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호 김연수⁄ 2016.05.13 17:57:02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는 최신 철학사상으로 유행을 주도한 예술가가 있는 한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껴안고 발언하길 꺼리지 않던 예술가도 있었다. 이와 함께, 정치‧문화적으로 극변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주장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표현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의 모습은 한국사가 걸어온 만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 ‘민중 미술’이라 불렸던 미술은 단순히 한 시대의 사조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예술가가 낸 생각이자 목소리라는 점에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회에 대한 예술가들의 목소리는 항상 있어왔다
5월 10일~7월 6일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사회 속 미술 - 행복한 나라’는 작년까지 지속된 단색화 열풍의 대안으로서 한국 미술계가 주목하는 ‘민중미술’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예술가의 모습을 조명한다.
“이번 기획에서 ‘민중미술’이라는 용어 사용이 고민됐다”는 기혜경 운영부장의 말과,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이 찾는 북서울관에 전시를 마련한 시립미술관의 행보는, 예술가의 사회적 발언이 사실은 평범한 일상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회 문제에 기반을 두고 작업하는 작가 53팀으로 이뤄진 이번 기획전은 어두운 사회 이면과 모순된 현실에 대해 회화, 영상, 사진, 영상, 설치 등 다양한 형태로 고민하고 표현한 작품들을 모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엇보다 어두운 주제의 작품들을 무겁고 어렵지 않게 제시하려는 기획 의도가 많이 엿보인다. 부정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국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는 예술가들의 열망을 표현한 ‘행복한 나라’라는 전시 제목을 비롯해, 작품을 연대기로 나열한 게 아니라, 과거 시대의 주제를 다룬 작가와 현시대의 문제를 다루는 작가의 연결고리를 찾아 한 자리에 배치해 세대를 관통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발견하도록 한 점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전시 기획을 담당한 큐레이터 신은진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제일 놀랍고도 재미있던 부분은 다른 세대의 작업이 각기 다른 사회적 문제에서 출발했으면서도 그 이슈들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방법에 닮은 점이 많아서, 작품만 보면 어느 연배의 작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는 점”이라며,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반복되는 역사에 깊은 기시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더불어, “이런 현실참여형의 미술이 특정 사조나 미술운동의 하나로서 과거형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활발하게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른 세대의 작품을 통해 발견하는 역사의 반복
전시는 세 구역(1, 2, 3부)으로 나뉘어 개최된다. 1부 ‘역사는 반복된다’와 2부 ‘이면의 도시’가 전시되는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함경아의 거대한 목조 작업 ‘오데사의 계단’이 맞이한다. 전두환 군부정권이 끝나도 또 등장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저를 해체할 때 나온 폐자재로 만든 작품이다. ‘오데사의 계단’은 1905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2000여 명의 양민이 군주의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다.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전시는 예전 시대와 현 시대의 작업을 두, 세개씩 짝지어 선보인다. 작가가 직접 역사 속 인물이 돼 연출 사진의 형식으로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조습과 송상희의 작업은, 시대가 다름에도 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과 표현이 닮아있다.
도시와, 도시 밖의 풍경을 통해 급속한 도시화의 이면을 보여주는 김정헌-최진욱의 작품과 노순택-홍진훤의 기록 사진 형식의 작품도 있다. 특히 노순택과 홍진훤은 세대가 다름에도 서로 비슷한 지점을 바라보며 작업해오다가 결국 용산에서 만났다. 현재 세월호와 관련된 기록 작업을 따로 또 같이 진행하는 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용산 참사와 관련한 기록물을 선보인다.
홍성담의 ‘욕조 - 어머니 고향에 푸른 바다가 보여요’는 묶인 채 욕조 안으로 머리를 넣어 물고문을 당하는 남자가 보는 푸른 바닷속 이미지를 보여준다. 태연하게 붙인 제목에 가슴이 더욱 저리다.
미디어 영상 설치 작업으로 선보이는 2000년대 초반의 ‘플라잉 시티’의 왕십리 재개발 지역에서의 ‘푸닥거리’ 퍼포먼스, 그리고 2016년 현재 진행 중인 옥바라지 골목 재개발을 배경으로 하는 ‘리슨 투 더 시티’의 작업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현장을 발로 뛰는 작가들의 작품 많아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최열의 아카이브 작업이다. 80년대 사람들 가운데 있었기에 민중미술이라 붙렸던 미술 작품들 중의 꽃은 단연 민주화시위 중 쓰인 걸개그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사용됐던 걸개그림, 깃발, 판화 작업 등은 전해지지 않는 상태다. 평론가이자 미술 사학자인 최열은 본인이 활동가로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당시의 기록들을 아카이브로 보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그 기록물들이 소개된다.
미술관 측은 “현재까지 소개된 민중미술 관련 전시들이 당시 흐름을 이끌었던 동인 ‘현실과 발언’ 위주의 개념적인 작업들 위주였다면, 이번 전시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시각적인 증거들을 보이려 노력했다”고 전했다.
2층에 마련된 3부 전시 ‘행복의 나라로’는 어떠한 개요로도 묶을 수 없고, 80년대의 예술적 태도가 매체의 다변화와 더불어 여러 방식으로 확장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한 캐릭터 하는 작가들만 모아놨다”는 신 큐레이터의 말처럼 그 어떤 것보다 작가의 개성이 돋보이는 매체와 소재로써 사회를 투사하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배영환은 캔버스 위에 점자 같은 이미지를 표현했다. 자세히 보면 글자를 만들어 낸 것은 치료용 약솜이고 캔버스 위에 쓰인 글자는 광주민주항쟁의 상징곡인 ‘5월의 노래’다. Sasa[44]는 대중가수 조용필의 변모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보여준다. 다양한 조용필의 모습 액자는 그의 키에 맞춰 설치돼 있다고.
중요한 것은 현시대를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각
한편, 최원준 작가는 이번 전시에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2005년 발견된 여의도 벙커의 모습을 최근의 영상으로 다시 담아 선보였다. 최 작가는 민중미술 1세대와 함께 작업에 서게 된 소감이 어땠냐는 질문에 “물론 영광이지만, 사실 우리 세대가 1세대 선배들에게 받은 영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박찬경의 '포럼A'나 ‘대안공간 풀’을 위주로 한 386세대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내가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로 불리고 있다는 걸 안 시점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가로서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기혜경 운영부장은 “(민중미술이) 70년대 모더니즘이 극치를 이뤘을 때의 도전으로 나왔든, 추상화에서 구상화의 변화로 읽히든 간에, 잘나 것도 못난 것도 우리의 역사 아니겠냐”며, “현재의 한국 미술계가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다양성을 받아들이려는 자세에 있다. 그래서 미래 미술계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