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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큐레이터 다이어리]“그녀에겐 여백이 필요하다”

이우환의 작품철학처럼 비워야 새롭게 채울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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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74호 신민 진화랑 실장⁄ 2014.04.14 13:02:36

큐레이터 A양은 부모님이 계신 제주에 봄 휴가를 갔다. 벚꽃으로 가득한 제주의 풍경이 낯설었다. 명절 정도에만 오가다 보니 제주의 봄을 상당히 오랜만에 보았던 탓이다. 서울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봄날 벚꽃이 풍성했다. 서울만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가능하면 제주로 떠나지 않으려 했다.

“제주는 예술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이야. 자연은 하루 이틀 보고 나면 계속 똑같은 느낌이라 심심해. 이것저것 볼 것이 넘치는 서울에서 하나라도 더 보고 즐기고 공부해야지. 부모님의 잔소리보다 서울에서 일하고 미술 실컷 보고 지내는 게 훨씬 좋아”

이런 생각으로 수년을 보냈다. 제2의 고향을 예술낙후 지역으로 폄하하며 건방진 태도로 그것이 젊은이의 미덕인 마냥 살고 있었다.

갤러리가, 미술이 한없이 마냥 영원히 좋기만 할 줄 알았다. 나름 A양의 인생에는 굴곡이 있었지만 갤러리와 미술을 사랑하는 것으로 위안 삼으며 삶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지난날의 아픔을 잊고자 일에만 몰입했던 탓일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신을 돌보는 길인 줄 알았다.

더 큰 굴곡에 부딪히고 나니 힘이 다 빠져나간 느낌,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작품으로 눈도 마음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나는 작품을 통해서 치유를 주창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것이 안 될 때가 있다니, 인정할 수 없어, 난 더 이상 진정한 큐레이터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까.” 하고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갤러리현대 이우환 전시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온갖 상념들이 바이러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떠돌고 퍼져갔다.

“대체 예술이 무엇일까. 내가 평생 예술을 사랑한들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영원한 사랑에 대한 집착을 어딘가 에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더 예술을 붙들고 그것을 열정이고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사랑도 일도 미지근한 온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활활 불태워야 살아있음에 대한 만족을 느꼈다. 온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성찰할 수 있는 여백, 영혼에 자신만을 위한 깨끗한 공간을 마련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몰랐다. 더 이상 불태울 대상이 뜻하지 않게 사라졌을 때 그 상실감이 엄청난 좌절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세상은 이렇게 생기 넘치는데 자신만 다른 세계로 왕따를 당한 것 같았다. 벚꽃 풍경 앞에 가슴이 아렸다. 바보 같을 정도로 예쁜 꽃을 좋아할 줄 알고, 힘들면 실컷 울고 금세 밝음을 되찾곤 했었는데.  

A를 지켜보던 아버지의 말씀이 그녀의 머리에 종을 울렸다. “식물이 자랄 때 썩은 잎사귀나 줄기를 가지치기 하지 않으면 예쁘고 건강한 꽃이 피어날 수 없다. 좋은 추억마저도 현재를 힘들게 하는 지난날의 일들은 잘라버려라. 그래야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

A양은 무기력함의 근원을 알아냈다. 이제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많은 기억의 꼬리표들이 쌓였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소화하고 저장할 용량을 초과했기 때문에 부패하거나 불필요한 지방이 되어 몸속에 해로운 축적물이 되어있었음을 깨닫는다. 새로운 감성이 생겨날 수 있는 자리가 부족하니 당연히 어떤 작품을 보아도 그 가치를 발견하려는 감성이 자라날 수가 없었고 동요조차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가지치기를 해줘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비워야 그 자리를 새롭게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우환의 작품철학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내가 그 동안 해온 작품설명은 진짜였다고 할 수 없구나. 작가의 위대함이 이제 진심으로 느껴지네.’

▲예술의전당 반 고흐 전시장 전경. 사진 = 왕진오 기자


제2의 고향 제주가 여백이 있는 그림으로 다가와

이우환은 큰 화면에 점하나 선 하나를 그림으로써 여백을 보게 한다.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작업이 극명하게 보여주는 개념은 점과 선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여백 즉, 무한한 세계가 열린다는 데에 있다. 둘 혹은 서너 개의 붓자국이 서로간 거리를 두고 드러나는 ‘조응’ 시리즈는 관계에 있어서도 여백을 두는 거리가 있을 때 외부와 내부 모든 곳으로 무한히 호흡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리라.

한 곳에 열정과 사랑이 지나치면 잠시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행복감을 느끼지만 여백 없는 공간은 좋은 공기가 들어오고 나쁜 공기가 빠져나갈 순환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에게 나쁜 공기란 상처, 분노, 미움, 집착이 아닐까. 다 사랑, 기쁨, 환희 같은 좋은 공기가 변질되어서 생성되는 것들이다. 그것이 깊은 슬픔이나 우울함으로 번져나가기 전에 가지치기 해주어야 일에 대한 회의감이나 사랑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A양은 영혼에 여백을 두는 일이란 자신에게 소중한 일을 다시 가꾸고 도전해 나갈 기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헤아리고 아껴줄 기회를 찾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에 감사했다.      

‘세상은 매일 새롭다, 사랑하는 사람이 매일 새롭게 아름답게 보인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의 아집, 고통, 슬픔을 빨리 털어버릴 줄 아는 훌륭한 존재였구나.’

A양은 그 동안 줌인(Zoom-In) 하는 데에 집착했던 자신 삶의 카메라를 줌아웃(Zoom-out) 함으로써 새로운 풍경을 얻는다. 제주의 청명한 하늘과 벚꽃이 흐드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좋은 작품이었다. 제주가 여백이 있는 그림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 신민 진화랑 실장 (정리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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