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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통한의 눈물…‘이제는 무뎌질 때도 됐건만’

이산가족의 애환…1950년에 멈춰선 장사인 씨의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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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67호 정찬대 기자⁄ 2014.02.24 13:46:22

▲사진 = 정찬대 기자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터질 것 같아요…‘혈육의 정’이란 그런가 봐요”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 20일, 장사인 씨(서울 동작구 사당동·73)는 텔레비전 앞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날 금강산에서 진행된 상봉 행사를 지켜보면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 흘렸다. 잃어버린 60년을 되뇌며 장씨는 그간 쌓아뒀던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3년 4개월 만에 재개됐지만, 석별의 정을 나눈 이들은 그나마 운이 좋다. 분단의 이유로 짧은 만남, 기약 없는 긴 이별을 해야 했지만, 그래도 기쁨의 눈물로 지난 세월을 함께 회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안타깝게 상봉이 무산된 이들이 쓴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미상봉자들의 실망과 안타까움은 그들에게 남은 시간만큼이나 우리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앞서 소개한 장씨도 그중 한명이다.

장씨의 형(兄)은 이북에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보다 13살 많은 형은 이미 사망했고, 그의 가족들이 북(평양)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지만 번번이 그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번 상봉에서도 장사인 씨의 이름은 빠졌다.

장씨는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에 체력도 전 같지 않아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앞선다. 그는 다시 “제가 아니면 우리 후손들이라도 만날 수 있겠죠”라고 약한 모습을 보인다. 매번 이산상봉에 탈락되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탓이다.

이날 장씨를 만나기 위해 사당동을 찾은 CNB는 떨리는 손으로 본지를 맞이하던 장씨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는 언뜻 봐도 수십 년은 돼 보이는 오래된 갈색 서류가방(본인은 이를 보물 상자라 칭함)을 내보이며 이북의 형님과 부모님 사진을 건넸다. 이어 그간의 감정이 북받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장씨는 “가끔 드라마에서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구만’이란 얘기를 하는데, 웃으려고 하는 건 알겠지만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고,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장씨의 이 한마디에서 그의 가슴에 패인 상처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장사인 씨가 형님과 조카로부터 받은 편지와 사진을 내보이고 있다. 사진 = 정찬대 기자


軍 전사자 통보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장씨의 형인 장사국 씨(1927년생)는 1950년 6·25가 발발하기 한해 전인 1949년에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동란(動亂)이 있던 50년 6월 25일 잠시 외박을 나왔다가 전쟁이 일어났다는 라디오 속보를 듣고 이내 부대로 복귀했다. 이것이 그의 가족들이 장사국 씨를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다.

이후 3년여의 시간이 지났고, 장사국 씨는 한 장의 종이(전사자 통보)가 되어 고향인 전북 진안으로 돌아왔다. 5남매 중 장남인 그의 비보를 듣고 가족들뿐 아니라 동네 주민들도 모두 슬퍼했다.

아들을 앞세운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장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장씨는 “그때 내가 13살이었다.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며 “어머니께서는 새벽마다 호롱불을 켜고 형을 위해 기도했다”고 회상했다.

어머니의 기도 내용은 ‘사국이가 살아있게 해 달라’ ‘우리 사국이 건강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장씨는 이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인데 어머니가 왜 그런 기도를 하는지,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됐다”고 고백했다.

전사자 통보를 받은 뒤 국가에서 얼마만큼의 보상금이 나왔지만 어머니는 형의 죽음과 맞바꾼 은전(恩典)을 차마 목구멍에 넣을 순 없었다. 장씨는 “보리밥도 못 먹고 굉장히 가난했지만 어머니께서는 끝내 그 돈을 쓰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장사국 씨의 목숨 값은 형이 군대 가기 전 친구들과 함께 짓던 동네의 한 교회 성금으로 모두 내어졌다.


죽은 줄 알았던 형…어머니의 기도가 통하다

장씨의 형은 행방불명되면서 전사자 처리가 됐다. 그러나 당시 형은 북한군의 포로로 잡혀갔고, 그렇게 최근까지 이북에 살아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 리 없던 장씨는 형이 죽은 줄만 알고, 여태 그렇게 지내왔다. 하지만 지난 2008년 6월 뜻밖의 편지 한통을 받고 기겁한다. 바로 55년 전 죽은 형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장씨는 “고향에 살던 누나가 울면서 형의 편지를 들고 서울로 왔다”며 “그전까지 죽은 줄만 알았던 형의 소식을 접하면서 졸도할 뻔 했다”고 말했다. 형의 첫 편지를 받은 장씨는 떨린 가슴을 부여잡고 곧바로 형을 찾아 길림성으로 떠났다. 그는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기에 바로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장씨의 형인 장사국 씨가 남한의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장씨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 정말 우연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설명하는 내내 흥분을 가라앉지 못했다.

▲장사인 씨가 북에 있는 형님으로부터 받은 편지와 가족 사진. 사진 = 정찬대 기자


형 집 바로 옆에는 그의 가족과 매우 가깝게 지낸 허승신(가명)이란 여자가 있었다. 허승신의 어머니는 중국이 고향이었고, 그의 이모(이하영 가명)는 중국 길림성에 거주하고 있었다. 허승신은 일 년에 두세 차례 중국을 왕래했는데, 그때마다 이모 집에 들렀고, 그렇게 이모를 통해 옆집 살던 이웃의 소식을 한국에 전해준 것이다.

장씨는 “형이 허승신에게 자신의 고향이 남한이란 것을 밝히고, 고향집(전북 진안) 주소를 적어주며 알아봐달라고 했다”며 “그의 이모인 이하영로부터 연락을 받아 이러한 배경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장씨는 이하영로부터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이를 믿지 못했다. 그래서 형으로 하여금 어릴 적 친구들 이름을 모두 적어 보내달라고 했고, 그렇게 받은 형의 첫 편지는 형의 동무는 물론 형제들의 이름이 일일이 열거돼 있다.

“강희철 강수열 강백만 유영환 유영수 유영택….” 형은 자신의 소꿉친구들을 적어나가며 어릴 적 추억과 고향 진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흑백사진과 “장사옥, 장사인, 장사철, 장금선” 형제의 이름을 함께 적어 보내며 ‘내가 니 형이야’라고 울먹이듯 외쳤을 것이다.

장씨는 “여태 죽은 줄 알고 살았는데, 단순히 주소만 갖고 형이라고 판단할 수 없어 확인 차 그렇게 했던 것”이라며 “형 친구들의 이름을 본 순간 우리 형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형이 보내온 사진을 건네주며 “우리 형이 맞지 않느냐. 똑 닮지 않았느냐”며 읍소했다.

그는 “북에서 편지를 보내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형님도 매우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며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혈육의 정’을 끊을 수 없어 이렇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씨는 이제와 형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다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는 “형이 살아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더니 정말 어머니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며 “자식 앞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은 어머니가 결국 형을 살렸다”고 말했다.

92세 고령으로 현재 돌아가신지 14년이 된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형의 안부를 기도했다. 그리고 늘 장남의 사진을 가슴에 품으며 수시로 꺼내보곤 하셨다. 장씨는 “형 사진을 주머니에 꼭 넣고 다니셨다”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형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결국 어머니의 기도가, 자식에 대한 애착이, 가슴 찢어지는 애통한 기도를 하늘이 들어준 것”이라고 떨리듯 말했다.

장씨는 “어머니께서 살아생전에 ‘큰형이 있으면 너희들이 좀 더 편했을 텐데’라는 말을 자주했다”며 “전쟁통에 형이 죽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끝까지 형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장씨는 그렇게 한(恨)으로 남은 어머니의 애틋함과 허승신·이하영씨 두 사람의 도움으로 형(이후 조카와도 편지를 주고받음)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렇게 서로의 소식을 알렸다.

▲장사인 씨가 부인 이명순(66) 씨와 형님의 사진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정찬대 기자


‘전사자’로 남겨진 형의 흔적을 찾다

2008년 형의 편지를 받은 장씨는 그해 대한적십자사에 찾아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다. 지금도 서울 중구 남산동에 있는 상봉센터를 찾아 언제쯤 조카들을 볼 수 있을까 학수고대한다.

지난해 추석맞이 상봉 행사를 추진했을 당시 상봉단에서 탈락해 한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본 기자가 20일 늦은 밤 장씨의 집을 찾았을 때도 상봉 행사를 다룬 뉴스를 보는데 여념 없었다.

장씨는 2008년 여름에 이어 지난해 추석을 앞두고 또 다시 길림성을 찾았다. 어렵사리 확인된 형의 생사가 갑자기 끊기면서 소식이 묘연해졌기 때문이다. 이하영(허승신의 이모)을 만나면 어떻게든 형의 소식을 들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추석이 끝난 직후인 2013년 9월 24일 조카(형의 아들)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 편지에는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때 장씨의 나이 72세, 형님 나이는 85세다. 장씨는 조카의 편지를 받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대한적십자사에서도 형의 사망을 확인해줬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한 언론사로부터 형님이 전사자로 분류됐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이에 곧바로 국립현충원에 찾아가 이를 확인했다.

그는 현충원을 찾은 그날의 감정을 토해내며 “수많은 이들의 이름을 보면서 저분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꽃도 못 피워보고 죽은 분들을 생각하니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교육적으로 현충원을 자주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장씨는 “국립묘지에 갔더니 정말로 형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명패가 있더라”며 “형을 찾아서 좋기는 했지만, 형의 이름을 보고 얼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장씨는 그렇게 그간 잊고 지냈던 형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조카들만이라도…‘혈육의 정’에 목 놓아 울다

장씨의 형은 이미 사망했다. 하지만 그 혈육은 여전히 북에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장씨는 “형님은 돌아가셨다고 해도 6명(아들3·딸3)의 조카들은 그곳에 있지 않느냐”며 “그래도 삼촌이고 내 혈육인데, 다들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씨는 떨린 목소리로 조카가 보내온 편지(2013년 9월)를 읽어 내려갔다. “삼촌 뵙고 싶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생존의 뜻이고, 유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고향과 형제들 생각을 많이 하셨습니다. 삼촌 소식을 안 다음부터는 더욱 애타하셨습니다. 삼촌, 정말 보고 싶습니다….” 장씨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가족인데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래서 혈육의 정이 무서운가 보다”고 했다. 그러면서 “형님은 그간 어떻게 사셨고, 또 조카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도 궁금하고 보고 싶다”고 전했다.

장씨는 이번 설맞이 상봉행사에서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을 계기로 상봉 행사가 더욱더 진전되고 확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현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한 것은 정말 잘한 것”이라고 언급한 뒤 “어렵사리 이산상봉의 길이 터졌다. 남북이 서로 믿고 왕래하면서 상봉 행사도 정례화하고, 이산가족들의 한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하루빨리 통일이 돼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린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말까지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총 12만9264명으로, 이중 55.3%인 7만1480명이 생존해 있다. 여기에 이산가족의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70대 이상 고령층은 전체 81.5%를 차지했다.

또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이산가족 상봉률은 1.2%p 증가한데 그친 반면, 사망률은 14.1%p나 늘었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 등 제도보완이 절실한 이유다.

특히, 국군포로나 납북자 가족들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산가족의 또 다른 아픔이다.
앞서 소개한 장사국씨와 같은 전시납북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는 없으나, 정부는 대략 8만~10만 명이 전쟁 전후로 북한에 강제 억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북 선원들 역시 남북 간 이견이 커 ‘강제납치’와 ‘자진입북’ 사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장씨는 “형님의 유골이라도 고향 진안으로 모셔오고 싶다”며 “부모님과 형제들이 한데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이산가족은 분단의 아픔을 가장 아프고, 가장 또렷하게 보여준다. ‘잃어버린 30년’에서 또 다시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픔과 상처는 가슴 한 구석을 꽉 메우고 있다. 딱지가 앉아 조금은 무뎌질 때도 됐지만 이미 1950년에 멈춰선 시계는 그날의 기억과 아픔을 고스란히 되살려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2008년 9월 25일 평양의 장사국 씨가 서울에 있는 동생 장사인 씨에게 생전에 보낸 편지 내용 일부를 옮긴다.

“보고 싶은 동생 사인아, 내 동생 사옥, 사인, 사철, 금선이 모두 잘 있다니 기쁘구나. 이제 내 나이도 80이 되오니 세월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내가 자라던 정든 고향땅을 두고 이곳(평양)에 오니 여기가 내가 자란 오동리(전북 진안) 같기도 하는구나. 동생들을 꼭 만나보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니…. 훗날 자식들은 만날 기회가 있겠지. 현재는 (이렇게라도) 동생들의 편지를 보고 싶구나. 사인이 네 나이도 70이 지났겠구나, 그러니 네 소식도 빨리 전해다오….”

- 정찬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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