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대신 마대를 사용해 마대 뒤에서 물감을 밀어내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단색화의 대가로 불리는 하종현 화백, “이런 것도 현대미술이 될 수 있다”는 일관된 개념으로 장르 파괴를 진행한 설치미술가 이승택, 극장 영화간판 그림과 주문 초상화를 그리다가 극사실 인물화로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이상원 화백의 행보가 주목을 받고 있다.
‘마대, 물감, 나 합일 40년’ 하종현 화백
“마대, 물감, 내가 합일을 이루기 위해 40년 동안 붓을 놓지 않았지요, 지금은 죽어도 원이 없지요. 하도 수행하듯 작업을 해서 사리가 많이 나올 것 같아”라며 크게 웃는다. 단색화 인기에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하종현(80) 화백. 그가 ‘접합’ 연작에 이어 연기로 그을린 신작을 선보이는 자리를 삼청로 국제갤러리 1관과 2관에서 9월 17일∼10월 18일 마련했다.
하종현 화백은 70년대부터 마대로 만든 캔버스로 미술계의 상식을 뒤집었다. 그는 단색화 태동기부터 화면의 앞뒤를 구분하는 관행에 비판적이었다.
그가 이번 전시에는 기법이자 색채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연기(smoke)’를 선택했다. 물감에 연기를 실어 캔버스에 씌우면 표면에 연기가 자연스럽게 부착된다.
하 화백은 물감이 캔버스에 어떤 방식으로 발리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2년 전부터 70년대부터 실험했던 연기 이용 작품을 완성하게 됐다. 뒤에서 밀어내 결을 파괴하며 진행했던 붓질로 완성된 표면에, 연기가 덮이게 되는 순간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입자들이 새로운 레이어를 쌓게 된다.
새롭게 만들어진 레이어는 바람에 의한 건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되는 신기원을 이뤘다. 마대 이용도 서양 것을 사용하지 않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Conjuction 15-106: 하종현, ‘Conjuction 15-106’. 마대에 오일, 194 x 259cm, 2015. 이미지 = 국제갤러리
하 화백은 “캔버스도 물감도 붓도 서양 화풍을 닮았다는 이야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찾은 재료가 마대였습니다. 엉뚱한 재료를 쓰면서 물감부터 붓까지 직접 만들어 사용한 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이어 “사용하고 있는 흙 같은 재료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자기 작품을 설득하면서 세상에 보이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각자가 생각한대로 작품에 대한 감상을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고 설명했다.
하종현이 추구하는 색의 경향 역시 자연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가 캔버스에 올리는 흙색이나 검정색은 단순히 검은 톤의 색이 아니라 어두워진 톤, 즉 기와가 오랫동안 비를 맞고 세월이 지나 퇴색된 것 같은 색이다. 한국의 도자기에서 느낄 수 있는 친숙한 색채로 어디에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은 색상이 나온다.
단색화의 철학 속에서 색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물질일 수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작품은 물질과 물감이 행위와 섞여 덩어리로 만들어지는 종합적 결과물이다.
평생에 걸쳐 유화를 주로 다뤘으며, 물감을 물질로서 캔버스의 뒷면에서 밀어 넣는 그만의 고유한 기법은 한국 현대사의 정치·사회적 질곡과 급격한 산업화 아래 억눌려야 했던 내면의 고통과 울분을 예술적으로 승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종현 화백은 1959년 홍익대학교 졸업 후 서울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1990년∼1994년 홍익대학교 예술대학 학장을 지냈고, 2001년∼2006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했다.
2002년 부산시립미술관, 2003년 밀라노의 무디마 파운데이션 현대미술관, 2004년 경남도립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대규모 회고전과 2014년 뉴욕의 블럼 앤 포 갤러리에서 전시를 펼쳤다.
주요 소장처로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홍콩 M+ 시각예술 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이 있다.
“세상에 없는 미술 한다” 이승택
“나의 줄 작업은 한 매듭 한 매듭 덩어리의 응결을 위해 묶고, 감고, 풀어 주면서, 애를 태울 것이다. 이런 도전은 금방 새것을 토해 낼 것 같은 기쁨과 슬픔이 엉켜 있는 채찍에 쫓기며 아무도 가지 않는 공허한 길을 향해 간다.”
설치미술가이자 조각가로 활동하는 이승택(83) 작가가 1980년 공간 5월호에 밝힌 자신의 작업관이다. 작가에게 공간은 늘 작품의 중요한 환경이자 재료다. 공간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의 눈에 들어 온 재료로 공간을 실험하며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1957년 돌멩이를 묶어 각목에 매달아 놓는 고드랫돌 작업은 그의 작업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특히 벽에 늘어뜨린 노끈과 벽에 비친 그것의 그림자는 평면 공간에 ‘3차원 선 드로잉’의 영감을 작가에게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전시장에서 선보일 기회를 당시 갖지 못했다. 작가 스스로 ‘그냥 시험 삼아 해본’ 작업들이었고, 미술계의 소문난 이단아였던 그 자신이 대표작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상업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노끈 드로잉 작업과 사람의 음모를 이용해 그린 스케치 작업들이 9월 16일∼10월 18일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을 가득 메웠다.
▲갤러리현대 이승택 개인전 전경. 사진 = 갤러리현대
작가는 한국 고유의 민속적 요소를 도입해 전통적이고 관념적인 조각 방법으로부터 이탈해 조각에 비물질적인 재료를 도입했다. 다양한 오브제를 끈으로 묶음으로써 촉발되는 독특한 시각적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작업을 ‘비조각’ ‘비미술’ 혹은 ‘드로잉’이라는 포괄적 용어로 명명했다.
“어느 사물에 노끈 같은 것을 묶으면 개념이 달라집니다. 고정관념이 바뀌어 저만의 새로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줄은 무한의 개념을 상징합니다. 공허하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그게 바로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승택은 한스 울리히 오브 리스트나,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등 세계 유명 큐레이터들이 발굴해 내기 전까지 묻혀 버릴 뻔한 미술가였다. 2009년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제1회 수상을 계기로 상업 화랑인 갤러리현대와 손을 잡고 뉴욕과 런던을 통해 소개될 때마다 세계 유수의 현대미술 컬렉션에 진입했다.
이승택은 한국 현대 미술사의 세력 다툼에서 매우 독보적인 작가로 불려진다. 단색조 회화와 민중미술로 크게 분류되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전위적인 작업을 통해 독자적인 작업들을 지속했다.
1957년경부터는 ‘바람’ 시리즈를 통해 형체 없는 조각을 시도했다. 대표작으로는 한계 없는 공간 개념과 자연 현상을 작품에 동참시켜 바람의 힘을 빌려 1000미터가 넘는 대형 천 조각으로 탁 트인 야외 공간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람 드로잉을 선보인 바 있다.
작가는 어떤 파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잠시 몸을 담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여러 이유로 재야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동년배 작가들처럼 화려한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국내에는 1% 작가가 없는 것 같습니다. 99%의 작가들은 남의 것을 모방한다고 보면 됩니다. 자기 것이 없는 국내 미술계에서 ‘새로운 미술을 하는 것’을 창조한 작가로 불리길 바랄 뿐입니다.”
이승택은 런던에서 열리는 프리즈 마스터즈, Spotlight 섹션(미술사적 의의와 작품성을 동시에 갖춘 작가를 심사위원단이 선정해 1999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만 출품될 수 있다)에 국내 작가로는 처음으로 2014년 개인 부스를 마련했다. 동시에 10여 명의 작가만 선정, 전시하는 프리즈 조각공원에도 작품을 내놓았다.
이승택의 작업은 런던, 파리, 이탈리아, 미국의 유수 컬렉션에 소장돼 있으며, 파리 마리안 굿맨 갤러리로부터 전시 제의를 받고 일정을 논의 중이다.
20년만에 ‘얼굴’ 다시 그린 이상원
이상원(80)은 20세가 되기 전 화가 꿈을 안고 홀로 서울 상경을 감행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일념으로 영화 간판장이와 미군 부대 주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청년기를 보냈다.
초상화가로 활동하던 중 1970년대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영정을 그리며 이름을 떨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초상화를 비롯해 해외 국빈을 위한 선물용 초상화를 도맡다시피 했다.
70년대 중반 모든 상업 초상화 주문을 접고 이 화백은 순수미술 작업을 위한 새 출발을 선언했다. 1970년대 후반 국전과 대비되는 민전인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한 ‘시간과 공간’이 연이어 수상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의 길을 걷는다.
▲이상원, ‘동해인’. 한지 위에 먹과 유화 물감, 165 × 125 cm, 2000.
가식 없는 노동의 결정체인 수많은 작품을 통해 ‘예술’ 그 자체를 향해 쉼 없이 달려온 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들이 ‘老病死 - 生 로병사 다시 생’이라는 타이틀로 9월 12일∼12월 6일 강원도 춘천시 이상원미술관에서 관객들과의 만남을 갖는다.
전시에는 대형 인물화 40여 점이 내걸렸다. 이상원의 인물화는 깊은 주름과 흰 머리칼과 다양한 표정이 두드러진다.
이 화백은 1990년대 후반기에서 2010년 중반까지 인물화 연작을 제작했다. 90년대 후반기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인을 소재로 한 ‘동해인’ 연작을 발표한다. 그 이후 2000년 후반기에서 2010년대까지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만난 사람들을 소재로 ‘영원의 초상’ 연작을 발표했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인과 인도인이 모두 포함됐고, 작품 속 인물들은 노인들이다. 이 화백이 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은 그의 나이 예순이 넘었을 시점이다. 상업 초상화가로 활동하면서 각양각색의 인물을 그렸던 이 화백은 순수 미술을 시작한 뒤로 20여 년간 인물화를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마치 상업 초상화를 그렸던 20여년의 시간을 지우개로 지우듯 다른 물상을 그리는 데 20년을 보낸 후 다시금 화폭에 인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이 화백은 “많은 인물들을 만나보면 그 중에 내 마음속에 깊이 파고드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그 얼굴은 삶의 진정성을 일깨워주는 느낌입니다. 의도치 않았지만 주름지고 못생긴 노인들, 특히 노파들의 얼굴에서 그런 감정을 강하게 받았습니다”고 설명했다.
특히 ‘동해인’ 연작에는 거칠고, 슬프거나, 무덤덤하거나, 피곤한 기색, 우울하고, 황망한 얼굴이 등장해 고된 바닷가의 삶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이런 얼굴들은 바닷가의 삶이 아니더라도 노년의 삶을 맞이한 많은 사람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인 문제’를 바라보는 현재의 작가의 음울한 시선과도 연결된다.
이 화백의 인물화는 화면 속 주인공의 외침이기도 하고, 그 인물을 통해 노년에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화가의 열정이기도 하다. 전시를 통해 노년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의 실마리를 잡는 시간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