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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브래지어-고무장갑 통해 여자가 말하는 '여성성'

'실키 네이비 스킨', '평범한 폭력', '끼다 껴지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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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1-482호 윤하나⁄ 2016.04.29 18:09:54

▲실키 네이비 스킨의 1층 전시장 벽면. (사진 = 윤하나 기자)


성별대립과 여성혐오가 사회적 문제로 끊임없이 대두되는 요즘, 상대의 성 정체성을 폄하하거나 부당한 성역할을 강요하는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다. 이른바 젠더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라 불리는, 시대에 뒤쳐진 관습에서 벗어나 성을 보다 세분화해 받아들이고, 성 평등을 이해하고 성취하려는 노력이 근래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 그리고 미술계에서 오랜 기간 비주류였던 여성 작가들은 오늘날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히 관련된 스스로의 성()을 어떻게 바라볼까? 이들이 말하는 바는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만을 지향하지도, 피해자로서의 여성도 아니다.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자기의 본래 특성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드러낸 세 가지 전시가 눈에 뛴다'여성(女性)인'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성(性)과 관련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 기울여본다.


"여성성 드러내기 주저말자"

실키 네이비 스킨(Silky Navy Skin)전

 

전시장의 지하부터 지상 2층까지 3개의 층을 메운 이들의 작업은 어느 것이 누구의 작품인지 경계를 쉽게 나눌 수 없게끔 전시됐다. 크고 작은 여러 장치들이 곳곳에 산재해서 처음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어디부터 시선을 둬야 할지 혼란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오른쪽 벽면으로 눈을 돌리자 색색의 스프레이로 스텐실(물건의 구멍들 사이로 물감 등을 넣고 그림을 찍어내는 표현 방식)한 여자 레이스속옷이 보인다. 시선을 돌려 전시장 가운데를 보니 상점의 진열대처럼 보이는 구조물 위에 여성 매장에서 자주 봄직한 크고 고급스러운 상표 그리고 알 수 없는 광고 이미지가 보인다. 레이스 속옷, 가구, 상표와 광고라는 키워드는 자연스레 여성이란 이미지로 귀결됐다.

 

지하 전시장의 모습은 보다 유희적이다. 흰색 천으로 만든 대형 마스크 팩이 흰 벽면 양쪽에 찰싹 붙어 있는가 하면, 섬처럼 불규칙하게 놓인 판자 위에 막 벗어놓은 것 같은 레이스 속옷(1층 벽면에 스텐실한 그 속옷일 듯한)이 바닥을 이룬다. 곳곳에는 금색과 구리색의 종이가 말려 있고, 또 다른 상표가 붙은 벽면엔 ‘our brass avec copper love her masks big(우리 황동과 구리는 그녀의 마스크가 커서 좋아)’라는 문장이 서툰 필치로 남았다.


▲'실키 네이비 스킨'의 지하 전시 전경. (사진 = 윤하나 기자)


각각 배경과 벽화는 신현정의, 가구 및 생활가전은 최고은의, 장식적인 소품들은 박보마의 작업이다. 작가들은 2015년 아르코 신진작가 워크숍을 통해 처음 만났다. 서로의 작업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기보다 젊은 여성 작가라는 공통점을 적극적으로 전시에 반영했다. 이들의 전시가 완벽한 하나의 유기체로 완성될 수 있었던 건 오랜 대화를 통해 얻은 강력한 유대감과 동의 덕분이다. 작가들은 전시를 기획하며 ‘(강력한 유대를 바탕으로) 서로의 작업 뒤에 숨거나 숨기기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 ‘감정적인 판단을 회피하거나 주저하지 않기등의 다짐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다짐은 여성성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기. 젊은 여성 예술가라는 공통분모 아래 이들은 자신에게 내재된 정체성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취향과 주관을 사회적 선입견에 대항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태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여성적인 것은 때로 연약해 보이는 것 또는 아름다워 보인다고 치부되는 전형적인 개념이다. 사회 그리고 미술계에서 활동해온 여성들은 오랫동안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기 위해, 혹은 여성은 약하다는 선입관에 대항하기 위해 여성적인 것에 대한 언급을 꺼려온 측면이 있다. 여성성이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현실에서 자신이 가진 여성스러운 성질을 면밀하고 솔직하게 관찰하는 일은 용기 있는 선택이 된다. 다행인 것은, 자기만족을 위해 좋아하는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여자에게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이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감정적인 판단을 회피하거나 주저하지 않기'라는 다짐 역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선입관을 일부러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이 여성으로서 현혹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솔직한 접근이 인상적이다.

 

박보마, 신현정, 최고은의 전시 실키 네이비 스킨415일부터 514일까지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린다.



▲임이혜, 'Untitled'. 종이에 펜, 14.85 × 10.5cm. 2016. (사진 = 언니모자)


성폭력 피해자 말고 가해자를 조명

'평범한 폭력'전

 

쥬나 리, 맥주, 권순영, 임이혜, 이정은 작가가 함께 참여한 전시 평범한 폭력은 성북예술창작센터 2층 갤러리 맺음에서 414~28일 열렸다. 쥬나 리와 맥주는 여성주의 시각예술공동체 언니모자라는 팀으로 함께 활동해왔다. 이번 프로젝트는 언니모자를 포함한 작가 5명이 성폭력의 실제 피해자(생존자)의 원고를 모집해 생존자가 서술한 가해자의 면모를 바탕으로 성폭력의 과정을 되짚었다.

 

이 전시는 실제 성폭력 생존자 5인의 글을 바탕으로 그 속의 가해자 10인을 구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는 과정을 담았다. 성폭력 가해자를 지옥에서 나온 이질적인 악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의 평범한 이들이라는 사실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조두순 사건'이라고 불린 사건은 피해 여아의 가명을 사건 이름에 붙여 피해자에 초점을 맞췄다는 질타를 받은 바 있다. 작가들이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시선을 돌린 까닭은, 책임을 생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부과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권순영, '아는 남자3'. 14.2 X 16cm, 한지 위에 혼합 재료. 2016. (가해자 3에 대한 피해자의 글을 바탕으로 형상화) (사진 = 언니모자)

 

작가들의 작업은 모두 생존자의 글을 바탕으로 시작됐으며, 가해자의 수만큼 작품 역시 10점이다. 가해자 10인이 벌인 폭력을 대면하고 철저히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이다.


권순영은 가해자의 평범함을 구현하기 위해 한국인 20대 남성 100명의 얼굴을 겹친 이미지 위에 몇 가지 특징을 더했다. 작가는 희미하면서 사실적인 얼굴 위에 비현실적이고 가벼운 낙서를 올려, 평범한 얼굴 뒤에 숨겨진 이중성과 공격성을 표현했다.

 

임이혜는 모집된 원고에 나타나는 가해자의 야비함과 비겁함에 주목했다. 큰 힘을 가진 것처럼 가장하는 동시에 자신을 평범의 범주에 놓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비겁자의 모습을 민첩한 드로잉으로 나타냈다. 가해자의 사회적 인격과 야비한 본성이 공존하는 모습을 이들이 망령에 붙들린 것처럼 표현했다.

 

이정은은 가해자의 외모와 성격 그리고 폭력이 행해진 당시 상황 등을 묘사한 생존자의 단어를 토대로 작업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황과 물체가 그려진 회화 작품에서 관객은 익숙한 이면의 불편한 암시를 발견하게 된다.


▲맥주, '씨앗이 많은 것과 아닌 것'. 종이에 수채, 30.5 x 40.3 cm. 2016. (가해자 1에 대한 피해자의 글을 바탕으로 형상화) (사진 = 언니모자)


맥주는 상냥했던 가해자가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점을 토대로 작업했다. ‘벌어진 것과 아닌 것’, ‘다리가 많은 것과 아닌 것등의 제목처럼, 평소의 모습으로는 가해자의 숨겨둔 촉수가 뻗는 순간을 예측할 수 없다.

 

쥬나 리는 가해자가 생존자와의 사회적 관계와 감정에 기생한다는 점에 착안해 가해자의 얼굴 위에 기생식물을 덧입혔다. 끈질기게 관계에 기생하며 생존자의 감정을 착취하는 이들의 생존 방식을 나타낸다.

 

언니모자는 전시 이후 페미니즘 동화책 시리즈를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이시하라 노리코의 영상 작업 '끼다 껴지다 hameru hamerareru'의 스틸 이미지.(사진 = 이시하라 노리코 작가)



일상 속 억압의 오브제

보이는 사물이 된 분홍색 X 고무장갑 : 끼다 껴지다 hameru hamerareru

 

작가 이시하라 노리코의 개인전 보이는 사물이 된 분홍색 X 고무장갑 : 끼다 껴지다 hameru hamerareru(하메루 하메라레루)’가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421일부터 열리고 있다. 2016 아이공 신진작가 지원전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서 이시하라 노리코는 고무장갑을 이용한 퍼포먼스 영상과 관객 참여 작업을 선보인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압력을 일상생활과 가까운 사물로 이야기한다. 이번 작업은 가정에서 주로 쓰이는 분홍색 고무장갑을 통해 관습화된 불평등한 성역할을 발견했다. ‘끼다 껴지다를 뜻하는 일본어 하메루 하메라레루’에는 여성에게 부여된 성역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과연 고무장갑은 내가 끼는 것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끼어져 있는 것일까?”

 

비디오 작업 하메루 하메라레루' 속 여자는 고무장갑을 낀 채 등장한다. 고무장갑이 답답해 벗으려고 애를 쓰다 겨우 벗어버린 여자는 신이 나서 화면 밖으로 뛰어 나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결국 더 크고 긴 고무장갑을 끼고 만다. 작가는 여자가 스스로 제자리로 돌아와 고무장갑을 꼈을 거라 속단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고무장갑이 알아서 여자의 팔에 껴진 것일 수도 있다.


▲이시하라 노리코, '끼다 껴지다 hameru hamerareru'의 설치작업. (사진 = 이시하라 노리코 작가)


이는 현실에서 우리가 주변의 기대를 완벽히 외면하고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고무장갑을 낌으로서 당장 피부를 물로부터 보호할 순 있지만, 물을 사용한 가사 일을 피하진 못하듯이 말이다. 작가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동시에 속박하는 고무장갑을 이용해 완벽히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의 억압을 표현한다.

 

건물의 지하인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에는 작가가 마련한 고무장갑이 나란히 걸려 있다. 관객이 고무장갑을 한 짝씩 들고 내려가면 전시장 입구에서 주변에서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을 고무장갑 위에 적을 수 있다. 이윽고 들어간 전시장의 바닥엔 이미 한 무더기의 고무장갑이 쌓여 있다. 이 고무장갑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착하게 말 잘 듣는 여자친구', '착한 사람(혹은 여자)'이라고 중복된 단어들이 발견된다. 순종적이거나 착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가장 많다는 증거다.


▲이시하라 노리코, '두부 #9 (tofu #9)'. (사진 = 이시하라 노리코 작가)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한 문장은 일본어로 적힌 "결혼 후 아이를 꼭 가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대한 것이었다. 가사 노동에 사용되는 고무장갑의 특성 덕에 가정에서 여성이 느끼는 억압에 대한 표현이 주를 이뤘다.

 

작가는 이전 작업에서 두부, 물 등을 활용한 퍼포먼스 형식의 사진 작업을 선보였다. 그 촉감 덕에 특히 신체와 밀접하게 반응하는 물질들을 이용해 자신과 자신에서 비롯된 보편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냈다. 이후 내밀한 개인성과 위로에서부터 출발한 작가의 작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함께 소통하는 창구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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