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다다오 건축의 ‘들어갈수록 넓어지는 공간’ 체험
▲물속에 새까맣게 깔려 있는 해미석과 본관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아치웨이(archway)가 분위기를 연출하는 워터 가든. 사진 = 뮤지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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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진우 기자) 테마 여행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특히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다면 꼭 가볼 만한 곳이 있다. 당일 코스로 다녀오기에도 좋고, 1박 2일로 인근 골프장이나 스키장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에도 좋다. 한솔그룹 이인희 고문이 40여 년 간 수집한 컬렉션을 포함해 다양한 볼거리를 담아 넣은 필생의 역작 뮤지엄 산(Museum SAN)이다. 강원도 원주 한솔 오크밸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뮤지엄 산’은 산 속에 터 잡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명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일본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Ando Tadao)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신의 건축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며, 건물뿐 아니라 부지 전체를 뮤지엄으로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도심에 위치한 미술관이나 박물관과는 달리, 산 정상에 위치해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고 패랭이 꽃 내음과 자작나무가 어우러지며 관람객을 맞는다.
뮤지엄 산 오광수 관장은 “이곳에 오면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느낄 수 있다. 이 고문의 개인 컬렉션에서 출발했지만, 사적 재산의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향유하는 공공 문화유산으로서 사회 환원에 의미를 두고 있다”며 “방문객이 자연과 문화의 조화 속에서 잠시나마 문명의 번잡함을 벗어던지고, 심신을 치유하는 휴식과 자유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계기를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라시대 왕릉을 모티브로 한 스톤 가든. 사진 = 왕진오 기자
뮤지엄 산은 사계절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품에서 문화와 예술의 울림을 만날 수 있는 전원형 뮤지엄이다. 이런 형태가 되기까지 이 고문의 영향력이 컸다. 이 고문은 자신이 오랜 세월 열정적으로 수집한 300여 점의 컬렉션을 영구 기증했을 뿐 아니라, 건축가 안도가 뮤지엄을 설계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의견을 개진했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안도에게 ‘슬로우 뮤지엄’이라는 콘셉트를 제시해 관철시켰다.
뮤지엄 산 관계자는 “자연 속, 깊은 산 속에 세워진 뮤지엄과 그 속의 작품들이 어우러져 자연과 인간, 예술이 소통의 길을 만드는 것이 뮤지엄 산의 목적”이라며 “현대 문명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명상의 시간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전원형 뮤지엄, 슬로우 뮤지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고 설명했다.
공간·예술·자연 어울리는 뮤지엄 자체가 작품
뮤지엄 산은 특히 미술 전시 외에도 Space(공간), Art(예술), Nature(자연)가 함께 하는 복합 문화 공간에 주목한다. 산(山) 중에 있다고 해서 뮤지엄 산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공간·예술·자연이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며, 그 영문 머리글자를 모아 만든 이름이 바로 뮤지엄 산(SAN)이란다.
박물관을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종이 관련 예술품, 한국 근·현대를 대표하는 미술 전시 등이 돋보인다.
▲뮤지엄 산의 진입로. 플라워 가든의 패랭이 꽃밭 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주황색 황조롱이 형상의 조각 작품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작품은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로,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며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보여준다. 사진 = 뮤지엄 산
또한 빛과 공간의 예술가인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대표 작품 5개(스카이 스페이스, 디비젼, 호라이즌 룸, 간츠펠트, 웨지워크)를 볼 수 있는 특별 전시장이 있다. 이 고문은 자신의 컬렉션만으로도 충분히 미술관을 꾸밀 수 있었지만, 한솔문화재단의 실무진이 내놓은 “보다 먼 미래를 위해 제임스 터렐 관을 짓자”는 제안을 전폭적으로 수용해 뮤지엄 끝자락에 또 다른 ‘명작’ 하나를 추가시켰다.
하늘과 맞닿는 곳, 예술과 통하는 곳, 진정한 소통이 시작되는 곳을 추구한다는 뮤지엄 산은 노출 콘크리트의 미니멀한 건축물의 대가인 안도의 설계로 공사를 시작해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2013년 5월 개관했다. 대지 22만 평, 해발 275미터, 전체 길이 700미터, 관람 거리 2.3킬로미터로 총 관람 시간은 2시간가량 소요된다. 뮤지엄 건축 및 조경에만 약 600억 원 정도가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뮤지엄은 오솔길을 따라 웰컴 센터, 잔디 주차장을 시작으로 플라워 가든, 워터 가든, 본관, 스톤 가든 그리고 제임스 터렐관으로 이어진다. 핵심인 본관은 네 개의 윙(wing) 구조물이 사각, 삼각, 원형의 공간들을 연결하고 있다. 대지와 하늘을 사람에게 연결시키고자 했던 건축가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뮤지엄 산 관계자는 “사계절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품에서 건축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 공간인 뮤지엄 산은 ‘소통을 위한 단절(Disconnect to connect)’이라는 슬로건 아래, 종이와 아날로그를 통해 그동안 잊고 지낸 삶의 여유를 비롯해 자연과 예술 속에서의 휴식을 선물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제임스 터렐의 대표 작품 5개. ❶호라이즌 룸, ❷스카이 스페이스, ❸스페이스 디비젼, ❹웨지워크, ❺간츠펠트. 사진 = 뮤지엄 산
뮤지엄 진입로에 들어서면 패랭이 꽃밭 가운데 자리 잡은 거대한 주황색 황조롱이가 방문객을 반긴다. 마크 디 수베로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라는 움직이는 조각 작품이다. 폐산업 재료를 활용한 작품인데, 육중한 강철 빔이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뽐낸다. 꽃길을 지나면 자작나무 숲이 이어진다. 뮤지엄이 세워지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터줏대감들로 자연스러움이 우러난다.
플라워 가든을 지나고 워터 가든에 다다르면 예상 밖의 풍광이 펼쳐지며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워터 가든은 뮤지엄 본관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고요하고 눈부신 물의 정원이다. 물속에 새까맣게 깔려 있는 해미석과 본관으로 관람객을 맞이하는 아치웨이(Archway)는 워터 가든을 더욱 돋보이는 분위기로 연출한다.
공간 넓어지며 들어오는 빛도 많아지고…
본관으로 들어선 관람객이 동선에 따라 움직이면 시야가 넓어지고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건축가의 치밀한 공간 설계 덕분이다. 본관 부지는 내려가는 경사로인데, 안도는 천장을 수평으로 먼저 맞추고 건물을 설계했다. 그 결과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천장이 점점 높아진다. 처음엔 건물 자체에 눈길이 가지만, 갈수록 들어오는 빛의 양이 늘어나면서 더 큰 공간을 경험하게 해준다. 공간·예술·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목이다.
이 고문의 호를 따 지은 청조갤러리 3관의 원형 전시장이 그것이다. 이곳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자연 채광에 돌 벽이 감싸고 있어 성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 ‘위성나무(Satellite Tree)’가 전시돼 있다. 이 작품은 제작 후 거의 전시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올해 말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건물을 나오면 스톤 가든이 펼쳐진다. 신라시대 왕릉을 모티브로 한 스톤 가든은 9개의 부드러운 곡선의 스톤 마운드로 이뤄져 있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스톤 마운드의 산책길을 따라 해외 작가의 조각품을 감상하며, 대지의 평온함과 돌, 바람, 햇빛을 만끽할 수 있다. 미국 작가 조지 시걸의 ‘두 벤치 위의 연인’, 프랑스 출신 베르나르 브네의 ‘부정형의 선’, 미국의 대표적 미니멀 아티스트 토니 스미스의 ‘윌리’ 등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명품 조각들이 놓여 있다.
▲본관의 4 전시장 전경. 사진 = 뮤지엄 산
뮤지엄 산의 끝자락에는 세계적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 5점을 모아놓은 제임스 터렐관이 있다. 그는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빛의 아름다움과 상상 너머의 공간을 창출해 ,관람객에게 무한한 공간감과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명상의 시간을 선사한다. 안도가 만든 공간은 터렐의 빛 작품을 담기에 제격인 곳이기도 하다.
‘여성 아트 컬렉터 1호’의 필생 역작
범 삼성가 최고 어른인 이 고문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한솔그룹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이는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철저한 교육 덕분이다. 이 고문은 해외 출장이나 바이어와의 골프 등 경영 활동에 부친과 동행하면서 경영 철학과 경영 노하우 등을 전수받았다.
또한 이 고문은 재계에서 손꼽히는 대표적 미술 애호가로 ‘국내 여성 아트 컬렉터 1호’로 평가받는다. 이는 부친의 미술품 수집 취미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 고문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예술적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간 열정적으로 수집해온 아트 컬렉션이 제법 쌓여가자, 이 고문은 ‘언젠가는 멋진 전원형 미술관을 만들어 많은 이들과 향유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염원이 실현됐다. 그는 또 40여 년 간 수집하며 정이 듬뿍 든 작품들을 대중과 나누기 위해 기증했다. 이를 위한 전시실은 이 고문의 호를 따서 ‘청조(淸照)갤러리’로 명명됐다.
이 고문의 컬렉션 중에는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은 물론이고, 정규, 이쾌대, 최욱경 등 여간해선 접하기 힘든 한국 근·현대 작가의 수작이 대거 포함됐다. 또 장욱진, 유영국, 이우환 등 유명작가 그림도 수집했다. 작고 화가인 이대원, 박고석 화백의 그림은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초기작들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뮤지엄 산 설계한 안도 다다오는 누구?
“뮤지엄 산 부지를 처음 봤을 때, 가늘고 길게 이어진 산 정상을 깎은 듯한 아주 보기 드문 땅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주위와는 동떨어진 별천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과 바람, 빛과 소리로 명상적 건물을 짓는 안도 다다오는 1995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으며, 세계 3대 건축가로 꼽히는 거장이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가졌다. 집 근처의 목공소를 놀이터 삼아 나무로 집을 짓거나 물건 등을 만들며 유년기를 보냈다. 공업고등학교 시절 프로복서로 데뷔해 2년 동안 권투 선수로 활동했지만, 자신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이전부터 막연하게 꿈꾸었던 건축의 길로 들어섰다.
▲뮤지엄 산을 설계한 건축가 안도 다다오. 사진 = 뮤지엄 산
그는 대학에서 건축 교육을 받지 않고 여행과 독학으로 건축에 입문했다. 일본의 주요 사찰이나 신사, 유적지 등을 방문하고, 공예가와 도시 설계자에게 도제 수업을 받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건축을 체득해 나갔다. 이후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루이스 칸(Louis Kahn) 같은 건축가들의 건축물을 보며 견문을 넓혔다.
1969년 28세 때 고향인 오사카에 안도 다다오 건축사무소를 열었지만, 제대로 된 주택을 설계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4년 초 오사카 스미요시에 위치한 3가구형 연립주택 중 가운데 집을 헐고 콘크리트 박스형 주택으로 재건축한 그의 건축물이 데뷔작이 됐다. 이 건축물로 1979년 일본 건축학회상을 수상한 그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독학으로 세계적 거장 반열 올라
1970년대까지 오사카의 주된 건축 재료는 목재였다. 그러나 안도는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외부와 차단된 고요하고 내적인 사유의 공간을 연출했다. 또한 건물 한 가운데에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중정(中庭)을 들여 놓아 빛과 바람, 비 같은 자연과의 교감 통로를 마련했다. 안도는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절제된 빛의 사용, 순수하고 깨끗한 콘크리트, 철, 유리 등의 재료를 도입해 자신만의 평온하고 명상적이며 지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안도는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건축이 외적인 조건을 다루거나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나 음악을 접했을 때처럼 감각이 깨어나고 지적인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작업은 순수한 조형미와 자연을 끌어안은 조경, 명과 암을 극명하게 나누는 빛의 활용 그리고 순수한 재료인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물과 빛 그리고 노출 콘크리트의 건축가’라고 불린다.
뮤지엄 산은 일본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 물의 사원 등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안도의 건축 성향을 그대로 오크밸리에 옮겨 놓았다. 오히려 나오시마의 건축물보다 뮤지엄 산이 훨씬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워터 가든에는 매일 800톤의 물이 순환한다. 외관은 파주석과 원주산 귀래석을 사용해 자연친화적인 면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뮤지엄 산을 다녀간 관람객이 10만 명을 넘었다는 소식을 들은 안도는 “너무 예상 밖의 인원이다. 그 산 속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것이 놀랍다. 난 그저 1년에 한 3만 명 정도 다녀간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진우 기자 voreole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