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삶과 죽음은 한끝 차이라고 했던가, 서울미술관이 ‘이중섭은 죽었다’전으로 이중섭을 죽이고 또 살려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에 늘 꼽히는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됐다. 그런데 가장 사랑한다고 경외하면서도, ‘죽었다’고 전시 타이틀에 떡하고 내걸으니, 이건 두 번 죽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짓인가 싶다.
류임상 서울미술관 학예실장은 이와 관련해 “이중섭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지만, 그 삶이 영화와 소설 등을 통해 민족주의자, 또는 신화처럼만 알려진 면이 많다. 이번 전시는 그런 화려한 신화로 포장된 이중섭을 죽이고, 진짜 인간으로서의 이중섭을 살려내 그 삶과 작업을 들여다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됐다. 2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친 뒤 선보이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이중섭은 ‘황소’ ‘소와 어린이’ ‘길 떠나는 가족’ 등 수많은 걸작을 담긴 화가다. 미술에 문외한이라도 그의 이름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세를 탔다. 또 작품만큼 유명한 것이 그의 삶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생전 유독 고통스러운 삶을 산 뒤 사후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진정한 예술인은 각박한 현실에 몸부림치는 게 통과의례인양, 이중섭의 고통스런 삶과 작업 또한 사후에 많은 조명을 받았다.
▲‘대구, 경복 여관 2층 9호실’ 구역. “이중섭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던 시절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40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죽음 자체도 주목을 받았다. 부유한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 유학 중 일본 여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평생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독하게 작업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급격한 미술 시장의 부상과 더불어 이중섭의 극적인 인생은 신화가 됐고, 그의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로 거래되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특히 ‘황소’ 연작들을 한국전쟁이라는 큰 아픔을 지닌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탈이 되는 법. 이중섭의 천재성과 광기에 관한 이야기가 점점 부풀려지고 왜곡되면서 그의 신화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로 인해 그의 그림이 지나치게 과대평과 됐다는 구설수에 시달렸고, 2005년엔 위작 시비까지 불거졌다. ‘이중섭 신화’가 결국엔 이중섭이라는 인간 자체까지 묻어버린 것.
이중섭 그림을 19점 소장할 정도로 이중섭이라는 작가와 인간에 애정을 품은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은 이중섭 탄생 100주년 시점에서 신격화된 이중섭이 아니라 진짜 이중섭을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전시를 준비했다. 그는 “우리는 이중섭을 스스로 죽였다.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로 치켜세웠다가, 과대평가 논란과 위작 시비 등으로 나락에 떨어뜨렸다. 이 사건들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봤다. 이번 전시는 이런 논란과 포장에서 모두 벗어나, 그저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던 인간 이중섭의 삶에 접근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이중섭 신화? 그게 뭐 어쨌다고?
‘인간 이중섭’에 주목하는 전시로 돌파
전시는 신화가 돼버린 이중섭의 일생에서 거품을 걷어내고 자신의 가족을 정말 아꼈고,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했던 자연인 이중섭의 인생을 ‘죽음에서 탄생으로’ 역방향을 따라가는 방식을 취했다.
▲서울 신수동 작업실을 재현한 ‘서울, 마포구 신수동’ 공간엔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한국어로 재현됐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의 죽음이다. 환한 빛을 비추는 전등 뒤 벽에 이중섭의 드로잉 작품이 설치됐다. 주마등처럼 이중섭의 삶을 상징화한 모습이다. 그 벽면을 따라 이중섭이 누워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 사진이 보인다. 서울미술관 학예팀이 직접 가서 촬영한 것으로, 외롭게 자리 잡은 이중섭의 묘지에서 전시는 출발한다.
전시장에는 작품 총액이 200억 원에 달하는 이중섭의 걸작들이 전시된다. 그 유명한 ‘통영 앞바다’ ‘황소’ ‘피 묻은 소’ 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시는 이런 작품보다는 이중섭의 삶을 따라가는 데 더 중점을 뒀고, 작품들이 어우러지며 작가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전시는 크게 10 구역으로 구성됐다. 각 구역의 제목 또한 이중섭의 실제 활동 공간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이중섭이 썼던 화구들과 생활용품을 재현하는 등 그가 실제 머물렀던 공간을 되살렸다.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이 공간들은 재연됐고, 소품은 서울미술관 학예팀이 준비했다.
묘지 사진을 바탕으로 한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다음엔 ‘서울, 정릉 청수동’이 있다. 대구에서 투병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와 소격동 수도육군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간 시기를 보여주는 구역이다. 이때 잡지 표지와 삽화를 많이 그렸는데, ‘문학예술’, ‘자유문학’, ‘현대문학’ 등 그의 손길이 닿은 삽화를 통해 이중섭의 천진난만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중섭의 ‘황소’. 이중섭의 외로운 투쟁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사진 = 김금영 기자
‘대구, 성가병원│서울, 수도육군병원│서울, 성 베드루 신경정신과 병원’은 유독 쓸쓸함이 느껴지는 구역이다. 서울과 대구 개인전에서 작품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가족과 만나지 못하는 좌절감이 표출되는 시기다. 병상 등이 설치된 가운데, ‘피 묻은 소’ ‘싸우는 소’가 전시됐다. 류 학예실장은 “이전에는 힘이 넘치는 황소 그림을 그렸지만, 이 시기엔 이중섭의 절망감이 ‘피 묻은 소’로 표현됐다. 어려운 현실 속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전했다.
이렇게 혹독했던 시절 이전엔 ‘통영, 항남3길 25번지’ 구역이 있다. 일주일의 짧은 일본행 다음 행보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과 재회하는 기쁨 뒤 열심히 작업에 매진한, 희망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 ‘도원’, ‘황소’ 등이 그려졌다. 류 학예실장은 “활력이 넘치는 붓 터치와 과감한 묘사가 이 시기의 특징이다. 가족과 함께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는 이중섭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 경복 여관 2층 9호실’ 구역은 “이중섭이 미쳤다”는 소문이 돌던 시절을 재연한다. 서울에서의 개인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작품 값을 제대로 수금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시기다. 미쳤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자화상’을 볼 수 있다.
‘명동, 미도파 화랑’ 구역은 1955년 1월 18~27일 미도파 백화점 4층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의 개인전 시기로 데려간다.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해 큰 호응을 받은 성공적인 전시였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 구역에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극을 달한다. 신수동 작업실을 재현한 이 공간엔 이중섭이 아내 마사코와 주고받은 편지들이 한국어로 재현됐다. 작고 허름한 공간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버텼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부산, 루네쌍스 다방’은 복고 감성이 느껴지는 구역이다. 예술가들의 만남 장소였던 다방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곳에 이중섭의 대표적인 예술적 성취로 불리는 은지화가 전시됐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20세기 한국 화가들의 작품 중 유일하게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은지화 제작 방식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중섭, ‘통영앞바다’. 종이에 유채, 41.6 x 28.9cm. 1950년대. 사진 = 서울미술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주, 서귀포읍’ △‘도쿄, 문화학원’ △‘서울, 서울미술관’ 공간이 있다. 춥고 배고팠던 부산을 벗어나 제주로 건너가 해초와 게로 연명했던 시절, 도쿄 유학 시절, 이중섭의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서울미술관을 찾았을 당시로 시간 여행이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도쿄, 문화학원’에 전시된 ‘우주 01, 03, 04’가 눈길을 끈다. 마사코와 국경을 넘어 사랑을 이어간 이중섭이 보낸 엽서다. 류 학예실장은 “엽서를 보낸 시기가 칠월 칠석 즈음이다. 시기로 볼 때 견우와 직녀처럼 두 사람이 오작교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밖에 ‘하나가 되는’ ‘활 쏘는 남자’ ‘사랑의 열매를 그대에게’ 등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이중섭의 면모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전시는 신격화된 이중섭을 죽였다. 그리고 그저 똑같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이중섭을 되살렸다. 안병광 회장은 “올해 다른 미술관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이중섭은 죽었다’라고 던졌으니, 다른 곳에서는 ‘이중섭은 살았다’는 식의 전시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렇다. 이중섭은 분명 죽었지만 그의 삶과 작품은 앞으로 여러 전시를 통해 계속 되살아날 것이다. 올해 이어질 다른 전시도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