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호 윤하나⁄ 2016.05.20 08:45:34
“누가 그린 건가? 사진이여? 얼매유(얼마요)?”
"여인숙이라니, 익숙허지가 않아서... 근데 그림이 있네?"
여느 갤러리보다 사람들이 더 쉬이 드나드는 이 여인숙에 발걸음이 붙들려 들어선 한 노신사가 물었다. 들어선 그가 지목한 건 한 점의 사진이다. 여인숙이란 간판을 보고 들어서길 망설였던 이 노신사의 눈을 사로잡은 작품은 김영경 작가의 사진이었다. 그는 군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한두 해 전 귀향했다. 산책 길에 발견한 이 여인숙 간판이 "요상해" 들어섰다고 한다.
군산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이하 여인숙)은 군산 내항에서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 동국사를 향해 가는 일직선 길에 위치한다. 이 지리적 위치 덕에 평소에는 동네 주민, 주말에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북적인다.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의 전신은 ‘삼봉여인숙’이다 군산과 장항, 전주, 익산 등을 오가던 학생 및 뱃사람들이 '달방'(숙박업소에 달마다 숙박비를 지불하는 형태)으로 머물던 곳. 2010년 여인숙에 작가들을 불러모으기 전까지 월명동-금광동 일대는 후미진 원도심 모습 그대로였다. 군산은 적산가옥(敵産家屋: 일본인이 패전 이후 남기고 간 집)이 많아 유명했지만, 일제강점기 잔재라 여겨진 탓에 문화유산으로 활용된 기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동국사 가는 길' 프로젝트는, 군산시의 정체성이 어린 장소에서 문화공동체 감의 기획과 제안 아래 시작됐다. 문화공동체 감은 여인숙을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해 방치된 역사적 공간을 주변환경과 어우러지게 했다. 이후 군산시가 문화관광사업을 기획해 근대역사체험공간, 근대역사박물관 등을 오픈하면서 이 지역의 관광 활성화가 이뤄졌다. 동국사 가는 길 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사)한국건축가협회가 주관한 ‘2012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갤러리가 된 여인숙
나그네의 집, 여인숙(旅人宿)이 이제 이웃과 더불어 무르익는 공간(與隣熟: 더불어-이웃-익다)이 됐다. 이 건물은 1960년에 지어져 오랫동안 간장공장으로 쓰이다 해방 뒤 2007년까지 여인숙으로 운영됐다. 2007년부터 군산을 거점으로 예술 활동을 이어온 비영리 문화공동체 감의 이상훈 대표와 서진옥 큐레이터가 2010년 창작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이상훈 대표는 독일 체류 뒤 2006년 돌아온 군산에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복동에 작업실을 내고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여인숙의 운영 전반을 담당하는 서진옥 큐레이터는 2002년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이 사건을 계기로 2004년 3월 성매매방지법 제정)로 희생된 여성 14인을 추모하는 ‘꽃순이를 아시나요’ 프로젝트에참여하면서 군산과 인연을 맺었다.
문화공동체 감은 군산의 대표적 성매매업소 밀집지역이던 개복동을 치유하기 위해 2010년 개복동의 목욕탕에 ‘신예욕탕 레지던시’를 시작했다. 이어 그해 겨울 공간을 목욕탕에서 여인숙으로 옮겼다. 예술가와 주민 사이의 소통을 중시하며 공간을 꾸린 지난 6년 간 사려깊은 기획으로 신뢰를 쌓았다.
지역향토해설가와 함께 군산을 읽고
원도심 파고들며 예술적 재생과 창조적 기록 남겨
현재 여인숙의 1층은 과거의 쪽방들을 터서 갤러리로 활용하고, 2층은 작가들의 레지던스 공간이다. 지난 4월 공모로 선정된 장기 작가 백정기, 박정경, 김선미 3인이 입주 중이다. 또한 3개월 단기 입주 작가 팀도 두 팀 있다.
여인숙과 가까운 입주작가 작업실은 모두 2곳이다. 원도심 건물의 빈 공간을 저렴하게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장기입주 작가의 작업실은 개별 작업 공간으로 방이 나뉜다. 장·단기 입주 작가들은 군산이란 지역에 흥미를 갖고 지원한다. 그래서 레지던시 기간 중 군산의 문화-역사를 관찰하는 시간이 주어진다. 이때 각 작가들은 지역향토해설가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지역 읽기'에 들어간다.
여인숙을 방문한 날 작업실에서 작업 중인 박정경 작가를 만났다. 습한 항구도시의 날씨와 달리 작업실 안은 정갈하면서도 산뜻했다. 박 작가는 군산의 향토문화와 지역 특성이 담긴 책들을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작가는 이전에 전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전주 원도심에 대한 연구를 회화로 표현했으며, 전주와 가깝지만 또 다른 이야기를 지닌 군산 원도심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작업실 내부에는 원도심의 사진과 스케치들이 곳곳에 붙어 있다. 작가는 일주일에 한번 이상 지역향토해설가와 함께 관심 지역을 방문해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듣는다. 해설가들의 방대한 지식과 열정은 늘 감탄스럽단다. 장기 입주작가들은 석달 가량 지역읽기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6월 24일부터 여인숙 1층 갤러리에서 '군산 민낯' 전시로 공개할 예정이다.
여인숙은 2012~2013년 군산대 미술학과 예비작가들과 인큐베이팅 교육 프로그램 '멘토&멘티'를 진행했다. 현장을 직접 접하고 함께 전시도 열었다. 또한 올 5월부터는 매달 마지막 화요일에 문화 토크콘서트 '문화+여인숙'을 총 5회 진행한다. 김준기 선생, 고암 이응노 기념관의 윤후영 학예사, 월간미술 이준희 편집장 등이 강연할 예정이다.
'동종업계' 전 - “작가가 살아야 여인숙도 산다"
현재 진행 중인 '동종업계'전은 지금까지 여인숙 레지던시를 거쳐온 '여인숙 공동체' 30대 작가들의 작업을 모았다. 예술 판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참여 작가는 김상덕, 김영경, 김용현, 김종희, 변혀수, 서용인, 신제현, 안명호, 오종원, 윤선화, 이정화 , 조인한, 최은경 13명이다. 무심코 여인숙 갤러리에 들어선 노신사는 김영경 작가의 사진을 통해 서울과 군산이 공유한 시대성을 발견했다. "여기가 군산이여?"라고 묻는 그에게 "아니, 서울이요"란 답이 주어지자 그는 "희안하네, 내가 살던 동네 같고 그란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끌린 건 서울 북촌마을의 한 골목 사진이다. 시대성과 역사성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김영경 작가는 군산에서 2년여 동안 신흥동, 선향동, 개복동, 창성동 일대를 누비며 사라지는 도시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신제현 작가는 2014년 TV 미술작가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트스타 코리아'에 출연해 2011년 군산에서 작업한 '군산 싸운드'를 선보인 바 있다. 군산 원도심에서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건물 20여 곳을 돌며 조금씩 모은 조각으로 가야금을 만들어 군산 지역을 돌면서 아리랑을 연주한 뮤직비디오였다. 이번 '동종업계' 전시에는 여러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퍼포먼스한 영상을 선보인다.
김상덕 작가는 2014년 여인숙에 입주했고, 군산에서 발견한 우물과 그곳에 빠진 아이,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작업 중이다. 그의 회화 작업은 구체적인 서사를 보이진 않지만 강렬한 장면을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다.
2015년 입주한 안명호 작가는 군산에 체류한 7개월 동안 철거를 앞두던 군산 소룡동의 피난민촌에서 작업했다. 그곳에서 맞닥뜨린 물건들, 특히 그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16비트 게임기와 조우하는 등 경험과 맞닿는 물건들을 수집했다. 철거촌에 버려진 찜질매트의 회로기판을 사용하거나, '황해전파사'란 가게에서 철거 전까지 머물면서 인간의 감정과 전자매체의 만남을 실험했다.
이밖에도 2015년 입주한 김종희 작가 등 많은 여인숙 출신 작가들이 활동 중이다.
'작가 vs 작가' 동종업계 전시 이전에는 '지역 vs 지역' 교류프로그램을 통해 스페이스 빔(인천), 쿤스트 독(서울), 아트 스페이스 휴(파주) 등 타 지역 비영리공간과 교류·전시한 바 있다. 지역과 지역 간의 교류, 작가와 지역 간의 이해, 작가와 공간 간의 소통 등 관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이번 전시는 5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