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김덕기]자연의 색채는 축복
자연의 변화를 빌어 색채의 아름다움을 전달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 창가로 고요하고 적막한 시골풍경이, 별일 없어 보이는 저 한없이 느린 풍경이 정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빈들에 하늘과 구름, 공기와 햇살은 아마도 태고 적부터의 변화를 반복할 뿐이다. 가끔씩 저 창가로 눈길을 주는 일을 제외하고 김덕기(45)는 늘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에게 창문은 구원 같은 장면을 순간적으로 안겨준다. 저 창가로 하루 햇살의 이동이 흐르고 사계절이 지나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하나의 프레임이자 화면인 창가는 그렇게 자연의 변화를 안겨주고 한시도 동일할 수 없는 자연의 초상을 환각처럼 제공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색채라고 생각하는데, 그 색의 기원이 저 창에서 연유한 듯하다. 그가 그리는 화면은 벽에 뚫린 창과 동일하다. 물론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작은 집과 화려한 꽃들로 가득한 정원, 행복해 보이는 기족구성원들의 모습은 부재하지만 온갖 색채가 보석처럼, 별처럼 화려하게 반짝이며 명멸하는 자태는 창밖 자연의 모습에서 연원한다. 자연은 그렇게 한시도 고정될 수 없는 색채의 향연이랄까, 끝없이 순환하는 모습들을 제공한다.
▲벚꽃 나무 사이로,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4.
김덕기는 그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기증 나게 변화하는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와 자연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색의 목록을 추적하고 있다.
그가 그리는 풍경은 환상적이고 동화적이지만 실은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눈과 가슴에 담아둔 이의 마음에서 저절로 빚어 나오는 색의 풍경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특정한 소재로 구성된 제한된 대상을 그리지만 그것을 빌어 자연의 변화무쌍한 색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전달하는 꿈같은 이미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 꿈을 극대화하기위해 우리가 통상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장소,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장면을 알리바이로 제공하고 그 위에 사계절의 변화, 시간별로 바뀌는 하루의 변화하는 색채를 눈가루처럼 뿌리고 있다.
▲햇빛은 눈부시게 눈부시게 빛나고, Oil Pastel, Acrylic on Canvas, 112.1X162.2cm, 2014.
이런 그리기방식은 어쩌면 동양화의 미점에 해당하는 기법이다. 수묵으로 이루어진 미점을 쌓아나가는 변관식과 같은 산수화와 유사하게 김덕기는 아크릴물감덩어리를 원형의 점으로 촘촘히 찍어나간다. 비록 매체는 다르지만 아크릴물감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미점풍경화라고나 할까?
그가 찍어나가는 점들은 원근을 구분하거나 밝고 어두운 부분의 구별, 그리고 꽃과 과일을 표시하거나 반짝이는 수면의 표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데 동원된다. 동시에 이 점들은 화면을 전체적으로 평면성을 강조해주면서 사실적인 풍경이면서도 가상적이고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물감과 붓질로 구성된 조형체계임을 설득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미점과도 같은 점들은 그림을 온통 순수한 색채 그 자체로 인식시키는 편이다.
프레임이자 화면인 창가서 발견한 ‘마음의 풍경’
김덕기는 현실풍경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는다. 그것을 사진이나 스케치로 모은 후에 이를 그림으로 재구성한다. 근작 또한 여전히 김덕기풍의 소재들로 가득하지만 실은 제주도에서 보낸 여행의 경험이 그림을 이룬다.
▲감귤나무 사이로, Acrylic on Canvas, 53X45.5cm, 2014.
그는 제주도의 여러 풍경들을 모은 후 자신이 즐겨 그리는 전형적인 소재와 뒤섞었다. 무엇보다도 수평의 넓은 바다와 오름, 돌담에 싸인 지붕 낮은 집들이 있고 마당에는 감귤나무와 다양한 화초들이 무성하다. 검은 돌들을 쌓아 만든 담이 집과 집을 구분하고 뱀처럼 구불거리는 작은 길들을 만들고 올망졸망하게 붙은 아늑한 동네풍경을 완성한다.
그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주택과 마당, 그리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구성해서 그만의 제주도 풍경화를 그렸다. 화면 상단으로 차오르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그 아래 자리한 집과 감귤나무, 돌담과 길들이 이루는 전원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제주도풍경의 전형성을 환기해준다. (중략)
김덕기는 제주도의 풍경과 그 안에서의 일상의 행복을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는 항상 다정한 부부와 어린 자녀가 함께 사는 정원이 딸린 교외의 작은 집이 등장한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을 최고의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오늘날의 ‘세화’, ‘행복기원도’에 해당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이 산다는 것은 가족 안에서 산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인간 삶의 근원적인 구조’라고 말해볼 수 있다. 동시에 가족이란 ‘육체로서 감각되는 일상적 현실’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늘 가족과 함께 하고 그 가족과 육체적, 심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략)
▲감귤나무 사이로, Acrylic on Canvas, 53X45.5cm, 2014.
아름답고 이국적인 집과 정원, 꽃밭과 새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강아지와 함께 즐겁게 뛰어논다. 핵가족의 초상이 자잘한 일상의 풍경 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작가에게 그림이란 단란한 가족의 일상을 기록하는 일이자 그것을 시각적인 장면으로 연출하는 일이다. 작가의 투명하고 성실한 삶이 투영된 이 가족의 초상은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풍경화’일 것이다.
그의 마음의 풍경이 이번에는 제주도의 자연과 만났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가, 질료성을 지닌 색이 미점으로 박혀서 빛을 발한다. 햇살과 바람, 공기 안에서 사는 인간의 눈과 몸이 읽어낸 풍경이고 대기의 변화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축복임을 그의 그림은 새삼 일깨운다.
- 박영택 (미술평론가) (정리 = 왕진오 기자)
박영택 (미술평론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