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 사람들 ⑨ 중부서 가정폭력전담경찰관 허배석 경장]‘거의 사회복지사’ 된 오지랖 경찰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로 가정폭력 해결…공로 인정받아 여성부 장관상 받아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경찰관 허배석 경장. 사진 = 안창현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가정폭력은 박근혜 정부가 성폭력, 학교폭력 등과 함께 4대악으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회문제다. 경찰은 가정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전담경찰관 제도까지 만들었지만, 감정의 골이 깊은 가정사에 일일이 개입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서울 중부경찰서 가정폭력전담 허배석(38) 경장은 이제 수많은 가정을 악에서 구해내는 존재가 됐다.』
서울의 각 경찰서마다 1명씩 있는 가정폭력전담경찰 중 보기 드물게 ‘남성’인 허배석 경장은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아직까지도 대부분 남자이고, 내가 남자이다 보니 가해자들이 터놓고 이야기하기에 편해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허 경장은 가정폭력 피해자만을 보호-지원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관리가 중요하고, 그래야 재범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허 경장이 가정폭력전담 업무를 맡았을 때 경찰서에서도 처음 시행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별도의 업무 지침이 없는 상태였다. 피해자 보호 조치와 재발 방지라는 큰 틀만 주어졌다. 그래서 당시에는 주로 112에 접수된 신고를 모니터링하고, 피해가정과 통화해서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로 역할이 제한됐다.
하지만 허 경장은 가정폭력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하지 않으면 재발 방지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곧 깨달았다. “지금은 신고가 들어오면 무조건 현장을 찾는다. 현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장에서 허 경장은 많은 경우 중재자 역할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각자의 마음에 진 응어리를 허 경장에게 이야기하면 그는 그것을 정리해 서로에게 다시 전달해준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그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며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내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가정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허 경장은 이런 중재자 역할뿐 아니라 주거환경을 바꿔주고 직업을 찾아주는 노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요인들이 가정불화와 폭력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신고가 접수돼 현장을 찾은 허 경장은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 이유가 “집이 더럽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집안 구석구석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세 자녀가 먹을 음식은 냉장고에 거의 없었다.
허 경장은 이들 부부와 대화하면서 종교에 독실했던 아내가 ‘남편이 결혼하려고 종교가 있는 것처럼 날 속였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는 점을 알아냈다. 허 경장은 아내와 긴 이야기를 나누는 한편,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 원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자원봉사자들을 모집해 집을 청소해주고, 외부 지원을 받아 가구를 마련해줬다. 허 경장의 이런 노력은 부부가 서로를 이해하고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가정폭력 가해자를 병원으로 찾아 설득하는 허 경장. 사진 = 중부경찰서
피해가족들 물심양면으로 도와
수많은 가정폭력 가정들이 처음부터 허 경장의 도움을 반기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뭔데, 남의 일에 간섭하냐!”는 반응도 많다.
허 경장은 “가정폭력전담 업무를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가정사를 접하게 된다. 내가 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간다 해도, 가족들 사이에 파인 오랜 감정의 골과 갈등까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다”면서 18층 아파트에서 어머니를 내던지고 자살하려 한 전 모(42) 씨의 사연을 들려줬다.
전 씨는 2008년 외환위기로 운영하던 식당 문을 닫고, 이혼을 했다. 두 자녀까지 볼 수 없는 형편에서 상실감과 우울증에 빠진 전 씨는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죽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전 씨는 20년 전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허 경장은 “서울 중구의 임대아파트에서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다. 전 씨가 술에 잔뜩 취해 70세 노모를 복도 밖으로 밀어내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어머니가 아들의 안쓰러운 모습에 회한의 쓴소리를 했고, 이에 전 씨가 화를 내며 벌어진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전 씨의 어머니 또한 과거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했고, 전 씨와 그의 여동생은 뿔뿔이 흩어져 20년 동안 보지 못했다. 여동생은 전 씨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이혼으로 전국을 떠돌며 불행하게 살고 있었다.
허 경장은 이들 가족의 기구한 사연을 알고 물심양면으로 돕기 시작했다. 전 씨를 수차례 설득해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게 하고 새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가정의 안정을 위해 인근 교회에 부탁하기도 하고, 기초수급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구청을 찾았다.
허 경장은 “오지랖이 넓다고 할까. 경찰서 내에서도 사회복지사 역할까지 한다며 가끔 놀림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돕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내가 잔정이 많기는 많은 것 같다”며 웃었다.
일반 직장을 다니다 남자들의 음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늦게 경찰이 됐다는 허 경장은 “이 일이 내 적성에 맞는다”고 말했다. 최근 그는 여성가족부장관상과 중부경찰서 인권상을 받았다.
(CNB저널 = 안창현 기자)
안창현 기자 isangahn@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