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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최재헌 교수]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등재 주역 “세계 최초 초대형 전시 수도다”

대학원에 세계유산학과 신설, 융합형 국제인재 양성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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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7호 정의식 기자⁄ 2014.07.17 08:50:16

▲최재헌 교수. 사진 = 이성호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건국대 최재헌 교수는 지난 6월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등재신청서 작성의 전 과정을 맡았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답사와 연구로 그를 도운 덕에 남한산성은 한국에서 11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1300여 년 간 우리 민족의 피난처이자 반격의 거점이었던 남한산성, 그 진실과 내막을 최 교수를 통해 들었다.』


건국대학교 이과대학 지리학과 최재헌 교수가 1981년 서울대학교 지리교육학과에 입학한 후  지리학 외길 연구에 들어선 것은 훌륭한 스승 때문이다. 이기석 교수, 지리학계 거목으로 동해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국제무대에서 일본해 표기의 부당성을 지적해온 그의 사사를 받은 덕분에 지리학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영어로 교수할 만큼 영어 실력을 키웠다. 뛰어난 어학실력은 이후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을 위한 무기가 됐다.

한국에 돌아와 건국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로 일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서울과 도쿄, 베이징을 잇는 ‘베세토 프로젝트’의 실무를 맡았다. 2008년부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자문기구인 이코모스(ICOMOS.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에 참여,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전력하게 된다.

지난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카타르 도하 국립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8차 회의에서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세계유산은 해인사 장경판전(1995년), 종묘(1995년), 석굴암·불국사(1995년), 창덕궁(1997년), 수원화성(1997년),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에 이어 총 11점이 됐다.


“세계인이 공통으로 지키고 전승해야 할 유산”

과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무엇일까?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의거해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말합니다. 한 민족, 한 국가에서만 보존되고 전승되는 유산이 아니라, 세계인이 공동으로 지키고 전승해야 할 유산이라는 얘기죠.”

세계유산은 자연유산(natural heritage),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 복합유산(mixed heritage) 등 3종류로 구분되며, 2014년 6월 기준으로 전 세계 161개국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은 총 1007점이다. 이 중 문화유산이 779점, 자연유산 197점, 복합유산이 31점이다.

유네스코 지침에 따르면, 세계유산은 ‘인류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지닌 유형의 유산으로,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를 입증해야 한다.

이 중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는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문화적, 자연적 중요성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① 인류의 창조적인 천재성이 만들어낸 걸작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 ② 인류의 중요한 가치가 교류된 것 ③ 문화적 전통, 또는 현존하거나 소멸된 문명과 관계되면서 독보적이거나 특출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것 ④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특정 유형의 건조물,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 ⑤ 환경과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전통적인 인간 정주지, 토지의 이용 또는 해양의 이용과 관계되는 탁월한 사례 ⑥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지닌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앙, 예술ㆍ문학 작품과 연계된 것 등이다.

“남한산성은 이 중에서도 ②와 ④를 충족하는 유산이었습니다. 등재기준 ②에 따라 ‘동아시아 도시계획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증거로서의 군사유산’으로 간주되었고, ④에 따라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과 방어전술의 시대별 층위가 결집한 초대형 포곡식 산성’으로 평가된 것입니다.”


치욕의 역사 아닌 국방과 항전의 역사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에 걸친 산악지대에 건설된 남한산성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병자호란 패배의 치욕이 서린 곳’ 또는 ‘서울 근교의 나들이 코스’ 정도로 인식돼있다. 하지만 최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남한산성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초대형 전시 수도”이자 “민족의 생존을 지켜온 최후의 보루”로 “후손들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산”이라는 것이다.

“한양성에서 남한산성까지 지도로 살펴보면 직선거리가 20km밖에 안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사시 왕조가 피난해 장기간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만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시수도이고, 총 면적 52만 제곱미터의 초대형 성곽도시로 종묘사직이 있는 유일한 산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선조 역대 왕들이 수시로 방문했고, 정조가 가장 많이 찾았습니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남한산성을 들렀지요.”

최 교수는 지형도를 통해 남한산성의 성벽 라인이 등고선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건설자들이 자연지형과 성곽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방어에 최적인 요새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 지형인 북쪽면은 성곽이 높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남쪽은 성곽을 높게 쌓았다.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한 카타르 도하 제38차 세계유산위원회. 나선화 문화재청장(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과 김문수 경기지사(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등재가 확정되자 박수를 치고 있다(아래 사진). 사진 = 연합뉴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선정된 중국 산시성의 핑야오 성은 평야지대에 세워진 평지성이지요. 당연히 성벽은 지면과 수직으로 높게 세워집니다. 반면 일본의 성들을 살펴보면 경사가 45도 각도에 가깝습니다. 완만하지요. 남한산성은 하단부는 경사가 졌지만 중간부터는 수직으로 경사가 급해지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적군이 침입해 성벽을 기어오르다가 급경사지대에서 패퇴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방어에 최적인 구조입니다.” 남한산성이 당시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성곽 축성 기술을 받아들여서 건설됐다는 증거다.

1636년 12월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침입,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9년 전의 정묘호란 때처럼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적의 진공이 너무 빨랐다. 결국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잉카의 맞추피추, 이스라엘의 마사다요새와 흡사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신하들은 처절하게 항전했지만 보관된 식량이 50일치에 불과해 결국 45일 만에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오늘날 잠실 인근의 나루터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당한다.

이 때문에 남한산성은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치욕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지만, 최 교수는 이러한 시각을 강하게 부정한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가 아닙니다. ‘국방의 역사’, ‘항전의 역사’입니다. 1300여 년에 달하는 긴 역사 속에서 남한산성은 함락된 적이 없습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이 아닌 삼전도에서 항복한 것 역시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반격당할 수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남한산성의 시작은 통일신라가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이다. ‘주장(晝長)’은 ‘낮이 길다’는 의미로, 해발 500m 내외의 산봉에 에워싸인 산성 내부를 비추는 해가 길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고려 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남한산성은 이세화 장군이 항전했던 근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전시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강화됐다. 5군영의 하나인 수어영이 주둔했으며, 수어사는 국왕의 최측근이 맡았다.

주위에 9개의 승영사찰을 건립해 승병을 키운 것도 독특한 역사다. 승병들의 대장에게 ‘팔도도총섭’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주고 삼남 지역에서 모인 승군이 300년 이상 축성과 관리 보수를 맡았다. 승군들은 수시로 무예를 수련했고, 9개의 사찰에는 유사시 사용할 무기들을 보관했다.

“일제는 조선 침탈의 막바지인 1900년대 초반 장교들을 파견해 남한산성을 조사했고, 1907년에는 8개의 사찰을 폭파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초기 의병들이 서울진공작전을 수립할 때 거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의병들은 관군에 의해 철수했지만 다행히 전력을 온존할 수 있었고,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운동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산성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하고 재건했습니다. 이렇듯 긴 역사 속에서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 최후의 보루로 버텨왔습니다. 국방의 성지라고 부르는 게 맞습니다.”

잉카제국의 마추피추,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처럼 남한산성은 한민족의 생존을 책임진 최후의 근거지로 건설되었고, 그 역할을 해왔다는 주장이다.

▲(왼쪽 위부터)연주봉 옹성, 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 행궁, 원성 남벽


실제로 남한산성의 방어력은 긴 역사속에서 여실 없이 입증됐다. 애초에 신라인들은 20만명이 넘는 당나라 대군에 맞서 한강 유역을 지켜내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주력부대를 막아냈고, 병자호란 때도 청나라 12만 대군의 포위공격을 막아냈다.

그 많은 전쟁과 풍상을 겪고도 남한산성은 여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일부 외성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이렇듯 오랜 세월 성곽이 굳건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옹성 등 미복원 지역의 벽돌들을 연구하다 놀라운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벽돌의 원형 물질을 분석하다보니 이상한 성분이 검출된 것이지요. 중앙문화재연구소 유네스코 컨설턴트인 국내 최고의 석물전문가 임권웅 박사의 연구팀이 조사한 결과, 문제의 성분은 ‘동유(桐油)’로 확인됐습니다. 오동나무의 기름입니다. 왜 오동나무 기름을 전돌(벽돌)에 넣었을까요? 동유는 습기를 막아주는 방수제(防水劑) 역할을 했습니다. 성곽이 오랜 시간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선정을 위해 최 교수와 등재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먼저, 국문과 영문으로 등재신청서를 작성해 세계유산 선정의 논리를 제공하는 작업을 최 교수가 도맡았다. 현장 확인을 위해 남한산성을 수없이 방문했고, 결국엔 방문횟수 세는 것을 포기했다.

한편, 신청서 작성과 수많은 답사보다 힘들었던 것은 일부 주민들의 반대 활동이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 재산권 침해를 입을 수 있다는 오해 때문에 일부 주민들이 끊임없이 반대 민원을 유네스코에 올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분들의 반대를 위해 제시한 여러 근거들이 오히려 남한산성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결과가 돼서 선정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옹성 벽돌에 오동나무 기름 넣어 습기 막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의 의미에 대해 최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의 세계적 흐름을 보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그 나라 역사와 문화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척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각국이 저마다 자기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뒤처질 수 없죠. 경제적 요인도 있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면 일단 국내외 관광객이 크게 늘어납니다. 남한산성만 봐도 벌써 관광객이 3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나라는 50곳의 이탈리아다. 2위는 47곳을 보유한 중국이고, 3위는 44곳의 스페인이다. 이웃나라 일본은 18개이고, 우리나라는 남한산성이 등재됨으로써 11개가 됐다. 북한에 3개가 있어 합하면 14개다.

최 교수는 백제역사지구(공주·부여·익산), 서원, 한양도성, 사찰, 낙안읍성, 서해안 갯벌 등의 추가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웃나라의 잘못된 문화유산 추진을 막는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군함도’로 알려진 다카시마섬의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데, 강제 징용되어 희생된 한국인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요즘 연구하고 있는데, 저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인류의 보편적 이상’을 저해하는 문화유산은 있어선 안 됩니다.”

오는 11월 열릴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총회에 최 교수는 아시아지역 부회장으로 출마했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다.

“지금까지는 중국과 일본이 그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한국인인 제가 처음으로 선정된다면, 여러 의미를 지울 수 있습니다.”

최 교수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기 위해 보다 긴 시야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최근 건국대학교 대학원에 세계유산학과를 신설했다.

“이미 7명의 학생이 입학이 확정되어 올해 2학기부터 교육이 시작됩니다. 역사학과 지리학은 물론 어학까지 두루 능통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해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을 맡기려고 합니다.”

20여 년 동안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해온 최 교수는 여전히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앞으로도 계속 후진 양성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이다.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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