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뉴스]박흥용 만화: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광대처럼 “만화는 그 안에 세상 모든 것 담을 수 있다”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만화가 박흥용은 2010년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원저자로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후배 만화가들의 존경을 받으며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 중 한 명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아르코미술관에서 8월 3일까지 개최하는 전시 ‘박흥용 만화: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는 그의 만화 작품을 전시 공간에서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상업만화에 익숙한 독자나 관객들에게 기존 장르만화적 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만화의 미학적이고 실험적인 측면을 소개한다. 작가의 펜화 화면 속에 담긴 특유의 만화적 시도를 데뷔작 ‘돌개바람’(1981)부터 최근작 ‘영년’(2013, 출간 중)까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박흥용 작가는 한국에서 1980년대 만화의 새로운 흐름 한가운데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데뷔 초부터 주목을 받았다. 현재는 만화계의 중견 작가로 한국적 정서를 심도 있게 살피며 만화에 문학적 깊이를 더했다는 평을 받는 ‘작가주의 만화가’라고 할 수 있다.
작가주의 만화는 대중적인 상업만화들의 전형성이나 표준화된 형식을 거부하고, 작가만의 독자적인 주제와 형식을 꾸준히 시도해온 만화를 일컫는다.
5월 29일 전시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박흥용 작가는 “한국 만화계의 대선배들이 소개되어야 할 자리인데 어리둥절하다”며 “전시에 소개된 만화들은 출판에 맞추어진 작업들이지 전시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내 첫 번째 개인전이지만, 또 마지막 개인전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주의 만화가인 그는 만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그려온 것으로 유명하다.
먼저 그의 작품이 지닌 주제나 내용은 상업만화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랑이나 성공 등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한국의 현대사, 생명과 깨달음, 공동체 등의 화두를 다루면서 시대와 삶에 대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메시지를 표현했다.
한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도 기존의 역사만화라는 장르의 틀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의 만화 속 인물들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극적인 사건들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고난과 시련 속에서 상황의 굴레를 벗고 조금씩 깨달음을 얻어가는 성찰의 길 위에 놓여 있다.
박흥용 만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깊이 있는 이야기와 메시지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만화의 표현 형식에서 시점의 다양성과 화면의 완급조절, 운율감 등 흡사 영화의 미장센, 음악의 멜로디 같은 만화만의 요소를 적극 활용한다.
만화 칸 안의 이야기와 그림들을 따라가며 얻는 속도와 긴 호흡을 갑자기 끊어내는 그만의 독자적인 연출은 초기 단편만화에서부터 조금씩 드러나 이후 중장편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영화의 롱테이크와 같은 효과, 칸 나눔을 통해 얻는 슬로우모션, 밀도 있는 분할과 동양화의 여백으로 채워진 칸의 혼용 등 박흥용의 만화 연출은 그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는 “만화는 화장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만큼 쉽게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이 만화지만, 또한 마음만 먹으면 다른 예술 장르와 같이 깊이 있는 세계를 표현할 수도 있다. 만화는 그 그릇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세계를 그 안에 담을 수 있다”고 만화의 매력에 대해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런 박흥용의 만화가 지닌 주제 및 형식적 독특함을 접할 수 있는 작품 25여 편의 다양한 화면과 칸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현재 쉽게 접하기 힘든 1980년대 데뷔작 ‘돌개바람’을 비롯한 초기 단편들을 아카이브 형태로 선보이고, 대중적 만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본격적인 장편만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호두나무 왼쪽길로’, ‘내파란 세이버’를 소개한다.
이들 세 편은 각각 역사만화, 여행만화, 스포츠만화라는 장르의 틀 안에 있지만, 전형적인 장르만화의 이야기를 따르지 않고 ‘깨달음과 성장의 여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1990년대 만화의 독자층을 성인으로 끌어올리며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의 원작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작품의 원화를 보면서 전문가 인터뷰 접할 수 있어
한편 ‘빛’과 ‘소리’라는 특정 소재에 천착하면서 옴니버스만화 형식을 활용했던 ‘빛’, ‘쓰쓰돈돈쓰돈돈돈쓰돈돈쓰’ 그리고 ‘경복궁학교’도 만날 수 있다. 소리를 소재로 다루었던 작품의 경우 작가가 실제로 작업하며 들었던 음악과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했고, ‘빛’에 등장하는 환등기로 작품 ‘빛’을 만나는 등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
2000년 이후에 공동체라는 화두로 가진 작품 ‘그의 나라’와 최근 출간중인 ‘영년’을 한 공간에 선보이면서 초기 작업에서 보여준 모티프가 시대 배경을 달리하여 어떻게 새롭게 구현되고 있는지 또한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배치하기보다 만화사적 의의를 가진 소재나 주제에 집중하여 전시 공간을 구성하고, 섹션별로 만화전문가들의 인터뷰 영상을 볼 수 있게 구성해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관객들은 기존에 출판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작품의 원화를 직접 감상하면서 작가가 만화를 통해 고뇌했던 다양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작가가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일 것이라고 말한 이번 전시는 만화가 박흥용이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그동안 보여주는 ‘길 위의 변주곡’을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안창현 기자
안창현 기자 isangah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