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연수 기자) 절한 영국의 천재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Lee Alexander McQueen)과 역시 천재 타이틀을 이름에 붙이고 다니는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의 패션쇼는 그들만의 독특한 의상 디자인과 갖가지 무대 장치, 그리고 모델들의 범상치 않은 연기로 기괴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아무리 길어도 30분이 채 되지 않은 그들의 짧은 쇼가 주는 감동은 한 편의 연극무대 혹은 퍼포먼스(행위예술)가 주는 감동에 버금간다.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아도 될 만큼의 완성도 있는 패션쇼가 등장하는 데는 오뜨꾸튀르(haute couture: 맞춤복)라는 의상 제작 방식이 근원이 됐다. 이는 프레타포르테(prêt-à-porter: 기성복)와 상반되는 제작방식으로, 한 사람을 위한 혹은 단 한 번의 쇼를 위한 의상이 한 벌씩만 제작되는 식이다.
한편 국내 패션계는 해가 지날수록 대중문화에서 영향력을 장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디자이너가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오뜨꾸튀르 같은 분야는 형성돼 있지 않다. 대신 일 년에 두 번 개최되는 패션위크에서 디자이너들은 재량껏 창의성을 뽐내기도 한다.
Doii x ARTNOM “The Lucky Horror Art Show”
토요일 이른 아침.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현장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DDP 입구에서부터 사진기를 든 포토그래퍼들이 주위를 서성거렸고, 한껏 신경써 멋을 낸 사람들이 역으로부터 혹은 시장 골목을 지나 속속 모여들었다. 조금 있으면 방문객으로 등장할 연예인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야외 포토존을 지나 쇼가 진행될 스튜디오로 접어드니, 한창 리허설이 진행 중이다. 프레스 존에 잠시 있으니, VIP 입장과 더불어 쇼장 입구에 도이 x 아트놈의 쇼만을 위해 마련된 포토 존에 연예인들이 등장한다. 쇼가 시작하기 전 몇 분간은 쇼장 안의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관객들은 연예인을 찍고, 연예인은 모여서 셀카를 찍고, 프레스(언론)는 그런 모습을 찍고, 또 다른 프레스는 그런 모든 풍경을 사진기에 담는다.
잠시 후, 암전이 되고, 전면의 거대 파티션에 짧은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기 시작됐다. ‘The Lucky Horror Art Show(럭키 호러 아트 쇼)’. 영상 작품의 제목이자 이번 쇼의 주제다.
▲패션쇼의 백 스테이지에 있는 아트놈 작가. 사진 = 아트놈
애니메이션에선 아트놈의 트레이드 마크인 양의 몸에 아트놈의 얼굴을 한 캐릭터가 전기톱을 휘두른다. 머리의 윗부분이 벗겨져 뇌가 노출되거나, 캐릭터의 몸이 반으로 쪼개져 그 안의 장기가 다 보인다. 예쁘고 귀엽기만 했던 꽃들은 두려운 표정의 얼굴로 바뀐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내용들이 전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가 표현하는 캐릭터는 원색의 평면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두꺼운 외곽선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캐릭터는 코믹스러운 이미지에 공포를 합쳐낼 수 있는 독특한 하위문화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어 첫 모델이 걸어 나오고, 파티션 뒤에서는 마치 총격 사건이라도 벌어지는 양 섬광이 번쩍거린다.
이번 1617FW(2016-2017 가을-겨울) 쇼에 선보인 이도이의 컬렉션은 그녀가 기존에 선보이던 정제되고 깔끔한 작품과는 달리, 새롭고 파격적인 시도가 많았다. 특히 반짝거리는 질감의 비딩 소재와 퍼(털) 등의 매우 극단적인 성질을 가진 소재의 조합들이 그녀가 원래 가진 선명함 색감들과 함께 더욱 의상들을 강렬하게 보이게 했다. 아트놈의 캐릭터는 여기에 유머를 더하는 역할을 했다.
원단에 프린트 되거나 와펜(자수로 만들어져 천 등에 따로 붙일 수 있게 만든 패치)으로 만들어져 아플리케 형식으로 덧붙여졌다. 캐릭터 자체를 형상화시킨 신발과 목걸이 등의 액세서리들 또한 의상의 분위기를 크게 좌우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그런 다양한 요소들과 함께 돋보인 것은, 원단을 이용해 입체의 느낌이 강조되는 조형 실험이 이뤄졌다는 점이었다.
▲Doii(도이)의 1617FW 컬렉션 작품. 사진 = Doii(도이)
모델들이 사라진 뒤, 쇼가 진행되는 동안 객석 앞쪽에서 양탈을 쓰고 관람하던 아트놈과, 런웨이에 등장한 이도이의 합동 인사로 10분이 채 되지 않는 길이의 쇼는 마무리 됐다.
사실 디자이너는 대중의 취향을 고려해야 하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쇼는 그 어떤 때보다도 디자이너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응축돼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아트놈 “정의되고, 정의하고 싶지 않아”
패션쇼가 끝난 후, 저녁 무렵 아트놈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응암역 근처에 새로 구한 작업실이다. 이곳에 자리 잡기까지 약 다섯 번 이사를 했다. 그는 일하던 회사를 그만두고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스스로 매우 규칙적인 작업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회사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듯 오전 9시까지는 작업실이든 어디든 자신의 일을 진행할 공간으로 향하는 것이다. 항상 고뇌하고 작업의 압박감에 규칙적인 생활은 포기하고 살 거라는 예술가에 관한 일반인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다. 빌딩의 지하층 꽤 넓은 공간에 가득 들어차 작품들을 보니, 지난 시간 그의 부지런함을 눈으로 확인하는 기분이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팝 아티스트로 불리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아트놈 작가 자신을 형상화한 양의 캐릭터와, 아내를 형상화한 토끼 캐릭터로 잘 알려져 있다. 사람의 표정을 가진 강아지와 꽃들도 그가 주로 그리는 소재다. 일러스트처럼 캐릭터의 귀여움, 표정, 색감 등이 돋보이지만, 그와 차별되는 점은 한국화, 특히 민화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따뜻한 정감이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아크릴 물감을 쓰지만 얇게 여러 번 겹쳐 발라 느껴지는 물감의 깊이감도 그의 작품을 따뜻하게 보이게 하는 한 요소다. 그는 한국화를 전공했다. 작업을 할 때 일부러 반영하진 않지만, 소재 선택이나 그리는 방법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정서인 것 같기도 하다.
아트놈은 자신이 혹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말이나 철학에 의해 확정되고 정의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에게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의미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의미를 찾고 철학을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살다보니깐 그것들이 삶의 전부는 아니더라”고 답한다. “인간은 인간일 뿐, 어차피 못난 부분은 다 보이기 마련”이라며, “내 안의 이야기들을 작업으로서 다 풀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시 나를 정의하고 확정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이런 생각은 어떤 시도도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가진다. 정해진 시간 동안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자신만의 스타일 역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번 협업은 그에게도 파격인 시도였다. 패션 분야에 대해 잘 몰랐던 그는 다양한 성질을 가진 재료의 활용에서 깊은 매력을 느낀 듯 했다. 이미 ‘블랙마틴싯봉(Blackmartinesitbon)등 몇몇 패션잡화 브랜드와 협업 작업을 해봤지만, 이번처럼 계획부터 결과물까지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은 처음이란다.
▲전면의 파티션에 아트놈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다. 사진 = 아트놈
“이번 패션쇼는 ‘아트쇼’로서 하나의 퍼포먼스(행위예술) 공연이었다”는 설명과 더불어 그는 “작업의 또 다른 형식을 발견한 것 같다”며 앞으로 새롭게 작업세계를 펼쳐나갈 필드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한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경험이 앞으로 작업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고.
이도이 “쇼는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
이도이는 의류 브랜드 ‘Doii(도이)’의 대표이자, 패션 디자이너다. 그녀의 컬렉션을 보고 며칠 후, 인터뷰를 위해 그녀의 작업실 겸 쇼룸을 찾았을 때, 인사를 나누며 처음 발견한 것은 패션쇼 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미처 알아챌 수 없었던 그녀의 불룩한 배였다. 다음 달이 예정일이란다. ‘이런 몸으로 컬렉션을 준비하느라 더 힘드셨겠다’고 했더니 “사실 하고 싶은 것이 더 많았는데 임신을 해 그걸 다 못해 너무 아쉽다”는 말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처음 시도됐던 미술과 패션의 컬래버레이션인만큼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들이 오고 있어 그런 점이 매우 기쁘다”고 덧붙였다.
브랜드 Doii의 주요 타깃은 30, 40대 여성이다. 과감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채감은 한국인이 선호하는 간결하고 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개성을 중요시하는 여성들에게는 강한 ‘취향 저격’이 될 듯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패션학교인 영국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Central Saint Martins)를 졸업하고, 겐조(Kenzo)와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에서 쌓은 경력은 그녀만의 강력한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큰 일조를 했다. 하지만 이번 ‘아트쇼’에서는 아무래도 학부시절 순수미술을 전공했던 경험이 더 많은 작용을 한 듯 하다.
원래 원단에 들어가는 패턴 등은 항상 자신이 직접 그리고 디자인하지만, 이번에는 자신 스스로에게도 그리고 작업을 위해서도 자극받고 환기시킬 수 있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했다고 한다.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과 만나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는 컬래버레이션은 그런 면에서 매우 효과적이라 생각했고, 아트놈과의 작업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작업을 할수록 비슷한 성향을 많이 발견하게 돼 각자의 작업이 하나의 결과물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했다.
▲런웨이를 들어서기 전 모델들의 모습. 사진 = Doii(도이)
그녀는 쇼에서 주제를 강하게 담은 컬렉션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후에 기성복 생산에선 생활에서 입을 수 있도록 개발하고 보충해 만들어낸다. 그래서 쇼는 그녀에게 그 자체로 작업의 의미가 있다. 패션 산업계에서는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대중의 취향에 제약 받는 부분이 있다. 이도이는 “그렇기 때문에 쇼를 하는 동안에는 더욱 자유롭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디자이너의 예술적인 감성을 발표할 무대가 국내에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그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미 해외 유명 브랜드에서는 컬렉션을 보여주는 쇼을 포기하고 SNS로만 홍보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번 도이 x 아트놈의 쇼는 ‘화가’와 ‘디자이너’로 구별되지 않고 예술가로 창작 결과물을 보여주는 쇼였다. 아트놈은 “이미 예술 안에서 장르간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시장이 좁아 예술가들이 마음놓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런 사실은 이도이와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됐다. 이번 쇼는 그런 실질적인 경계가 없어진 하나의 예로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