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호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2014.04.21 13:24:29
“내용증명에는 꼭 대응을 해야 하나요?” 저희 회사로 많이 문의가 오는 내용입니다. 답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내용증명에는 꼭 답변을 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답변을 할 때에는 신중히 해야 한다.’ 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내용증명 우편을 등기로 받은 경우, 상당히 불안해하며 내용에 관계없이 꼭 답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증명에 대한 답변으로 소위 소송의 주요 쟁점에 대해 ‘자백’을 하는 내용을 발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용증명은 보통 “귀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귀사의 무궁한 발전을 바랍니다.” 등의 호의 적인 문구로 시작해 “이에 상응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O월 O시까지 답변주시기 바랍니다.” 등의 살벌한 문구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내용증명을 처음 받고 나면, 보통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말로해도 될 것을 서류를 보냈다는 점에 먼저 분노하고, 그 다음으로는 이 내용증명의 법적 효력이 어떻게 되는가를 궁금해 하고 불안해합니다.
제게도 안타까운 의뢰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소송은 어차피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증명할 책임이 있는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순간적인 분노에 이끌려, 상대방에게 증명책임이 있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증명을 발송해서 유리한 소송구도를 불리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순리에 따라 해결됐을 사건인데, 내용증명에 대한 답변을 잘못 보내 자신의 과실을 인정해 버린 의뢰인들이 제게 억울하다고 하소연 합니다.
돈 빌린 사실이 없다 vs 빌린 돈 다 갚았다
민사소송법 교과서에 나오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원고가 피고에게 빌려준 돈을 갚을 것을 청구한 경우, 피고가 빌린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경우와 빌린 돈을 다 갚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피고가 돈을 빌린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경우, 원고는 차용증과 영수증, 계좌이체 내역 등을 증거로 제출해 자신이 돈을 빌려줬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반면에 피고가 갚았다고 답변한 경우라면, 피고의 답변 속에는 자신이 돈을 빌린 사실은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고가 오히려 영수증, 입금증 등을 증거로 제출하면서 자신이 돈을 모두 갚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위 사건에서 원고도 돈을 빌려줬다고 증명할 수 없고, 피고도 갚았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피고의 답변에 따라 소송의 승패가 뒤 바뀔 수 있습니다. 피고가 ‘빌린 사실이 없다’라고 하면, 다른 조건이 없는 한 피고가 승소합니다. 저도 변호사인지라,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편이 증명하기 어려운 내용들을 상대방에게 내용증명의 형식으로 살짝 던지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저의 의도대로 내용증명에 ‘자백’하는 취지의 답변을 해서 보낸다면, 상황은 상당히 유리하게 바뀔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꼭 내용증명이 아니라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편에 유리한 답변을 이끌어 내는 소송 기술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답변이 중요, 답변 후 철회는 불가능
답변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가는 행정청의 질의 회신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행정청의 회신문은 대체로 명백한 사안이 아닌 한, 아주 간곡한 문구로 사안의 핵심을 피해나간다는 느낌을 줍니다.
행정 소송 시에 행정청의 회신은 대부분이 증거자료로 제출되기 때문에, 법률분쟁에서 행정청이 자신들이 불리한 점을 인식했다면 답변을 보낼 때 상당히 신중한 것이 보통입니다.
소송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송에서 피고가 소장을 받은 경우 일정한 기간 내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만일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패소 판결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소장을 받고 나서, 급한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이런 저런 내용을 담아 답변서를 발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을 주워 담기 어렵듯이, 일단 답변을 하고 나면 이를 철회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본인이 아무리 법률적인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이런 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 법률전문가의 조언을 한번 쯤 받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상담만으로도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습니다.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 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 (정리 = 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