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라이프 ㉑ ‘체육인 복지법’ 낸 이에리사 의원]“메달연금은 0.2%뿐…체육인 안전망 필요”
▲1973년 4월, 사라예보에서 열린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하고 귀국한 대표팀. 사진 맨 앞이 이에리사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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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최서윤 기자)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기적이 일어났다.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의 여자탁구 우승이라는 기록은 전 국민을 흥분시켰다. 힘든 시절 국민들에게 기쁨을 안겨준 이들은 여리지만 강한 소녀들이었다. 여자탁구 선수 중에서도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호옥란을 꺾은 이에리사와 정현숙 등은 국민적 영웅이 됐다. 당시 이들의 인기는 지금의 ‘피겨 여왕’ 김연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탁구 선수들은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태극기를 흔드는 국민들의 환호를 들었다. 전국에는 탁구 열풍이 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사라예보의 영웅’ 이에리사는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대회 한국 여자탁구팀 감독을 맡아 현정화, 양영자의 우승을 이끌었다. 2005년에는 제17대 태릉선수촌장이 돼 후배 양성에 힘썼다. 현재는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며 체육인들의 열악한 복지환경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체육인으로 살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에리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7월29일,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과 CNB저널과의 인터뷰는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더 넘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행됐다.
한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1973년 ‘사라예보의 기적’
1973년 이에리사 의원은 가냘픈 10대 소녀였다. 그는 언니, 오빠들을 따라 세계대회에 참가했다.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사실상 팀의 에이스로 꼽혔다. 랭킹 1위인 호옥란 선수를 제압한 것은 쇼킹한 사건이었다. 이에리사와 사라예보는 포털사이트 연관 검색어와도 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단어다.
▲19살 때의 이에리사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사라예보 덕분에 이에리사가 있게 됐죠. 사라예보의 기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저와 사라예보는 끊을 수가 없어요. 사라예보가 있어서 제가 태릉선수촌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게 됐으니까요. 당시 외국 사람들은 코리아를 잘 몰랐죠. 존재감이 별로 없었어요.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요. 제가 펴낸 ‘2.5그램의 세계’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니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죠. 요즘 후배들은 국제대회가 많아 외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잖아요. 우리 때는 돈이 없으니까 국제대회는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였어요. 한 번 못 가면 1~2년을 기다려야 했죠. 얼마나 어려웠냐면 국가대표 선수가 불고기백반 1인분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먹을 수 없었어요. 잘 사는 집은 달걀프라이를 먹었지만 그렇게 사는 집은 많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기억이 생생해서 지금도 태극기를 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1970년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미국와 중국의 ‘핑퐁 외교’다. 1971년 4월 열린 제31회 나고야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미국 탁구 선수들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두 나라 사이에 단절됐던 외교의 문이 열렸다. 대한민국에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잘 살아 보세’라며 추진한 새마을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뤄낸 사라예보의 기적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줬다.
국회의원 된 ‘사라예보의 영웅’, 후배 위한 ‘체육인복지법’에 주력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대였어요. 그럴 때 우승을 하니 누구보다 대통령께서 기뻐해주셨죠. 훈장도 주시고, 청와대에서 다과회를 열어 탁구도 함께 치셨죠.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은 대통령으로서도 상당히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대통령께서 체육중학교, 체육고등학교, 체육대학교, 태릉선수촌을 다 만드셨어요. 엘리트 체육인 입장에서 참 감사한 일이죠.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시고, 아낌없이 격려해주시고. 체육계의 큰 틀이 그때 만들어졌죠.”
이에리사는 2012년 19대 국회에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입성했다. 그는 체육인으로 활약하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계기에 대해 “후배들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처음 국회의원 제의를 받았을 때 많은 고민을 했죠. 제가 선수, 감독, 교수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체육계의 현 주소를 많이 봐왔습니다. 체육인 양성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데 대한 아쉬움을 항상 갖고 있었죠. 올림픽이나 국제경기에서 메달만 따면 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원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제의를 받고나서는 ‘내가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직접 뛰어들어 체육인의 자존심을 걸고 후배들을 대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우리나라는 운동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나 제 후배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운동을 하고 싶어도 주변 환경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따로 있나요. 체육인 출신인 제가 사회에서 느낀 문제점을 유익하게 개선시키는 데 앞장서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이에리사 의원은 2012년 10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체육인복지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주최했다. 사진제공 = 의원실
이 의원은 국회에 들어와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일명 ‘대한민국 체육유공자법’으로 불리는 법안이다. 이 법안은 발의 1년4개월 만인 2013년 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안 덕분에 국가대표 선수 및 지도자들이 훈련이나 국제경기 중 사망 혹은 중증 장애를 입으면 심의를 거쳐 국가유공자에 준하는 보상을 받는 길이 열렸다.
“선수나 감독이 시합 중 중증장애인이 되거나 사망 때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체조 종목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됐던 김소영 선수는 훈련 도중 목뼈가 부러져 1급 장애인이 됐습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종합마술 경기에 출전했던 김형칠 선수는 경기 도중 낙마해 사망했고요. 그동안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선수는 국가대표에서 퇴출당했죠. 그렇게 되면 생계도 막막해지고. 장애시 지급받는 연금액은 최대 월 60만 원에 불과합니다. 사망시에는 상해보험 보상 외 지원이 전무해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보상이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터키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도중 뇌출혈로 사망한 신현종 국가대표 양궁 감독은 사망 원인이 상해가 아닌 질병으로 판정돼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었죠. 이 얘기를 듣고 체육인들이 하나가 돼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그리고 법안은 통과됐습니다. 법이 통과되니까 양학선 선수가 ‘이제 마음대로 훈련해도 되겠네요’라며 기뻐하더라고요.”
대전에서 잡은 라켓 다시 들고 대전으로…“꿈 향해 한 계단씩 올라”
이 의원이 발의한 법안 중 ‘체육인복지법’ 제정안은 조속한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전 국가대표 역도선수인 장미란 장미란재단 이사장은 이 의원을 “체육인 복지에 눈뜨게 해준 재단 구상의 롤모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 이사장은 이 의원이 발의한 체육인 복지법이 통과되길 기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장미란이나 박태환이나 다 제가 아끼는 후배이자 자식 같은 아이들입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제가 아닌, 후배들을 위한 것들입니다. 제가 거침없이 추진할 수 있는 이유죠. 얼마 전,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역도 금메달리스트 김병찬 선수가 사망했어요. 교통사고가 나서 장애인이 됐는데 힘들게 살다가 고독사 했죠. 김 선수는 메달을 따서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 0.2%에 들어갔어요. 매달 50만 원을 받았죠. 하지만 메달을 따서 연금을 받으니까 장애인이어도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안 됐습니다. 연금으로 약값 하고 병원비 하고 어머니랑 둘이 살면서 힘들었죠.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모친이 2년 전에 돌아가시고 김 선수도 숨을 거뒀어요. 그게 계기가 돼서 역도인들이 ‘복지법이 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올림픽 세계 5위 국가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명성의 뒷면을 보면 체육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실업팀도 없고, 은퇴 이후 명확한 진로 확보도 되지 않는 열악한 여건이 있습니다. 50여만 체육인을 위한 복지 정책은 전무한 상황입니다. 종목별 선수 저변 확대 및 국가 체육 기반 내실화를 위해서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열악한 처우를 보완해야 합니다. 또 은퇴 체육인 생활 지원 등 최소한의 안전망을 갖추도록 하는 복지 정책과 일자리 창출 사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2014년 7월5일, 남수단올림픽위원회 창립행사에서 키르 대통령의 감사패를 받은 이에리사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이 의원은 이 밖에도 대한민국 체육박물관 건립, 태릉선수촌의 문화재 보전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리사 의원은 대전 대흥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라켓을 잡았다. 3남5녀 중 7녀인 이 의원의 집에는 탁구대가 있었다. 덕분에 그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탁구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라켓을 잡았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도랑 하나를 건너면 중학교가 있었어요. 거기 오빠들에게 탁구를 배우고는 했죠. 제 탁구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분도 대전에 계셨죠. 대전중학교 코치였던 고 양성준 선생님입니다. 충남 지역 탁구에 기여한 공로가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탁구계의 대부셨어요.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성여중에 입학했다가 언니와 오빠가 있는 서울에 올라왔죠. 문영여중에 스카우트 됐거든요. 언니가 점심-저녁 도시락을 싸 줘서 그걸 먹으면서 하루 6시간씩 탁구를 쳤습니다.”
처음 라켓을 잡은 대전은 이 의원에게 ‘향기가 있는 도시’다. 최근 그는 한동안 떠나 있던 대전 중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2015년 3월16일, 부탄 탁구장을 방문한 이에리사 의원. 사진제공 = 의원실
“대전은 저한테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지난 6월에 다시 대전 중구민이 됐습니다. 대흥동에 사무실도 마련했고요. 과거 중구는 대전에서 가장 번화하고 활력이 넘치던 곳이었어요. 이제 구도심이 돼서 예전 영화를 찾아보기 어려워졌죠. 유년시절을 보낸 이곳이 역사와 전통, 추억을 간직한 문화복합 신도심으로 재탄생할 수 있도록 역량을 발휘하려 합니다. 지역민심을 듣기 위해 민원의 날도 열고 있고요. 구 충남청사 국비 매입과 지지부진한 보문산 개발, 문화예술의 거리 활성화 문제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들입니다. 제가 지금 예결특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체육인복지 문제와 함께 낙후된 대전 지역 복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설 계획입니다.”
이 의원은 정치를 “탁구처럼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부정적인 의미의 나눠 먹기가 아니다. 양보할 건 양보하고 조화롭게 지내자는 뜻이다.
국회에 탁구동호회 만들어
“제가 입성하고 나서 국회의원 탁구 동호회를 만들었어요. 매주 수요일마다 장윤석, 김영우, 안규백, 염동열 의원 등과 탁구를 쳤죠. 지금은 보좌진 탁구 동호회도 있어요. 어제 정의화 의장님 뵙고 격려 차원에서 국감 끝나고 의장배 탁구대회를 한 번 하자고 말씀 드렸어요. 탁구와 정치는 타이밍입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약간의 스타일이 다를 수는 있지만 타이밍이 중요한 것은 똑같습니다. 핑퐁처럼 주고받는 거죠. 이 사회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여야가 함께 가야 합니다. 서로 조화롭게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기다림을 아는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다.” 이 의원의 말이다. 스포츠는 단시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또 국제경기에서 금메달을 따고 정상에 선다고 해서 탄탄대로만 걷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이 의원은 후배들이 각자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저는 평소 ‘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 덕분’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현정화, 양영자라는 훌륭하고 좋은 선수들을 만나서 성공하는 영광을 봤으니까요. 탁구는 한 체육관 안에서 탁구대를 여러 대 놓고 초등학생부터 성인 선수까지 모두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시합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전국의 탁구 선수들 대부분이 서로를 잘 알아요. 가족 같죠. 그러니까 격려해주고 끌어주고, 저도 지도자로 성공할 수 있었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세상이 많이 달라져 내 말이 다 옳지 않지만 사는 건 다 똑같다’는 겁니다. 생각하면 엄두가 안 나는 일들도 많지요. 실수도 하고 모르는 것도 생기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노력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특히 스포츠의 경우 하루 이틀 만에 성과를 볼 수 있지 않기에 꾸준히 노력하면서 인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우리 때보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아졌잖아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꿈을 향해 꾸준히 노력하면 제가 그 꿈이 이뤄지도록 계속 뒷받침하겠습니다.”
최서윤 기자 most_silen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