라갔다. 그러다 정 대표가 2학년 되던 해 동성중학교에서도 핸드볼부를 창단했다.
정릉초등학교가 전국대회를 휩쓸었는데, 그 멤버를 그대로 입학시켜 팀을 꾸린 것. 선수가 모자라 2·3학년에서도 뽑았다. 정 대표는 동경해왔던 핸드볼부에 합류해 6개월간 활동을 했지만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더 이상 선수를 뽑지 않고 팀이 해체됐다.
다시 본연의 학생으로 돌아왔고 이후 서라벌고등학교에 진학, 학년별로 진행되는 핸드볼 경기에 나갔다.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교육과에 입학해 1학년 때 동문기쟁탈 핸드볼 경기에 과대표로 나가 4강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학교 핸드볼부에서 들어오라고 했다. 핸드볼부는 동아리보다는 한단계위 성격으로 2부 대학 시합 및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운동부였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1학년 때는 핸드볼부에 합류를 못했고 2학년 초에 선배가 점심먹자고 불러 자장면 한 그릇에 넘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됐죠(웃음). 군에 다녀온 온 뒤에도 핸드볼부에서 생활했습니다”
정 대표가 속한 핸드볼부는 추계대학연맹전에서 강적 서울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서울대 핸드볼부는 사범대체육과 출신으로 원래 핸드볼을 했던 친구들이 많았다. 그때 서울대를 이긴 게 11년만이었고 그 이후로 아직까지 서울대를 이겨본 적이 없다.
독일의 유학생활…의사의 꿈 접다
정 대표의 꿈은 의사였다.
복학 후 오스트리아 출신 교수님과 이야기 도중 꿈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니 아직 안 늦었다며 주선을 해줘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입학원서를 받게 됐다.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부푼 마음으로 안고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 연봉으로 5000만원을 받는 사람 3명을 연대 보증인으로 세우라고 하더군요. 그 시절 연봉 5000만원은 대단한 것으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보증인을 못 세웠고 고민하다가 우회해서 들어가자고 마음을 먹고 급히 방향을 틀어 독일의 한 대학교의 입학원서를 받고 가게 됐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로 했지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갈 돈이 없었다. 학교 선배 등 지인들이 돈을 모아 100만원을 마련해줘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막상 독일에 발을 내디뎠지만 공부와 생활이 막막하기만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차비도 없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목사님이 닭곰탕 한 그릇을 사주더군요. 눈물이 났습니다. 낙담하지 말라며 기도도 해줬는데 너무 고마웠고 편안해졌습니다. 이후 마음을 다잡게 됐습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였다. 학비는 간신히 커트라인에 걸려 무료로 다니게 됐는데 생활비가 없었다. 어느 날 돈도 따 떨어져 고민을 안고 터벅터벅 학교로 걸어가는 데 뒤에서 누군가 툭하고 쳤다.
한 독일인이 시비를 건 것으로 군대에서 배운 태권도로 바로 돌려차기를 했더니 나가 떨어졌다. 그 광경을 저 멀리서 보고 있던 머리가 빨간 펑크족들이 다가와 태권도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다.
“펑크족 15여명을 기숙사 옥상에서 가르쳤습니다. 일인당 시간당 10마르크 즉 우리나라 돈으로 5000원 가량을 받아 1달에 2400마르크를 벌었습니다. 살아날 구멍이 생긴 것이지요”
3개월간을 그렇게 지냈는데 날씨가 추워지자 못하기도 했고 장기적이지 않아 슈투트가르트에 위치한 모 회사에서 우편배달일을 했다.
5개월간 일을 했는데 1만 마르크를 벌었다. 한 달에 생활비로 300마르크를 썼으니 큰돈을 번 것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역시 비자를 한국에 가서 받아오라고 했다.
“이때 의사 공부를 하지 말라는 것 같았고 결국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학교를 옮겨 슈투트가르트대학 언어학과에 다녔습니다”
결혼도 하게 돼 아내와 방학 때는 일하고 학기 때는 공부를 하는 반복적인 생활을 했다.
나의 꿈이자 사명은 ‘핸드볼’
고된 유학 생활 탓에 정 대표는 그 좋아하던 핸드볼도 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당시 정 대표는 독일의 한 트럭공장에서 아내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볼트를 조이는 일인데 전동드릴이 20kg이나 되는 등 작업 자체가 매우 힘에 부쳤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됐고 매일 매일이 고단했다. 그러던 중 TV에서 우리나라 대표팀 경기를 보게 됐다.
“핸드볼로 금메달을 따는 것을 보고 아! 내가 핸드볼을 좋아 했었지라는 생각이 번뜩 들더군요. 우연히 앞집 사람과 이야기하던 도중에 지역 핸드볼 클럽에 다니고 있으며 아버지도 그 클럽 출신이고 아들도 낳으면 클럽에 보낼 계획이라고 해 나도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타지에 와서 공부하고 생계를 유지하느라 바빠 잊혀졌던 핸드볼을 다시 잡게 된 것이다.
클럽에 가보니 유소년 그룹은 물론 의사·변호사·회사원·엔지니어 등 핸드볼을 즐기는 직장인들로 가득 찼다. 독일에서는 이미 핸드볼이 생활스포츠 문화로 자리 잡았다.
“클럽 회원들과 1주일에 2번 운동도 함께하고 4부 리그 시합도 나갔습니다. 운동만하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맥주 타임도 갖는 등 친목을 도모해 너무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핸드볼을 그렇게 어렵게 했는데 이곳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즐기면서 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정 대표는 이 클럽에 몸을 담아 약 40개팀이 참여한 4부 리그 토너먼트에 출전, 준결승전까지 올랐다고 회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핸드볼팀도 별로 없고 스폰서를 구하기가 어렵지만 독일에서는 핸드볼 인기가 대단해 4부 리그에서도 스폰서가 붙는다고 했다. 4부 리그에서 1위를 하면 3부 리그로 승격된다. 2부 리그, 1부 리그 등 단계를 올라갈수록 스폰서도 많이 붙어 지원도 풍부해진다. 그래서 2부 리그부터 용병을 쓰기도 한다.
“4부 리그 한 클럽의 경우 약 2000명이 회원인데 시합을 하게 되면 대부분 응원하러 와 체육관이 꽉 들어찹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러한 뿌리 자체가 없습니다. 클럽제가 아닌 엘리트체육으로 키워온 것으로 관중이 없습니다. 유럽은 클럽제로 1부 리그로 올라가면 기업체 등에서 서로 스폰서를 대려고 줄을 서는 실정입니다”
예로 서울 한 지역(구)에 클럽팀이 하나 있으면 경기장에 다 몰리는 식이다. 정 대표는 우리나라에도 핸드볼을 생활체육 클럽식으로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에 체육관이나 수영장 축구장 트랙 등이 많이 생긴 이유는 로또 때문입니다. 로또를 해서 생긴 세금이 체육관 시설투자에 무조건 배당 되다보니 기반이 잘 깔려서 클럽이 활성화 됩니다. 이런 부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핸드볼이 비인기 종목이 되는 이유는 클럽제 운영이 안 됐기 때문인데, 초·중·고 경기에 해당 선수 학부모들만 경기장을 찾는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독일에서 핸드볼 인프라는 매우 두텁습니다. 저변에 깔려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처럼 개인소유가 아닌 클럽제로 운영되기 때문이지요. 한국의 경우 실업팀 운영비가 연간 12억원 정도 들지만 독일은 1부 리그의 경우 기본 170억원 가량 사용합니다. 상위팀의 경우 300억원, 하위는 50억원 등 실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부문이 부러운 거죠”
상무를 포함해 국내 남자 실업팀이 총 5개에 불과한 실정에서 그는 클럽제가 안 된다면 각 시·도차원에서라도 팀을 만들어 홈앤드어웨이 방식을 도입해 관중을 모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미 육종회사 운영, 핸드볼팀 창단
슈투트가르트대학에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딴 정 대표는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하려고도 했다. 또 독일 현지 모 회사 홍보실 부장 자리가 생겼지만 고사하고 통역사로 10년 넘게 일을 했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정부차원에서 농어촌 구조개선 사업으로 유리온실·비닐하우스 사업을 확대하던 상황을 접하게 됐다.
당시 시설만 지어놓고 저 안에다가 무엇을 심을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 마침 독일 전시회에서 장미를 보게 됐고, 이거다 싶어 독일 장미 종묘회사인 코르데스의 품종을 취급키로 하고 동남아시아 판매권자가 됐다. 1997년 한국에서 코로사를 창립했고 장미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직원 2명을 채용했는데 모두 핸드볼 선수 출신을 뽑았다. 하지만 일이 바빠져 인력이 부족했다. 대학 졸업생도 채용해봤지만 일이 힘들어서 하루 일하고 도망가 버렸다.
정 대표는 상무 제대를 앞둔 핸드볼 선수들이 있어 이들을 직원으로 채용키로 하고 감독에게 찾아갔다. 총 9명이 제대할 예정이었는데 이중에는 실업팀에 가기로 한 선수도 몇몇 있었다.
“감독이 하는 말이 데리고 가려면 다 데리고 가라고 하더군요. 우선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하고 나와서 담배를 한 대 폈습니다. 생각 끝에 좋다! 다 달라고 했습니다. 이중 2명은 안 온다고 해서 7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2001년도의 일이다. 선수라는 불안정한 직업에 일반 회사원이라는 직업의 안정성을 부여하는 클럽제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는 조직구조로 ‘코로사핸드볼팀’이 출발한 것이다.
이때 선수들과 정 대표는 서로 다짐을 주고받았다. “핸드볼 선수로 코로사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일을 하는 직원으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을 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핸드볼을 해왔으니깐 앞으로 시합은 나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요.”
선수들은 일을 하면서 오후 3시 이후에는 나가서 운동을 하고 새벽에도 모여서 연습을 하는 등 일과 운동을 병행했다. 그리고 시합에 나갔다. 7명에 기존 2명 포함해 정 대표가 직접 감독으로 나서 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총 19개 대회 우승과 다수의 입상의 경이적인 성과를 달성했고 2007년 이후에는 운동만 하는 팀으로 전환했다. 현재는 국내 최고의 핸드볼 선수로 구성돼 수많은 국가대표선수를 배출하는 강팀으로 위상을 높이고 있다.
“코로사핸드볼팀을 창단하게 된 동기는 핸드볼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국위를 선양하며 국민들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었으나, 실상은 당시 국내 남자 실업 팀은 2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배출되는 선수의 과잉공급으로 인해 운동을 그만둬야 하는 선수들이 늘어나는 상황이었기에 재능 있는 선수들이 운동을 그만 두게 되면 선수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생각으로 핸드볼팀을 창단하게 된 것이지요”
회사규모 대비 적지 않은 연봉을 주고 선수들을 영입해왔고 현재 코로사핸드볼팀 인원은 17명이다.
웰컴론의 핸드볼구단 지원, 2월 28일 끝나
연 매출 18억원 소규모 회사(코로사 직원 수: 농장근로자 포함 총 7명)에서 구단을 운영하다보니 늘 적자에 시달렸지만 그에게 있어서 핸드볼팀은 버릴 수 없는 자식 같은 존재다.
핸드볼팀을 운영하다가 지난 2009년 재정위기를 겪었다. 선수 월급이 조금씩 늦게 나오게 됐다. 팀 창단 후 그때까지 스폰은 경남체육회에서 받는 연간 2억5000만원이 전부였다. 선수들 급여가 월 4500만원 정도 나갔다. 월 2000만원의 경남체육회 지원금과 회사 수입에서 2000만원을 보태도 늘 모자랐다. 적자운영이 지속돼 왔던 것으로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사무실로 전화 한통이 왔다. 웰컴론이었고 바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네이밍 스폰서로 5년간 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구단 운영이 위태로울 당시 웰컴론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줘 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많이 줬는데 면목이 없는 것이 지난해 유일하게 전국체전에서 1번 우승한 것 밖에 없어 올해에 3개 대회(코리안리그, 동아시아선수권, 전국체전)가 열리는데 정신 재무장을 해서 전 대회 우승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웰컴론과의 계약은 오는 2월 28일 종료된다. 어렵게 운영하다가 간신히 숨통이 조금 트이다가 다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다시 역경을 이겨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돈을 벌어 혼자 호의호식하려고 했다면 핸드볼팀을 만들지 않았겠지요. 핸드볼이 인기를 얻으려면 관중을 끌어 모으기 위한 노력과 중계방송이 필수 인데 현 사정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더욱 비인기 종목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중계방송이 안 되니 스폰을 구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인기를 얻어 선수들 연봉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 선수들이 육성되는 등 활성화 될 수 있습니다”
핸드볼에 빠져있는 정 대표가 느끼는 핸드볼의 매력은 뭘까. 그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다이나믹 그 자체입니다. 한번 경기를 본 사람들은 절대로 그 매력에서 못 빠져나갑니다. 처음 온 사람도 경기를 보면 반하게 돼 있습니다. ‘한대볼’이라는 이름을 탈피하려면 일단 관중들이 자주 찾아올 수 있게 풍토를 조성해주는 것이 관건입니다”
아울러 구단 운영이 어렵다고 해도 절대 포기는 없다고 분명히 했다.
“한 번 시작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10년 이상을 팀을 꾸려왔는데 당장 힘들다고 ‘나 몰라라’하고 버릴 순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하질 말았어야 합니다. 구단을 운영하면서 반성할 부문도 많습니다. 클럽제 방식을 도입하는 등 장기적인 플랜을 세우고 나가야 했는데 처음에는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온 점이 그렇습니다. 앞으로 구단주로서 내가 할 일은 핸드볼 저변확대에 더욱 힘쓰고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팀 운영을 위해 마케팅 부문을 강화, 안정적 수입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대 과제입니다”
- 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