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토크 지상중계]88만원 세대 예술가, 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본업’인 창작과 작품 활동, ‘부업’ 사이에서 예술가의 삶 모색
▲2월 22일에 있었던 ‘본업: 생활하는 예술가’전의 아티스트 토크 현장.
예술가는 직업인가? 전시를 하면 할수록 작가는 왜 그만큼 더 가난해지는가? 오늘날 불안전한 고용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는, 일명 88만원 세대의 일상은 같은 세대의 예술가들도 다르지 않다. 20~30대 젊은 작가들이 본업인 창작과 생계를 위한 부업의 경계에서 정체성이 모호해진 삶을 사는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두산갤러리 서울에서 2월 22일, ‘본업: 생활하는 예술가(BONUP: Art as Livelihood)’ 전시의 부대행사로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는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 권용주, 안데스, 이수성, 이우성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이기언이 함께 오늘날 작가들의 생존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의 작업을 하면서 먹고 사는 사람은 10명 중 1명 정도이지 않을까? 다들 생계를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나는 미술관이나 전시장에서 전시 디자인을 부업으로 한다. 빔 프로젝터를 설치하고, 합판을 잘라 벽을 만들고, 그 벽에 못을 박는 작업이다.”
이수성 작가는 설치와 조각 작업을 하면서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미술 주변의 노동, 즉 미술 작품의 운송이나 설치, 전시 디자인, 작품 제작 보조와 같은 일들을 부업으로 해왔다. “처음에는 이 둘을 구분 지어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 작업을 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떠오르는 것은 어제 했던 그 노동이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두 작업을 섞어보자고 생각했다.”
창작자로서의 작업과 다른 창작자의 작품을 위한 디자인 작업에서 가장 큰 차이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느냐 지우느냐 하는 일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수성 작가는 다른 참여 작가인 이우성과 안데스의 작품 설치를 위한 디자인과 제작을 자신의 작업으로 삼았다. 자신이 느끼는 모호한 정체성이 자신의 작업 자체로 드러난 경우라 할 수 있다.
안데스 작가는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안데스는 디자이너로서 활동을 시작해 ‘매일매일 다르게 옷 입기’라는 자신의 취미를 작업으로 확장한다. 몇 년 전부터 안데스는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입한 옷들을 색다르게 구성하여 입고, 그 결과물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매일 기록해왔다.
“그렇게 작업한 것이 2000회 정도 된다. 그런데 사이트를 방문한 사람들이 옷의 가격을 문의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나는 그 옷들을 팔지 않았다. 이번 전시 이후에는 옷가게를 만들 예정이다. 요즘은 패션 블로그 같은 것들이 많이 생겼고, 오히려 이제 나는 반대로 옷을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수성 작가의 작품 ‘노동예술’이 설치된 두산갤러리 서울 전시 전경.
자신의 작업과 상황을 담담하게 마주보기
물론 안데스 작가가 단지 쇼핑몰을 창업하려는 것은 아니다. 판매하는 옷에 태그를 달아 누가 사서 입고 또 팔았는지 옷의 역사를 함께 기록하면서 버려지는 옷들이 리사이클링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이를 통해 안데스의 작업은 새롭고 비싼 상품들을 소비하느라 잊고 지낸, 생활 속에 흔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발굴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상황을 독특하게 작업으로 전유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안데스에게 새로운 패션 사업을 위한 쇼케이스 무대와 같은 것이 됐다.
안데스 작가와는 다르게 이번 전시에서 이우성 작가는 작가 개인이 처한 상황을 작업으로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려는 작업을 했다. “내가 약간 엄살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분명 다들 힘든 시기인데 내 아픔이 가장 큰 아픔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전시에서 소개된 이우성 작가의 작업은 작가의 작업실 앞에 있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붉은 벽돌의 벽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촘촘히 쌓아 올린 견고한 벽돌의 벽 이미지 위에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을 그려내 그 힘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그래서 그림은 캔버스라는 고정된 프레임이 아니라 벽에 매단 흔들리는 천 위에 그려졌다. 그림 속 사람들의 얼굴은 벽의 높이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이들의 자세를 통해 그 벽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권용주 작가는 이수성 작가와 같이 전시 디자인과 관련한 부업을 하고, 작품 ‘만능벽’ 또한 작가의 부업 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권용주는 전시 디자인 일을 하면서 한국 미술기관의 기묘한 인력 편제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대다수 미술관에서는 좋은 큐레이터를 채용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질을 갖춘 전시 기술자를 고용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한국에서 ‘전시 기술자’는 대부분 간접 계약이나 용역 계약을 맺는다. 인테리어나 건축을 하는 인력을 고용해 전시 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가 디자인을 하면 아무래도 작품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권용주나 이수성 작가가 미술 생산자인 동시에 전시를 돕는 보조인력이라는 어찌 보면 상반된 두 가지 일을 모두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미술관 내에서 고용의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에서 대부분의 전시에는 작품료가 책정되지 않는다. 젊은 작가들은 생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작업을 위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어렵게 전시를 하면 할수록, 작가의 경력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 가난해진다.
2005년 문화예술과 관련된 교육법, 2012년 최고은 작가의 죽음으로 비롯된 예술인 복지법, 작년의 문화이용권과 관련한 법안 등 이제 예술가의 현실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과 고민들이 이어지고 있다.
예술가들 또한 사회의 창작 활동에 대한 인식과 불공정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나 모임들을 조금씩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한 팔자 좋은 사람들이라는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본 생활권 보장이 철저히 예술가 개인의 몫으로 남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문화예술의 영역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공재라는 인식을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 안창현 기자
안창현 기자 isangah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