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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한국 단색화 역사’ 이끈 갤러리현대

대형 전시 ‘한국 추상화 18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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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24호 왕진오 기자⁄ 2015.03.30 14:54:26

▲갤러리현대 신관 지하에 설치된 윤형근 작 ‘Burnt Umber’. 사진 = 왕진오 기자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단색화 열풍이 꺼지지 않고 있다. 어디를 가나 단색화 작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술계의 외계인 취급을 받을 만큼 광풍 수준이다.

단색화 열풍 시대를 맞아, 이 장르를 태동시킨 원조격 화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면서 한국 화랑의 역사를 써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갤러리현대가 창립 45주년을 맞아 의미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한국 추상화가 18인의 작품을 모은 ‘한국 추상화’전이다.

갤러리현대는 그간 쌓아온 시간의 기록만큼이나 외형적 발전을 함께 했다. 근현대 대표 작가의 상당수 작품이 걸린 곳이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1969년 개관했음을 되돌아보면 민간 부분이 현대미술의 중심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갤러리현대 본관에 설치된 이성자 화백의 ‘그늘 없는 산’을 감상하는 관람객. 사진 = 왕진오 기자

1959년 서양화가 이대원(1921∼2005년)이 인수해 운영하던 반도화랑에 1961년부터 근무하던 박명자(72세) 갤러리현대 회장이 1970년 4월 인사동에 현대화랑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것이 갤러리현대의 시작이었다. 1975년 현재의 서울 종로구 사간동으로 이전했고, 1987년 갤러리현대로 이름을 변경했다.

박 회장은 “1970년 인사동에서 문을 연 이후 이응노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다가 전시공간이 크면 좋겠다고 해서 새 건물을 물색했고 아는 조각가가 사간동 땅을 추천해줬다”며 “당시 사간동 옆에 개천이 있어 저렴하게 구매했다”고 밝혔다.

“257㎡(78평)이었는데 3년간 팔리지 않았던 곳이다. 1974년 현대화랑 건물을 지은 후 1975년 첫 전시로 이응노 작품을 소개했다. 추상화는 1972년 남관 전시가 처음이었다. 신관은 앙드레김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했다”고 덧붙였다.

▲좌측부터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 정상화 화백, 도형태 갤러리현대 부사장. 사진 = 왕진오 기자

화랑 이름과 관련해서는 “처음 시어머니가 ‘한국화랑’으로 이름지었는데 좀 유치했다”며 “다시 지은 이름이 현대화랑이었다”고 설명했다.

“처음 현대화랑 문을 열 때만 해도 현대건설이 그리 크지 않았다. ‘갤러리현대’는 해외 아트페어에 나가다 보니 ‘갤러리’ 단어를 넣어야 한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1세대 화랑과 45년 함께한 한국 추상화 1세대의
궤적을 한자리 모아. “추억 얘기하고 새 추억 만드는 전시”

갤러리현대가 3월 25일∼4월 22일 여는 ‘한국 추상화(Korean Abstract Painting)’전은 한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화를 소개했다는 평가를 받은 18인 작가들의 작품으로 본관과 신관 모두를 채웠다.

박 회장은 “50~60대가 학창시절 봤던 현대화랑 전시를 기억하고 당시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전시”라며 “젊은 관람객도 이번 전시를 보고 훗날 그런 회상을 했으면 좋겠다”고 전시 의미를 밝혔다.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1972년 ‘남관’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추상작가들의 개인전을 열며 국내외에 알려온 궤적을 세대별로 정리했다.

▲갤러리현대 본관에 설치된 김창열 작 ‘회귀’. 사진 = 왕진오 기자

갤러리현대의 대명사와도 같은 김환기(1913~1974년), 유영국(1916~2002년), 김창열(86세), 이우환(79세)을 비롯해 문자추상의 대가인 남관(1911∼1990년), 이응노(1904∼1989년), 프랑스를 제2의 모국으로 삼아 국내에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온 한묵(101세), 이성자(1918∼2009년), 그리고 미술 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단색화의 주역들인 이우환, 박서보(84세), 정상화(83세), 윤형근(1928∼2007년), 정창섭(1927∼2011년), 김기린(1999∼2000년), 하종현(80세), 권영우(1926∼2013년)의 작품이 내걸린다.

이외에도 몇 개의 선과 점으로 엄격하게 절제해 표현하면서도 전통 동양화 지필묵의 세계를 모더니스트적인 어법으로 표현해 낸 거목 서세옥(86세), 김환기와 동세대에 속한 색채화가 류경채(1920∼1995년)의 작품도 공개된다.

▲갤러리현대의 ‘한국 추상화’전을 취재하는 기자들. 사진 = 왕진오 기자

류경채의 작품은 1949년 제1회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인 ‘폐림지 근방’ 외에는 덜 알려진 편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물의 재현에서 벗어나 회화 자체의 조형 논리와 구조에 눈을 돌려 ‘추상’ 양식을 도입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전 전시에 선보인 ‘계절’에는, 크고 작은 추상 형태와 색면들이 채워진 화폭에 산발적으로 적용된 마티에르에서 당시 ‘앵포르멜’의 화풍이 류경채의 변신에 견인차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점쳐보게 한다. 속도감 있고 다소 격렬한 필법을 사용했으나 단색조로 환원시킨 표면에서 그의 조형 어법이 어떤 극점에 도달했다는 인상을 준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류경채 작품의 역사

한국 미술에서 최초로 추상화를 소개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1세대 모더니스트 김환기, 유영국의 작품은, 기존 미술계가 고수해 온 구상 양식을 버리고 순수한 원색과 선만을 사용해 구성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단순화-평면화 함으로서 현대화-형식화를 이끌었다.

김환기와 동년배인 한묵과 일본 유학 후 프랑스로 이주 활동을 펼친 이성자는 큐비즘과 미래주의 또는 추상인상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기하학적 모티브와 분석적인 방식을 동원했다. 이를 통해 이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 분단 조국에 대한 막연한 불안으로부터 우주적 화합과 이상 혹은 한국의 정서를 담은 시적 감성의 추상양식을 구현했다.

이들 작가들보다 20년 정도 후에 탄생해 활동하며 1950년대 말~1960년대에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계를 풍미했던 이른바 앵포르멜 추상 양식을 거치고 일부는 옵아트, 팝 아트에 근간한 실험에 참여했던 작가들도 함께한다.

▲1975년 개관 5주년 때의 갤러리현대. 사진 = 갤러리현대

다양한 표정의 ‘물방울’로 유명한 김창열, 그리고 이우환을 위시해 에콜 드 서울을 창립해 단색화 경향을 파급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박서보와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김기린, 정상화, 권영우 등이다.

여기에 주로 일본에서 활동해 일본 비평계와 학계에서 모노하(物波)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곽인식(1919∼1988년)의 작품도 선보인다.

그는 1960년대 초에 철사, 돌, 바둑알, 석고, 철판, 유리 합판 같은 이질적인 사물을 캔버스와 결합시킨 전위적 실험 작업을 펼쳤다. 1960년대 말~7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노하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그의 작업은, 철판이든 점토든 혹은 화지이든지간에 표면과 지지대, 겉과 안, 공간의 외부와 내부 또는 표면과 표면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려 ‘관계’시킴으로써 이분법을 해소하려는 내면을 드러낸다.

‘모노하’로 이름높은 곽인식 작품도 함께 

한국에서 추상미술을 주도했던 18명 작가들에서 개개인의 차이가 발견되지만 또한 하나의 공통된 맥락 역시 흐른다. 이는 자연과 세상을 대하는 시각에서 비롯되며 서구의 추상미술과 구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미술사가 송미숙은 “단색화 작가들 거의 모두는 한국인의 정서를 나타내는 백색이나 가라앉은 중성적 모노톤으로 작업하며 색채보다는 드로잉, 즉 ‘선묘’를 중시한다. 이러한 ‘선묘’는 거의 무작의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행위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반복 행위는 색채의 단순화와 함께 작가로 하여금 명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는 물질을 넘어선 정신을, 어떤 우주적 해방감과 우주의 리듬, 혹은 기(氣)의 세계를 향수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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