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윤하나 기자)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 무성한 잡초와 우물... 하지만 그보다 가장 먼저 사진 속 이질적인 검은 점이 눈에 띈다. 사진 정중앙에 자리한 검은 점, 아니 검은 구멍은 시각적으로 충격적인 동시에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두 남녀의 얼굴이 있을 곳에 자리 잡은 블랙홀은 이 사진이 어떤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돼 펀치로 구멍을 뚫은 결과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선택해 폐기하며 구멍까지 뚫는 일이 벌어졌다니 의구심이 든다.
찍고 찍히고 보는 것만이 사진 아니다?
우리가 본 모든 사진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것
가장 객관적인 매체라고 여겨지는 사진,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도 다른 시각 매체와 마찬가지로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선택된 뒤 우리에게 노출된다. 예술, 보도, 광고, 일상 등 모든 종류의 사진에는 숨겨진 (선택하는) 권력이 항상 작동한다. 기존의 사진 철학은 롤랑 바르트로부터 시작해 사진의 3가지 주체, 즉 사진을 찍는 주체와 찍히는 주체, 그리고 보는 주체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하지만 비평가 빌렘 플루서는 바르트가 한 가지 주체를 빠뜨렸다고 지적한다. 바로 '선택하는 주체'다. 사진이 공개될 때는 반드시 사진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절차가 숨어있다는 말이다.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전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다큐멘터리 사진 아카이브인 미국 농업안정국(FSA)이 폐기한 사진들을 통해 사진의 감춰진 선택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택된 사진의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배제된 역사를 들춰낸다.
FSA 사진 아카이브는 1930년대 당시 대공황 여파로 피폐해진 미국 농촌의 현실을 기록하기 위해 국가 주도로 진행된 다큐멘터리 사진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과 발맞춰 재정착국(Resettlement Administration, 이하 RA)의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1937년 미국 농업안정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이하 FSA)이 창설됐다. 당시 FSA에서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역사 부서(Historical Section)'에 경제학자 로이 스트라이커(Roy Stryker)가 책임자로 임명됐는데, 그가 이끈 역사 부서는 크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 농촌에 불어 닥친 빈곤의 실상을 기록해 이를 정부 관계자와 국민(특히 도시 거주자)에게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뉴딜의 일환인 FSA 정책 실시로 이 같은 빈곤이 어떻게 개선돼 가는가를 기록하고 홍보하는 일이다. 두 임무를 통해 루즈벨트 정부의 FSA와 뉴딜 정책이 정부 관계자와 국민의 지지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1935~1943년 총 27만 장의 사진을 촬영했다. 책임자 스트라이커는 그 중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사진 10만 여 장을 펀치로 구멍을 뚫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Killed(죽임 당한)’된 펀치 사진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됐을까?
이 전시는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1층 전시실에는 펀치된 사진 10만 여 장 중 무작위로 선정된 사진을 ‘선택과 배제’, ‘기술적 결함’ ‘사진가의 실수’ ‘너무 예술적’ ‘카메라를 의식한 시선’ 총 다섯 그룹으로 분류해 전시한다. 이 분류는 전시를 기획한 사진가이자 사진이론가인 박상우가 유추한 해당 사진들의 폐기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 FSA에 고용된 사진가 워커 에반스(Walker Evans), 도로시어 랭(Dorothea Lange), 아더 로드스타인(Arthur Rothstein), 벤 샨(Ben Shahn), 칼 마이던스(Carl Mydans), 러셀 리(Russel Lee), 시어도어 정(Theodor Jung) 등은 스트라이커가 만든 촬영 지시서를 받았다.
스크립트는 어떤 주제 혹은 장소를 촬영할 때 특별히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상세히 적은 것이다. 이를테면 ‘작은 마을’의 촬영 요령은 ‘거리에서는 마을 중심가에 대한 전체 장면을 담을 것. 이 장면이 마을 전체를 담았다는 느낌이 들도록 주의해서 촬영할 것’ 식이다. 건물을 찍을 땐 ‘주요 건물은 클로즈업 할 것. 이 클로즈업 장면에는 건물 정면 전체, 창문, 문이 포함되어야 함. a. 상점, b. 공연장...' 등으로 자세하게 지시했다(스트라이커가 모든 사진가에게 보낸 1939년 10월 11일자 지시서 중).
그런가하면 긴급 촬영 지시서를 통해 "앞으로 마을 전체보다는 한 가족을 집중적으로 촬영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AP통신 국장이 가족을 집중적으로 찍은 사진이 그가 속한 미디어에 더 유용할 것이라고 했다"고 지시하기도 했다(스트라이커가 러셀 리에게 보낸 1937년 편지 중)
반면, 지시서에 따라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에 스트라이커와 스태프가 어떤 기준으로 펀칭을 가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다. 몇 가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FSA 아카이브를 분석한 여러 전문가에 따르면, 우선 중복된 사진과 질이 떨어지는 사진, 기술적으로 흐리거나, 그림자가 졌거나, 사진에 찍힌 장면의 수평과 수직이 반듯하지 않고 기울어진 사진,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 등이 펀칭 대상이었다고 한다.
또한 스트라이커는 ‘너무 예술적(too arty)'이라고 판단된 사진에도 펀칭을 가했다. FSA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며 그가 가장 걱정했던 사항이 바로 사진가들이 '너무 예술적인' 사진을 찍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고 한다. 펀칭은 이처럼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소수가 주관적으로 자행했다.
사진이 감추던 진실, 프레임 바라보기
FSA 사진 아카이브는 2번 폐기의 위기를 맞았다. 첫 번째는 바로 스트라이커가 몇몇 사진의 필름 위에 구멍을 내서 영영 못쓰게 한 때였고, 두 번째는 전쟁정보국(Office of War Information, 나중에 CIA로 변경)이 이 사진들을 통째로 폐기하려 했을 때였다. 미국 의회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들이 나서서 폐기를 막은 덕에 오늘날 FSA 사진 아카이브는 의회 도서관의 온라인 웹사이트를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전시 기획자 박상우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하찮은 사진에 주목한 이유는 이 펀치된 사진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에 관한 모든 담론을 뒤흔들 수 있는 결정적인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며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는 실재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배제라는 행위를 통해 구축된 역사라는 것을 상기시킬 것이고,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과 사진 일반을 둘러싼 오래된 담론(객관성, 사실성, 진실성)이 얼마나 신화적이고 허구적인가를 알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영준 사진평론가는 전시와 함께 출간된 책 '다큐멘터리의 두 얼굴: FSA 사진 아카이브'(이영준·박상우 저, 갤러리 룩스-경기문화재단 후원)에서 "스트라이커가 죽이려 했던 이미지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의 숨겨진 뒷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다큐멘터리 사진들의 진실성은 대상에 진솔하게 접근하는 기록 정신에 있지 않고, 황폐화된 농촌을 기록하고 뉴딜 정책의 일부로 삼은 정부의 가공 능력에 있다"고 밝혔다. 즉, "미국 농무부는 진실된 눈을 가진 기록자가 아니라 자신의 시선에 따라 대상을 재단하는 영화감독과 같았다"는 지적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휴머니즘과 진실성을 지닌 사진으로만 인식돼 왔다면, 이번 전시는 '이 사진이 여기 보이기 위해 어떤 다른 사진이 희생됐는지', '그 희생 혹은 배제의 원칙은 무엇인지' 그리고 '사진을 선별하는 원칙의 꼭대기에는 누구 혹은 어떤 제도가 자리했는지' 등의 질문을 던진다.
이영준은 "스트라이커가 펀치낸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가공하고, 나아가 진실을 가공해내는 과정 중 이제껏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뒷면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라며 "펀치된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사진에 대항하는 중요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하는 진실이면서 누구나 감추는 진실. 바로 배제의 진실"이라고 설명했다.
배제된 대상은 기본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판단돼 보여지지 않은 것이다. 마치 스트라이커가 폐기한 행위처럼, 적극적으로 구멍을 뚫어 "이 사진은 보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함께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또다른 하나는 바로 프레임이다. 프레임을 경계로 사진 내에 속하거나 사진 밖으로 나가게 된다.
'폐기된 사진의 귀환: FSA 펀치 사진' 전은 기존의 사진 역사와 사진 철학이 이어온 오래된 담론에서 배제됐던 '선택'과 '선택하는 자'를 전면에 대두시킨다. 박상우는 "(이번 전시의) 핵심 개념인 '선택'은 사진의 본질을 건드리며 현대 사진 철학의 중심에 맞닿았다"고 말했다.
한편, 사진 이론가 박상우, 이영준, 박평종 등이 참여하는 심포지움 '이미지 파괴와 새로운 사진 이론'이 5월 13일 금요일 2시부터 갤러리 룩스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