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호 김금영 기자⁄ 2016.05.12 18:16:00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똑딱똑딱”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현재 지나가는 일분 일초에 온 신경이 쏠려 있기 일쑤다. 제시간에 등교 및 출근해야 하고, 시간 안에 맞게 시험 문제를 풀고 일을 마감해야 하며, 늦지 않게 약속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데 구본아 작가가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좀 다르다. 매 순간 지나가는 초보다는 긴 시간의 집적에 관심을 둔다. 한 예로 어제 막 완공된 깨끗한 신축 건물보다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부식되고, 빛도 바랜 건물 바라보기를 즐긴다. 실제로 폐허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한다. 어떤 매력이 작가를 이런 곳으로 이끌었을까?
“새로 생긴 신축 건물도 좋지만 저는 주로 유적지나 폐허 찾아가기를 더 좋아해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 쌓인 것을 느낄 수 있거든요. 특히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시간, 그 교차점에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유적지 또는 폐허에는 과거의 시간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있어요. 또 이젠 그곳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구경하죠. 그리고 이 시간은 미래까지 자연스럽게 또 연결되겠죠?”
작가는 이 시간을 ‘미완’과 ‘붕괴’의 중간 지점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폐허 자체의 이미지는 붕괴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건축으로서의 기능을 다했기 때문. 하지만 현재도 그 공간을 지나다니는 인간, 곤충, 새 등 생명들의 존재로 인해 폐허는 존재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 공간들을 시간의 흐름이 끝나버린 곳이 아니라,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곳, 미래에도 계속 변화를 거쳐 갈 공간으로 인식한다. 언젠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붕괴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 시간을 쌓아나가는 것이다.
또 시간이 집적된 장소에서 작가가 느낀 경외감이 있다. 바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공과의 접점이다. 작가 작업의 주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국의 한 유적지에 갔을 때 처음엔 건물들에만 눈길이 갔다. 그런데 발아래를 잘 살펴보니 부서진 건물 벽 아래 틈 사이 아주 좁은 공간에 작은 풀 한 포기가 자리를 잡고 하늘의 태양을 향해 힘차게 고개를 올리고 있었다. 또 그 위로는 형형색색의 나비 떼가 지나갔다. 거의 회색빛 단조로운 유적지 사이로 나타난 청량한 푸른빛의 풀 한 포기와 아름다운 나비 떼. 작가에겐 이 풍경이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고.
인공물이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 자연화 되는 과정에 경외감
“인간이 과거에 생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건축물. 오랜 시간이 흘러 그곳에 살던 인간은 사라지고 인공의 건축물만 남았죠. 현재는 나비, 풀, 바람, 비, 햇살 등 자연이 그곳의 주인이 됐어요. 저는 그 풍경을 보고 자연과 인공과의 조화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건축으로서의 기능을 다한 곳에서 현재진행형의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 것도 자연 덕분이었죠. 시간의 흐름은 무시할 수 없는 경외감을 줘요. 연세가 많은 분들에게 느끼는 경외감도 그분들이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쌓인 지혜에서 비롯되듯 남겨진 돌, 무너진 벽에 생명의 힘을 긴 시간 계속해서 불어넣는 자연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자연과 문명은 대립되는 개념으로 많이 이야기돼요. 하지만 저는 자연화 돼가는 낡은 건조물 속에서 이 두 개념의 조화를 느꼈어요.”
이 경외감이 ‘자연의 이빨’ ‘시간의 이빨’ ‘태엽 감는 새’ ‘폐허산수’ 등에 담겼다. ‘자연의 이빨’과 ‘시간의 이빨’ 화면을 보면 다소 단조로워 보이는 색상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배경 속에 보랏빛,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날개를 가진 나비들이 날아다닌다. 특히 ‘시간의 이빨’에서는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태엽이 보여 눈길을 끈다.
“음식을 먹을 때 천천히 이빨로 씹어서 먹으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날것이라도 이빨로 천천히 씹으면서 잘게 부수는 과정을 거치죠. 저는 이 과정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인공 건축물의 풍화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어요. 천천히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본래의 형태에서 점점 다른 형태로 변화를 거치죠. 그래서 ‘자연의 이빨’ ‘시간의 이빨’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인공물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의 모습은 자연과 문명의 화해, 그리고 조화를 이야기하죠.”
‘태엽 감는 새’는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시계의 톱니바퀴 위에 한가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새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인다. 긴 시간의 집적을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태엽이 감겨져 움직이는 장난감 새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찾는 여로를 보여줬어요. 개인의 이야기는 거대한 자연의 이야기 속 아주 작은 태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태엽은 각자 스스로 돌려야 시간이 돌아가죠. 시간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작업이었어요. 능동적인 시간 속 조화를 이루는 자연과 인공 이야기도 하고 싶었죠. 태엽(胎葉)은 한자로 ‘이파리를 잉태하다’예요. 인공물로 인식되는 태엽이 실제 뜻에는 자연을 품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어요.”
자연에 대한 관심은 작업 초창기 때부터 이어져 왔다. 첫 작업 때 자연이 순환하며 소멸과 생성을 계속 반복하는 모습을 ‘해바라기’ 시리즈에 담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작가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사람이 있었고, 인공의 결과물이 있었으며, 자연도 함께 자리했다. 자신의 삶과 시간의 흐름을 함께 해온 그 이야기들을 작업으로 풀게 된 건 어찌 보면 작가가 말하는 자연의 순환 과정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설치-그림-영상 등 다양한 매체 통해 동양화 연구
첫 작업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한 작가는 설치, 그림,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해 왔다. 수묵, 전통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는 색다를 수 있는 방식이다. 수묵 작업을 꾸준히 하던 작가는 질감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고 한다. 수묵은 바로 종이에 스며드는 특성이 있어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지만, 유화 물성이 주는 질감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기존 수묵의 토대를 놓지 않으면서, 여기에 한지를 한 장씩 잘라서 콜라주 하는 방식을 연구해 선보였다.
“제 작업에도 시간의 집적이 들어가 있어요. 한지 한 장을 자르고 또 자른 뒤 이를 붙이고 또 붙이면서 하나의 큰 바탕을 만들었죠. 그렇게 완성된 바탕은 겹침의 효과로 인해 새로운 질감 효과를 보였어요. 제가 작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한국화, 게다가 수묵 작업은 수요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좋아하는 작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꾸준히 어떤 방식으로 수묵화를 선보이면 좋을지 재료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화선지에 먹이 스며드는 시간, 완성된 수묵화에 영상 프로그램을 활용해 액션감을 주는 등 아직도 연구 중이에요.”
작가의 작업은 특히 중국 컬렉터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현재 상하이, 대만에 전속 갤러리가 있고, 12월엔 중국 쑤저우 진지호 뮤지엄(Suzhou Jinji Lake Museum)에서 열리는 ‘한중일 청년작가전’에 참여한다. 몇 년 전 중국 정부가 대규모로 프로모션 하는 북경청년아트노바에 참여해 전시를 하게 되면서 해외 컬렉터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년 동안 베이징뿐 아니라 홍콩에서도 장기적으로 전시를 갖는 등 중화권에서 활발한 활동을 가졌다. 영국과 독일에서도 개인전을 가졌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다. 가나아트센터에서 5월 말 열리는 ‘알마마타’전에 참여한다. ‘관계’를 주제로 한 그룹전으로, 작가는 이 전시에서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풀어낼 예정이다. “신작을 선보이기 위해 한창 작업 중”이라고 인터뷰 당시 밝히기도 했다. 이어 “해외에서의 전시는 좋은 경험이었어요. 현지 컬렉터들이 동양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수요도 많았습니다. 국내에서의 전시도 열심히 이어가고 싶어요. 장소에 상관없이 제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해야죠”라며 포부를 보였다.
“자연과 문명, 그리고 시간에 관한 커다란 주제는 계속해서 이어갈 것 같아요. 이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더 확대될지, 아니면 세부적으로 좁게 들어갈지는 아직 저도 모르겠어요. 딱 ‘이 길로만 가자’ 식으로 틀을 미리 한정짓고 싶지 않거든요. 최근에는 ‘유민의 땅’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환경오염, 전쟁으로 황폐화 된 공간에 관심이 갔어요. 문명 발달에서 오는 폐해 이야기였죠. 이 가운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갔습니다. 어떤 작업으로 풀어내질지는 앞으로 지켜봐야겠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 주제를 풀어갈지 저 역시 궁금해요. 그저 열심히 제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는 데 몰두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