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길을 물어 찾아간 보광사 영조 어머니 숨결 잠들어 있네
길에도 생명이 있는 것 같다. 한 때는 작은 산길이었다가 대로(大路) 중에 대로가 된 길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대와 함께 저물어간 길도 있다.
고려(高麗)시대나 조선(朝鮮)시대에 서울과 개성을 오가려면 어느 길로 다녔을까? 서울에서 개성과 평양을 거쳐 중국 땅으로 가려면 어느 길을 택해서 갔을까? 지금 같으면 아마도 한강을 끼고 뻗어나간 강변북로와 자유로가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일산신도시가 생기기 전에는 통일로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남북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평양에서 서울로 오는 북쪽 사람들이 지날 통일로는 갑자기 넓혀지고 환하게 불도 밝혀야 했다. 그 때만해도 남북의 국력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기에 발돋움하여 무언가 보여 주어야 했던 우리네 현실이 지금 생각하면 웃음 짓게 한다.
조선과 고려 때에는 서울과 개성을 잇는 가장 큰 길이 이른바 의주대로(義州大路: 關西大路)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현재의 서울에 대한 내력을 소개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고려 15대 임금 숙종(肅宗) 때 서울에 궁궐을 짓게 되는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술사(術士) 김위제(金謂磾)라는 사람이 풍수설 도선밀기(道詵密記)를 근거로 서울 땅에 가히 성을 세울 만하다(楊洲有木覓壤可立城)는 주장을 하게 된다. 실사를 거쳐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니 5년의 공사 끝에 궁궐은 낙성되었다.
이 때 숙종은 이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선포하고 유수관(留守官)을 두게 된다. 이로서 중경(中京:송도), 남경(南京: 木覓壤, 서울), 서경(西京: 평양)이 완결되었는데 4개월씩 3경(京)을 순행하면 36개국이 조공하게 된다는 비기(秘記)의 기록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그 뒤 인종, 의종, 충렬왕, 공민왕, 공양왕 등이 순행(巡幸)하였다. 임금의 순행(巡幸)길, 그리고 왕래가 빈번해진 중경과 남경 사이 길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오늘의 답사 길은 이 길로부터 시작한다.
구파발역 2번 출구(홍제 2번, 녹번 1번, 연신내 3번, 삼송 8번)로 나와 703번 시내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복개된 덕수천을 건너고 삼송역 동편 숯돌고개(礪峴)를 넘어 한창 신도시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신원동(新院:원을 새로 옮긴 곳이라서 신원)을 지난다.
앞쪽으로는 신원천이 흐르고 벽제승화장이 나타나는데 승화장이 있는 낮은 산등성이 우측으로 나지막한 고개가 망객현(望客峴)이다. 옛 의주대로 길인데 이제는 이 고개 너머에 국가시설물이 자리하고 있어 통행할 수는 없다. 버스는 승화장 앞길을 우회전한다. 그 곳에는 옛 벽제관(碧蹄館)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버스는 잠시 후 좌회전하여 고양동을 통과한다. 옛 고양군의 읍치가 자리하던 고양군의 중심지였다.
연산군 이후 관산동 구읍지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고양군의 행정중심지였다. 사람들은 잊었다. 고양 땅이 얼마나 큰 땅이었는지. 지금의 고양시는 물론이고 서울 도성 밖 한강 이북의 동, 남, 서 땅이 대부분이 고양군 땅이었다. 이 넓던 땅 행정중심지 고양은 이제는 아는 이 별로 없는 고양동이라는 작은 동리로 남았다. 관아터는 집터로 바뀌었고 중국사신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 머물었던 벽제관은 주춧돌만 남았다.
버스는 고양동을 지나 혜음령길로 고개를 오른다. 고갯마루에는 좌우로 두 개의 골프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개 넘어 두 번째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용미4리 제2묘지 입구 정류장이다.
중국사신 오가던 석사동 벽제관엔 주춧돌만…
조선시대에는 1번 국도에 해당하는 관서대로길, 고려 때에는 송도와 남경을 잇던 임금의 길이 이제는 관심 있는 이 아니면 이름도 생소한 혜음령길로 남았다. 이 길에는 가벼이 할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 전해진다. 동문선(東文選)에 전해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의 기록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가 그것이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봉성현(峯城縣 지금의 파주(坡州)) 남쪽 20리쯤에 작은 절이 하나 있었다. 허물어진 지가 오래되었으나 그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곳을 석사동(石寺洞)이라 부른다. 동남쪽 여러 고을에서 개경(開京)으로 올라오는 사람과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이 이 길로 다니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에, 사람은 어깨가 스치고 말은 발굽이 닿아, 분주하여 인적이 끊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산이 깊고 초목이 우거져서, 범과 이리가 떼지어 살면서 편안하고 이로운 곳으로 여기고는 숨어서 엿보고 있다가 때때로 나타나서 사람을 해쳤다.
이뿐 아니라, 간혹 도둑의 무리가 그곳이 숲이 우거져 숨기 쉽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빼앗기 쉽기 때문에, 여기 와서 간악한 짓을 하였다. 양쪽의 행인이 주저하며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로 경계하여 무리를 모으고 병기를 휴대한 뒤라야 지나갔다. 그런데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이가 한 해에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왕 예종(睿宗) 15년인 기해년 8월에, 사명을 받들어 남쪽 지방에 갔던 근신(近臣) 소천(少千)이 돌아왔다. 임금(上)이 묻기를, ‘이번 길 어떠했느냐?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느냐?’ 하자, 곧 이 일을 아뢰었다. 임금께서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여 백성을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
(峯城縣南二十許里有一小寺. 㢮廢已久而鄕人猶稱其地爲石寺洞. 自東南百郡趣京都與 夫自上流而下者無不取道於此. 故人磨肩馬接跡.憧憧然未甞絶.而山丘幽遠 草木蒙翳 虎狼類聚. 自以爲安室利處. 潛伏而傍睨. 時出而爲害.非止此而已. 閒或有寇賊敓攘之徒. 便其地荒而易隱. 人畏而易劫. 爰來爰處. 以濟其姧. 二邊行者. 躊躇莫之敢前. 相戒以盛徒侶. 挾兵刃而後過焉. 而猶或不免以死焉者. 歲數百人. 先王睿王在宥十五年己亥秋八月. 近臣少千奉使南地迴. 上問若此行也. 有所聞民之疾苦乎. 則以是聞之. 上惻然哀之曰:如之何可以除害而安人?)
지금은 버스로 쉽게 넘을 수 있는 혜음령길은 900년 전에는 김부식의 글처럼 많은 이들이 지나는 길임에도 숲이 우거져 짐승과 도둑이 창궐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의 폐해를 줄이고 편안케 할 수 있겠느냐는 임금의 걱정에 근신(近臣) 소천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옛 절이 자리했던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그 곁에 마땅히 일이 없는 백성을 정착해 살게 한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묘향산에 가서 승려들을 모으니 그 수가 100 명에 달했다. 예종 15년(1120년)~ 예종 17년(1122년) 두 해만에 백성 동원 없이 승려들의 울력으로 절이 세워졌다. 게다가 임금의 순수(巡狩)에 대비해 아름다운 집도 한 채 지었으니 작은 행궁(行宮)도 겸하게 된 것이다. 다음 임금 인종(仁宗)은 혜음사(惠陰寺)라고 사액(賜額)도 했다. 절은 물론 국립여관인 원(院)도 겸하였다. 고려시대 큰 절은 대부분 원(院)을 겸하고 있었다.
일례로 도봉산 도봉사(道峰寺)는 도봉원이었고, 고달사는 고달원, 희양사는 희양원, 미륵대사는 미륵대원이었다. 이렇게 해서 위험한 고갯길은 안전한 길이 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일을 일답게 처리하는 능력자는 있었던 것이다.
100여명 승려들의 울력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절
그런 혜음사는 어찌 되었을까? 조선조로 넘어 오면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이미 혜음사는 없고 고적조(古跡 條)에 고혜음사(古惠陰寺)가 혜음령에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혜음원은 남아 주 남쪽 26리에 있다(在州南二十六里)고 소개하고 있다. 이 때는 이미 대찰 혜음사는 없어지고 건물 일부가 남아 원(院)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명맥을 유지하던 혜음원도 어느 틈엔가 그 역할을 분수원(焚脩院)과 세류점(細柳店)에 넘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그 위치조차 잊혀졌다.
다행히 1999년 지역 주민의 신고가 들어 왔다. 동네 산골짜기에 옛 건물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발굴을 시작한 결과 ‘惠蔭院’을 알리는 명문(銘文)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졌던 혜음원 터 였던가.
가슴 설레며 혜음원지를 찾아간다. 안타깝게도 하차한 버스정류장(용미4리) 어디에도 혜음원을 알리는 흔적은 없다. 버스정류장 앞에는 ‘온능슈퍼’가 있다. 슈퍼를 끼고 샛길로 들어서자. 농로처럼 보이는 좁은 포장길인데 잠시 후 밭 너머로 ‘종가집’이라 쓴 음식점을 만난다. 이 곳 갈림길에서 우측 포장길을 따라 가자. 길은 개울을 끼고 이어진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혜음로 454번길 18-61’이라 쓴 녹색 철 펜스 대문 농장이 있는데 길은 우측 흙길로 이어진다. 흙길을 따라가면 농장 문처럼 보이는 문이 길을 막아선다.
다행히 문은 열려 있으니 이 길로 계속 나아간다. 잠시 후 좌측 양지바른 완만한 산비탈에 층층이 단을 쌓아 올라간 건물터를 만난다.
아 가슴 설레는 혜음사 터다.
들어오던 입구 길을 빼고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아늑한 쉼터다. 동북쪽으로는 주산(主山)이라 할 수 있는 우암산 비로봉(329m)이 있고 앞으로는 서서울 골프장의 골프코스가 비스듬히 보인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만약 골프장이 이삼백 미터만 더 뒤로 들어왔었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은 사라졌을 수도 있었겠다. 10여 년 째 발굴 중인데 11단의 건물 층에 33동이나 되는 건물지가 발굴되었다 한다. 여러 곳에 깨진 기와를 쌓아 놓았고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다. 옛 절터의 스산함보다 따스함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제 앞에 보이는 우암산을 넘어 고즈넉한 절 고령산 보광사를 찾아가자. 그런데 빤히 보이는 산길에 통행금지 표지가 사방에 붙어 있다. 산은 비록 낮아도 인적이 드물고 군사훈련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주민 제보로 처음 모습 드러난 혜음원 터 10년째 발굴 중
어찌하겠나, 혜음사지 윗편에는 좌측으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 길 중간에는 몇몇 공장이 자리잡고 개인 집도 몇 채 지난 후 출발했던 곳 ‘종가집’ 앞으로 내려오게 된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와 ‘제2 용미리 묘소’ 길로 나아간다. 답사 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차 다니는 길을 걷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이 길은 제2묘소 전용길이라 차량 통행이 뜸하다는 것이다.
2km를 걸어 추모공원에 도착한다. 추모의 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에서 좌측(북쪽) 묘역 끝으로 나아가자. 지도에는 산박골 방향을 가리키는 곳이다. 묘역 밖은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편안한 숲 속 흙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동쪽 방향으로 나아간다. 저 멀리 산기슭에는 작은 건축물로 보이는 구축물이 보인다. 2km여 나아가면 좌측 언덕에 경주 김씨 세장묘역이 있고 길은 시멘트 포장길로 막힌다. 이 지점이 오두지맥(신한북정맥, 졸고 옛절터 44 참조)이 지나가는 산행로이다.
이제 우향우(남쪽), 산능선길을 오른다. 산길에는 오두지맥 종주자들이 붙여 놓은 표지리본이 여럿 붙어 있다. 오르는 길 앞 언덕에는 길 걸으며 보아온 나무구축물이 나타난다. 길이 가파르다. 언덕 위에 있는 구축물을 지나면 능선 길은 이어진다. 이렇게 오르기를 10여분, 2차 능선 길에 닿으면서 길은 우측 산길로 이어진다. 비로소 시야에는 능선 너머에 있는 보광사의 석불이 멀리 앞쪽 산기슭에 보인다.
여기에서 갈 길에 대한 마음을 정해야 한다. 길을 멀리 걷고자 하면 우측 능선 길을 이어 걸으면 되는데 철탑을 지나 우암산 활공장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오두지맥길 리본을 따라 가면 367번 지방도(보광로) 위 고개인 됫박고개에 닿는다. 됫박고개에서 내려온 곳에 보광사 일주문이 있다.
지름길로 가고자 하면 보광사 석불이 보이는 능선에서 석불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래로는 마을이 빤히 보이는 가까운 길이다. 그러나 희미한 길 흔적만 보일 뿐 근년에는 사람들 통행이 없던 길이다. 다행히 큰 나무만 자라 있고 숲은 우거지지 않아 하산에 별 문제는 없다. 산을 내려오면 오픈된 음식점 마당으로 이어진다. 바로 앞에 버스길 367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길로 나서 우측으로 잠시 진행하면 보광사 일주문에 닿는다.
일주문에는 ‘古靈山 普光寺’(고령산 보광사)라고 쓰여 있다.
古靈山(고령산)? 과연 맞는 산 이름일까?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보광사 뒷산 이름이 앵무봉(鸚鵡峰)이며, 일반 지도에는 개명산(開明山)이다. 어찌 해서 이런 이름들이 등장했는지 근거는 잘 알 수가 없다. 옛 지도에 이 지역 지명에 고령동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 조에는 고령산(高嶺山)과 고령사(高嶺寺)로 기록되어 있고 1930년대에 발간된 석문의범(釋門儀範)에도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하였으니 비록 한자는 다르더라도 산이름은‘고령산’이 정통성이 있는 것 같다.
보광사로 들어선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고즈넉한 절이면서도 의외로 들려 보지 않은 이들이 많은 절이다. 언제 들려도 퇴락한 단청과 벽화가 정다운 절인데 안내판에는 이 절이 진성여왕 8년(894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하고 고려 고종과 우왕 때 다시 지었다 한다. 지금의 절은 임진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었다 한다.
국가지정 문화재는 없는데 지방문화재는 여럿 있다. 그러나 내게는 문화재 지정의 높낮이를 떠나서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게 느껴진다. 대웅전 건물 그 자체, 판자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들…코끼리도 그렇고 민화 같은 범도 그렇고 무슨 꽃이던가 아름답기도 하여라. 연화화생도를 보며는 나도 문득 거기 끼어서 화생(化生)하고 싶고, 반야용선도를 보면 언젠가 나도 그것 타고 재미있게 피안의 언덕에 닿고 싶어진다.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 어머니 최씨 곁을 지키고 있어
대웅전 안은 또 어떻던가. 세 분의 부처 곁에 두 분 보살 서 계신데 그 상호(相好)가 맑다. 탱화들도 어쩌면 저리도 다양하고 멋과 맛이 있을까. 감로도의 요모조모 그려낸 표정들은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또 앞 건물에 매달려 하늘을 날고 있는 목어(木魚)도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인다.
3칸집 대웅전 네 기둥에는 가운데 두 기둥에만 주련이 걸려 있다.
依正藏嚴相好殊(의정장엄상호수): 依報와 正報 장엄하니 상호가 뛰어나고
究竟天中登寶座(구경천중등보좌): 머나먼 하늘 끝 보좌에 오른다.
4 구(句)로 된 범패(梵唄)의 가운데 2구(句)라 하니 아마도 네 기둥에 주련이 있었을 것이다. 마저 찾아다가 걸었으면 좋겠다.
大雄寶殿(대웅보전) 편액은 영조의 친필이라고도 한다.
왜 여기에 영조가 등장하는 것일까? 보광사는 흥국사와 함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와 관련 있는 절이다. 숙빈 최씨는 이곳에서 5~6km 북쪽에 있는 소녕원(昭寧園)에 잠들어 계신다. 가까운 절 보광사는 자연히 숙빈의 원찰이 되었다. 보광사 한켠에는 지금도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御室閣)이 있으며 그 앞으로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늙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이 아직도 살아 있음인가?
이른바 무수리였다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사극(史劇)에 등장했으니 긴 이야기는 거두고 두 가지만 짚고 가려 한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였나? 장희빈을 결정적으로 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또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 최씨는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조선의 궁녀에 대해 이해를 바꿀 필요가 있다. 영화나 TV극에서와는 달리 궁녀는 왕과 잠자는 것이 주 임무는 아니었다. 그들은 지밀나인(至密內人: 왕의 시중), 침방나인(針房內人: 바느질), 수방나인(繡房內人: 수놓기), 소주방나인(燒廚房內人; 음식, 잔치)…등으로 궁중살림 전문가 집단이었고 이들의 취사와 세탁 등을 담당하는 하인 성격이 무수리, 취반비, 방자, 파지 등이었다. 최씨가 침방출신이라면 무수리가 아니다.
한편 숙종 27년(1701년) 9월 23일 실록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민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告)하였다’하였다. (外間或傳, 淑嬪 崔氏, 追慕平日逮下之恩, 不勝痛泣, 密告於上). 무엇을 고한 것일까? 장희빈이 취선당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수시로 민비를 저주했다는 내용이다. 이 일로 장희빈은 갔다. 숙빈 최씨는 베갯머리 송사로 연적을 꺾었으며 세 아들을 낳아 둘째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사랑과 인생에 성공한 여인이었다.
보광사 앞에서 333번 버스를 타고 영장3거리에서 하차하면 그녀가 잠들어 있는 소녕원에 갈 수 있다. 성공한 여인의 묘에서 기(氣)라도 받을 일이다. 아쉬운 점은 비공개라는 점이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이한성 동국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