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이분법 가치관 넘어 광해군 다시 조명받는 이유는?
근래 영화와 TV사극을 통해 광해군(光海君)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연전(年前) 상영된 영화 광해는, 그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아픔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해 왔던 여러 이야기들의 틀에서 벗어나 광해군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있다. 이런 작업이 긍정적 이미지의 광해군을 보여 주는데 성공한 것 같다.
또 다른 경우는 최근 TV사극에서 임진왜란 때 남편 김태도와 함께 일본 사가(佐賀)현 다께오(武雄)로 끌려가 아리따(有田)에서 꽃을 피운 여자 도공(陶工) 백파선(百婆仙)의 처녀시절을 픽션화하였다. 작가는 그녀와 세자 광해군과의 로맨스를 엮음으로써 광해군을 훈남으로 그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런 시도들은 아마도 선(善)과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가치관이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는 점을 예견하는 것 같다. 광해군이 사람들의 관심사로 자리잡아 가면서 이 땅에 남아 있는 광해군의 흔적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실록 광해군일기를 보면, 광해군은 재위 15년이 되던 1623년 음력 3월 12일 인조반정으로 인해 실각한다. 그 뒤 3월 23일 부인과 아들(지:祬)내외와 함께 강화에 위리안치 되는 것(遷光海及祬于江華)으로 광해군 일기는 막을 내린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정세력은 이괄의 군대가 광해군을 다시 복위시킬까 염려하여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亂)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로 귀환시킨다.
이후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조정은 광해군을 다시 교동으로 이배시킨 후, 청나라에 항복한 후에는 혹시나 청(淸)이 광해군을 복위시킬까 염려하여 저 멀리 제주로 이배시킨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광해군은 이 때의 심정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바람 불고 비는 날리는데 성머리를 지났네 (風吹飛雨 過城頭)
훅하는 기운 훈기는 백척 누각에 미치고 (瘴氣薰陰 百尺樓)
푸른 바다 성난 물결 옅은 놀은 내리는데 (滄海怒濤 來薄暮)
푸른 산 수심 띈 색은 맑은 가을기운을 둘렀네 (碧山愁色 帶淸秋)
돌아가고픈 마음에 시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歸心厭見 王孫草)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놀라누나 (客夢頻驚 帝子洲)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故國存亡 消息斷)
안개 낀 강 위 외딴 배에 누운 신세로다. (烟波江上 臥孤舟)
제주에서 광해군의 죽음이 서울에 알려진 날(인조 19년 1641년 7월) 사관(史官)은 이 시와 함께 연민의 정(情)을 사초(史草)에 적어 놓았다. “聞者悲之(듣는 이들이 슬퍼했다)”라는 것이다.
강화와 교동, 태안 어디에도 광해군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제주에 간 날 그 흔적을 찾아 나서 본다. 그 곳 적거(謫居)생활 4년여에 남아 있는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근래에 세운 두 개의 표지석이 행적의 끈을 놓지 않았음은 다행한 일이다.
하나는 김녕 행원포구(어등포:於登浦)에 광해군이 제주 유배 첫발을 디딘 곳에 세운 ‘광해군기착비’와 제주시내 국민은행 제주지점 앞에 한라일보가 세운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이다. 그 이외에는 무엇 하나 찾을 길이 없다. 다른 이들의 적거지는 많이 복원하고 순례코스로도 만들었건만 폭군으로 낙인찍혀 이곳에 유배되어 온 한 임금의 마지막 삶의 장소는 눈비비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이제 그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구나.
상봉역에서 춘천행 전철에 올라 금곡역에서 내린다. 역을 나서 철로가 지나가는 고가 아랫길을 따라 길을 건너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는 봉인사행 마을버스(64번)가 정차한다. 버스시간은 대체로 정확하니 그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는 것이 좋다. 버스는 08:00분/ 08:50분/09:30분/ 10:10분/ 10:50분/ 11:30분/ 13:40분/ 14:20분…에 이곳을 통과한다.
광해군 유일한 적거지는 제주의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
버스는 10여 분 뒤 좁은 시골길을 지나 종점 봉인사에 도착한다. 절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짜기에 제법 큰 절이 자리하고 있다.
봉인사는 어떤 절일까? 실록 광해군일기 광해 11년(1619년) 3월 11일자 기사에 보면 보은사(報恩寺)라는 절 이름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승정원이 아뢰기를:‘신들이 삼가 보건대 웅유격(熊遊擊)이 바친 물건 가운데에 사리(舍利) 1개가 있었습니다. 사리란 바로 승려를 다비(荼毗)할 때에 나오는 것이니, 그것은 오랑캐의 도(道)이며 흉하고 더러운 물건입니다.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전하에게 바친 것은 바로 오랑캐의 도로 전하에게 아첨하려는 것이니, 비록 바친 물건은 매우 작지만 그 해는 클 것입니다.
(왕께서)전교하기를, ‘예조의 관원들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한 다음 보은사(報恩寺)로 보내라.’ 하였다.
(承政院啓曰: ‘臣等伏見熊遊擊所進物件中, 有舍利一顆. 所謂舍利者, 卽髡緇茶毗時躍出者也, 其道則夷狄, 而其物則兇穢也. 以兇穢之物, 進於殿下者, 是以夷狄道,媚於殿下也,所進雖微,所害大矣……傳曰: ‘令禮官議處後, 送于報恩寺)
여기에서 웅유격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후금(여진족)인 듯하다. 그가 사리(舍利)를 보내왔는데 이를 보은사(報恩寺)에 보내라는 것이다. 보은사는 어디이며 그 사리는 어찌 되었을까?
1759년(영조 35년) 기록인 봉인사 ‘사리탑 중수기비’에는 이에 대한 답이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 11년(1619)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중국을 통하여 들어왔는데 그 법인(法印:사리)을 이듬해(1620) 천마산 봉인사 동쪽 200보 위치에 탑을 세워 봉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은사는 봉인사를 달리 부른 이름이며 그 사리는 탑을 세워 봉안했던 것이다. 실록에 보면 몇 곳에 보은사(報恩寺)란 이름이 나온다. 세종실록에는 대비(大妃)의 능에 절을 두고자 하는데 그 절을 보은사라고 하였다. 세조실록에는 헌릉(태종의 능)과 영릉(세종의 능)에 보은사를 짓고자 신하들로 하여금 그 터를 보게 한다. 정조실록에는 세종릉의 원찰인 신륵사에 보은이라는 편액을 내린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이 보은사라는 말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능침사찰을 이르는 일반명사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광해군은 이 절을 보은사라 부른 것일까?
아래쪽 산줄기에는 바로 광해군의 생모 공빈(恭嬪) 김씨(金氏)의 묘인 성묘(成墓)가 자리잡고 있다. 추측하건데 어머니묘의 원찰인 이 절을 광해군은 자연스레 보은사라 불렀을 것이다. 그 뒤 사리탑을 세워 법인(法印: 사리의 이칭)을 봉안한 뒤(1620년) 절 이름은 법인(法印)을 봉안한 절이라 하여 봉인사(奉印寺)가 된 것으로 보인다.
새로 자리잡은 봉인사 앞으로는 산기슭에 민가가 있고 그 앞 밭에는 옛 축대의 흔적과 많은 기와편이 뒹굴고 있다. 이곳이 본래의 봉인사가 있었던 절터이다. 이 절터에서 약 200보 동쪽에는 중수비의 기록과 같이 복원하여 세운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어 옛 기록과 정확히 부합된다.
봉인사는 언제 세워진 것일까?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에 부도탑이 세워진 광해 11년(1619년)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 해에 중국에서 온 사리를 ‘보은사로 보내라’한 것을 보면 이보다 빨랐을 것이다. 이제는 한 지역에 작은 절에 불과하지만 한 때는 광해군과 인연이 깊었던 당대의 고승 부휴당 선수대선사가 이곳에서 5년을 주석하였고 금강산과 보개산을 거친 풍암취우대사도 이곳에서 주석하였다. 이 무렵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와 여동생 화왕옹주가 시주하여 퇴락해가던 사리탑을 중수하는 등 불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렇던 봉인사는 한 번의 실수로 화마(火魔) 속에 사라졌다.
금곡역 부근 봉은사(보인사) 기슭엔 광해군 생모의 성묘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1800년대 말에 대궐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향촉(香燭)을 내렸다 한다. 이 향촉을 법당 가운데에 높이 매달았는데 탁자 아래로 떨어지면서 불이 났다는 것이다. 이 불로 절은 거의 전소되고 대방(大房)과 노전(爐殿)만 남았는데 그나마 금곡에 홍릉(洪陵)을 조성할 당시 아랫동네 이천응(李天應)이란 자가 남은 건물을 훼손하여 그 자재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봉인사는 터만 남게 되었다.
무소 앞에는 근래에 세운 것처럼 보이는 대리석비가 화단 안에 서 있다. 1700년대에 활약한 풍암취우대사비(楓岩取愚大師碑)이다. 1979년 불사 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비석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1766년 대사가 입적하여 다비를 했는데 그 때 나온 사리로 이듬 해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히도 사리탑은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일본으로 반출되었거나 어느 집 정원에 서 있을 것이다.
이제 종무소를 돌아 뒤로 오른다. 큰 법당 위 공터에 아름다운 사리탑이 서 있다. 원래의 탑은 국립박물관 수장고에 있고 이곳에는 재현해 놓은 사리탑이 서 있다. 실록의 기사에서 보았듯이 광해군 12년(1620년) 중국에서 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리탑도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사리탑을 세우면서 이 탑을 관리할 부도암(浮圖庵)을 탑 옆 봉인사 경내에 세웠지만 봉인사와 함께 피폐해져 탑만 남게 되었다.
봉선본말사지에 의하면 이웃절 견성암에 있던 지주승 환송(喚松)과 전 영의정(前 領議政) 이유원의 차남 이호영(李琥榮)이 200원에 사리탑과 탑 속에 봉안되었던 사리장엄구 7개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팔려 나간 사리탑과 장엄구는 고물상에 있다가 일본인 변호사 이와다 센소(岩田仙宗)에게 다시 팔려 경성 본원사에 있었다. 1927년 반출할 수 있게 제약이 풀리자 고베(神戶)로 실려 갔고 1987년 초까지 이국땅 오오사카 미술관 뜰에 오랜 동안 외롭게 서 있었다. 이와다 센소는 죽을 때 며느리에게 사리탑을 한국에 반환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가져갔던 젊은 날의 그는 괘씸하지만 생을 마감하며 조건없이 돌려 보낸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 결과 사리탑과 장엄구 일체는 1987년 2월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양도 아름답고 제작연대가 확실한 사리탑과 사리장엄구는 유물로서 가치가 높아 보물 928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사리탑은 끝내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경복궁 뜰에 세워져 있다가 용산에 국립박물관이 세워지면서 수리를 위해 그 곳 수장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7개의 사리장업구도 국립박물관으로 귀속되었다. 다행히 부장품 중 하나인 부처의 진신사리는 이곳에 서 있는 재현 사리탑에 봉안되었다 한다.
7개의 장엄구 중 하나인 은제(銀製) 장엄구에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世子戊戌生 壽福無彊 聖子昌盛 萬歷 四十八年 庚申 五月”
(세자무술생(1598년) 수복무강 성자창성 만력 사십팔년 오월(1620년, 광해12년)). 누구를 위해 발원한 것일까? 광해군의 세자(이름 지祬)를 기원한 것이다. 광해군은 아들 지(祬)를 위해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사리탑 겸 태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자식인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아우 영창대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광해군도 자기 자식에게는 이렇게 뜨거운 부정(父情)을 쏟았던 것이다. 아무리 보아도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의 시계추는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 같다. 우리 시대의 권력은 과연 여기에서 자유로운 것일까.
이런 광해군의 바램도 소용이 없어 세자 내외는 인조반정 다음 달 강화에서 자결하는 운명을 맞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공허하구나.
고등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시던 어떤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Vanity! Vanity! All is Vanity (공허하다. 공허하다. 모든 게 공허하다).
이렇게 명(命)을 다한 세자는 수락산 아래 옥류동에 400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근래에 화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리탑이 다시 세워지는 날 폐세자를 위로하러 탑 앞에 술 한 잔 따라야겠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 사리탑이 보고 싶으면 이곳의 재현품으로 그 마음을 달래야 한다. 이 사리탑은 다른 사리탑들과는 달리 돌펜스가 쳐져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다가 창경궁 후원으로 옮겨진 성종 태실과 비슷하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우리의 불탑과 승탑(부도)을 그리 탐했던 것일까?
일본인들은 고려 때 왜구(倭寇)의 노략질을 시작으로 임진란과 근세의 침략시기를 통틀어 우리의 불화, 불탑, 승탑을 무수히 노략질하였다.
일본의 토기(土器)와 목기(木器)를 보면 그들의 흙 다루는 솜씨와 나무 다루는 솜씨는 일단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 사찰에 들어가 보면 돌로 만든 물건은 하나 같이 너무 조잡해서 어이가 없다. 그런 그들이 한반도에서 만난 석물(石物)은 경이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무수히 많은 석물을 노략질하였다.
일본인들은 왜 그리도 우리의 불탑과 승탑(부도)을 탐했나
국보 86호가 된 경천사 10층탑도 일본이 실어 갔었고, 국보 2호가 된 원각사탑도 오랜 동안 해체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임진란 때 그들이 훔쳐가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일본 곳곳에 다른 문화재만큼 많이 우리의 불탑과 석탑이 산재해 있을 것이다.
일본 여행길에 혹시나 우리 것처럼 보이는 석물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다가 세상에 알려야 한다. 어찌 석물뿐이겠는가. 불법 반출물은 반환해 와야 하고 누군가 팔았던 물건은 되사오는 노력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이제 봉인사와 부도암 터를 뒤로 하고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로 향한다. 길은 종무소에서 절로 들어오는 골자기를 바라보면서 좌측 산능선(남쪽) 길이다. 출발점에는 조그맣게 ‘진건둘레길’이라는 안내지가 붙어 있다. 산길로 접어들면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달리 갈림길은 없다.
1km나 걸었을까 개활지가 나타나면서 붉은 색 개량한옥이 보인다.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시조 조맹(趙孟) 공(公)을 모시는 풍양재(豊壤齋)이다. 조선조 말 안동 김씨와 세력을 다투던 그 풍양조씨의 본향은 이 지역이다. 천마산 서쪽 진건면 일대가 고려 때에는 풍양이라 부르던 땅이었다. 이 지역 토호였던 조맹 공은 고려 태조로부터 이름을 하사받고 풍양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산기슭 옆으로는 조맹공의 신도비가 보인다. 신도비 뒤 기슭으로 오르면 조맹 공의 묘소를 만난다. 그 뒤 저 안쪽 산기슭에 또 하나 범상치 않은 묘가 자리잡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병풍석을 두르고 무인상(武人像)과 문인상(文人像)의 시호(侍護)를 받고 있으니 능(陵)임에 틀림없는데 안내판에는 成墓(성묘)라 적었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소이다. 공빈 김씨는 선조가 사랑하는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광해가 태어난 2년 뒤인 선조 10년(1577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광해 2년(1610년) 3월 29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고 석물을 왕비릉에 준하게 했으며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이도 부질없는 일.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성능은 다시 성묘가 되었고 한 때 조맹 공의 묘는 봉분을 없앤 평묘(平墓)가 되었으나 성릉이 성묘가 되면서 다시 봉분을 돋우었다.
다행히 벼슬아치들의 게으름인지 관용인지 성릉을 장식했던 석물(石物)은 남았으니 그나마 한 가닥 세상인심에 야박하지 않은 틈이 보인다. (계속)
교통편 - 경춘선 전철 금곡역 하차 ~ 64번 봉인사행 마을버스 환승
걷기 코스 - 봉인사 ~ 성묘 ~ 광해군묘 ~ 임해군묘 ~ 된봉 ~ 관음봉 ~ 견성암 ~ 윗독정리(버스) ~ 또는 아래 독정리 ~ 노인회관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박현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