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외로이 깨고 치밀히 다시붙인 대리석”
이탈리아에서 주목받는 조각가 박은선
▲이탈리아 피사 국제공항에 전시되고 있는 박은선의 작품들.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왕진오 기자)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의 국제공항에 대형 대리석 조각 작품 9점이 여행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공항 입구에 마련된 전시 공간 덕에 이용객들은 자연스럽게 설치 작품을 보게 된다.
2017년까지 2년간 피사 공항 기획전에 초대된 작품은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활동하는 조각가 박은선(51)의 ‘복제의 연속’ 등 3~7m 높이의 대형 대리석 조각 작품들이다.
9월 7일 한국을 찾는 박 작가는 “공항에서 하는 전시는 생애 처음이다. 다양한 전시장과 야외에서 전시를 해왔지만 수많은 공항 이용자가 제 작품이 놓인 정원을 통과하지 않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장점에 더욱 끌리게 됐다”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과 함께한 박은선 작가. 사진 = 왕진오 기자
박은선 작가는 199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대리석 주산지인 카라라의 국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23년째 현지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3∼4년 전부터 이탈리아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유럽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회를 펼쳐왔다.
그의 공방은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있다. 이곳은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거주하며 작업했던 곳이며, 이후 살바도르 달리, 마리노 마리니, 아르망, 후안 미로, 헨리 무어 등이 활동했던 무대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조각가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박은선의 작업은 ‘균열과 깨짐’으로 이뤄진다. 두 종류의 대리석 판을 반으로 쪼개 틈을 내어 번갈아 쌓아 올리고, 구상하는 형태를 만들 수 있는 덩어리와 높이가 되면 비로써 조각을 시작하는 과정을 거친다.
완성된 조각은 정교하고 균형 잡힌 기하학적인 형태지만, 서로 다른 색과 질감을 가진 대리석 때문에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진다. 그는 “열린 틈으로 돌에 숨통을 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처음 쪼개져 들어간 부분들이 위아래로 이어져 숨 쉬는 조각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피사 국제공항 정원에 전시된 박은선의 작품들.
박 작가는 “인간의 이중적 성격을 묘사한 작업입니다. 물론 저를 빗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외국에 살며 힘든 시절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온전한 대리석을 파괴하고 깨뜨리면서 저의 숨통을 열어놓은 것 같은 효과를 준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또한 “깨짐은 우연이지만, 쌓아올리는 것은 사전에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고 설명했다.
현대 조각의 선구자 헨리 무어의 계보 잇는 행보
20여 년간 작업에만 매진하며 유럽과 남미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에 주목한 곳이 또 있다. 피렌체의 피티 궁전 안 보볼리 정원에서 내년 그의 초대 개인전이 확정돼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피렌체 시의 제안으로 진행되는 궁전 전시는 조각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발판이 된다. 현대 영국 조각의 개척자 헨리 무어(1898∼1986)가 이곳에서 전시한 뒤 대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피티 궁전은 메디치가를 넘어서기 위해 피렌체의 은행가 루카 피티가 지은 궁전이다. 현재는 라파엘, 루벤스 등 유명 화가들의 걸작을 소장하고 있는 갤러리와 마차 박물관, 자기 박물관, 의상 갤러리로 구성된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특히 박 작가의 작품이 놓이는 보볼리 가든(Boboli Garden)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피사 국제공항에 전시된 박은선의 작품.
박 작가는 “조각가로서 피티 궁전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은 영광이자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경험입니다. 이 정원에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대형 조각들을 설치해 이탈리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한국 조각가의 작품성을 알리고 싶습니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국인의 DNA를 작품에 담아내
조각 평론가 루치아노 카라멜은 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외형에서는 이탈리아 예술의 영향이 보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동양적, 명확하게는 한국적인 측면이 보인다. 그의 작품은 서양의 미니멀리즘과 다를 뿐 아니라 추상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동양적 미를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박은선 작가는 “저는 작업에 한국적인 것을 입히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피 속에 흐르는 한국인의 정서가 그대로 작품에 투영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넓은 공간에 배치될 때 여백의 미가 한층 돋보인다. 동양화에서 채움만큼 비움을 중시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다.
자연의 재료인 돌과 함께한 작업 여정에 대해 박 작가는 “인기에 영합해 장르 변경을 할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좋아했고, 아직까지 싫증나지 않는 것이 바로 돌 조각이라는 것이다.
피사 국제공항 야외 조각전을 시작으로 포르테 바르드 요새박물관, 빌 라기를란다 시립미술관과 스위스 바드라가르츠 트리엔날레 초청, 네덜란드 마크피트 비저 화랑 전시 등 유럽 지역에서의 전시를 진행할 박은선이 세계적 조각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그날을 기대하게 된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