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호 김금영 기자⁄ 2016.05.18 15:15:32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언뜻 보인 자료 이미지를 봤을 땐 ‘책장에 평범한 책이 꽂혀 있구나’ 싶었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전시장에 들어서서 이미지로 본 책장 가까이로 직접 다가가니 이게 단순한 책이 아니라 회화 작품임을 발견했다. 이경 작가와 서수한밴드의 컬래버레이션 작업이 5월 27일까지 펼쳐지는 에이루트 아트플랫폼 현장을 방문했다.
전시장에는 개념미술작업으로 알려진 이경 작가의 색채 작업, 그리고 컬래버레이션 작업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1층 전시장은 이경 X 서수한 밴드의 협업 작품, 그리고 7층 라운지는 이경 작가의 스트라이프 작업과 ‘형용사로서의 색채’ 작품들을 위주로 구성됐다. 먼저 이경 작가의 작업을 살펴봤다.
이경은 ‘형용사로서의 색채’와 색띠로 이뤄진 풍경을 선보여 왔다. 각 형용사에 해당하는 고유의 색을 만들어서 캔버스를 칠하고, 그 형용사가 화면에 은은히 보이도록 구성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적인 콘셉트로 꼽힌 형용사 그리고 색깔은 ‘여유로운’과 ‘소중한’이다.
‘여유로운’은 다가오는 초여름을 연상케 하는 연둣빛, ‘소중한’은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는 듯한 따뜻함이 느껴지는 노란빛 계열의 색을 띠고 있다.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에게 바쁜 일상을 잊고 잠시나마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당신은 작품을 보러 온 ‘소중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경은 이 두 색을 2014년 작업에서 선보인 적 있는데, 이번 전시를 위해 다시 그 색을 만들었다. 그냥 나와 있는 색을 쓰는 게 아니라, 수십 번의 조합의 과정을 거쳐 다시금 ‘여유로운’ ‘소중한’ 색을 재현했다. 이경은 “색이 무척 중요한 작업이라 색의 재현에 유독 신경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 두 형용사, 색을 중심으로 색을 통해 감정을 보여주는 작업이 전시됐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주목되는 부분이 서수한밴드와의 협업이다. 프로젝트그룹 서수한밴드는 2014년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의 전시에서 캔버스에 주목한 작업으로 눈길을 끈 바 있다. 흔히들 캔버스를 그림이 그려지는 평면이라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수한밴드는 평면이 아닌, 두께를 지닌 분명한 입체로서의 캔버스에 접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캔버스를 벽에 걸지 않고 책장을 만들어 책처럼 진열하는 등 평면이라고 인식되는 어떤 대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번 협업 과정을 진행시킨 이승환 위드윈홀딩스 미술사업본부장은 “이경 작가의 작업은 굉장히 개념적이면서도 평면적이고, 반면 서수한밴드의 작업은 회화를 평면보다는 입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특징이 있다. 언뜻 상반돼 보이는 두 작가가 선보일 호흡이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됐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평면 캔버스를 입체 작품으로,
작품 속에 관람객 끌어들이는 시도
컬래버레이션 제의에 이경 작가는 “처음엔 매우 걱정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서로 추구해온 작업 방식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에, 잘못하면 오히려 흐트러지거나 충돌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들었다. 이번이 첫 협업이라 더 걱정이 된 것 같다”며 “하지만 제안을 받고 기쁜 마음도 있었다. 그동안 철저히 개인적인, 폐쇄적인 작업을 해왔던 찰나에 서수한밴드의 작업에 관해 들으면서 내 머리 속에도 새로운 이미지가 떠올랐다. 모든 과정을 디테일하게 체크하며 섬세하게 작업을 진행했는데 매우 즐거웠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수한밴드 또한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감히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바). 이경 작가가 선뜻 프로젝트에 응했을 때 든 생각이다. 서수한밴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작가와 협업’의 첫 단추를 이경 작가와 함께 끼운 것이 기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컬래버레이션 작업은 크게 ‘화가의 서가’와 ‘쓸모있는 회화2’로 꾸려졌다. 먼저 ‘화가의 서가’는 앞서 언급한 책장에 책이 꽂힌 듯한 이미지다. 서수한밴드는 기존 작업에서 캔버스를 책처럼 진열했는데, 이번 협업에 진열된 건 언뜻 멀리서 보면 책처럼 보이는 이경 작가의 평면 회화다. 1호, 2호, 3호 ‘고귀한’ ‘가벼운’ ‘화사한’ ‘우울한’ ‘엄숙한’ ‘당당한’ ‘친한’ ‘모호한’까지 다양한 형용사가 적혔다. 각 형용사는 작가가 만든 고유의 색도 갖췄다.
이경 작가는 “글씨 크기도 어떤 건 작게 하고, 어떤 건 여백을 많이 두고 크게 하는 등 차이를 뒀다. 협업 작업에 쓰일 형용사는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감정들을 중심으로 선별 과정을 거쳤다”고 말했다. 이승환 본부장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책을 꽂아 두는 책장은 흔히 있지만 작품을 설치하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 가운데 이번 협업은 책장 안에 들어가는 작품 형태로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작업은 제목과 같이 화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할지, 화가의 머릿속 서가에 접근하는 시도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책장 주위로는 벽에 못이 박혀 있다. 그래서 책 모양의 작품을 책장에 꽂기도, 꺼내서 자유롭게 벽에 걸 수도 있다. 작품은 벽에 전시됐을 때, 그리고 책장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각각의 특별한 느낌을 전해준다. 벽에 걸리는 경우 마치 웃는 입 모양으로 못이 박혀 작품이 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다른 벽면엔 또 다른 컬래버레이션 작업인 ‘쓸모 있는 회화2’가 자리한다. 거울이 내장된 30호 캔버스로 구성된 작품이다. 기존 이경 작가가 색으로 감정의 세밀한 표현을 전한 ‘파라다이스’ 시리즈 그리고 서수한밴드가 캔버스 쓰임새에 대해 첫 탐구를 펼친 ‘쓸모 있는 회화’가 만났다. ‘파라다이스’ 시리즈는 한 형용사뿐 아니라 다양한 형용사가 한 캔버스에 들어가서 점차 색이 아래로 갈수록 변하는 과정을 보여줬다. 그리고 ‘쓸모 있는 회화’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연결 시켜 쓰임새 있는 의자 형태로 바꿔 전시했다.
이 두 작업이 만나 탄생한 ‘쓸모 있는 회화2’는 이경 작가의 화면에 거울이 들어간 형태를 보인다. 본래 100호 이상의 대형 작업이었던 것을 협업을 위해 작은 크기로 새롭게 만들었다. 작품으로 전시장에 걸렸지만, 거울로써의 기능도 한다. 또 관람객들은 작품을 보는 동시에 작품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모습도 관람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경 작가는 “이 작업은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상상하는 파라다이스 시리즈의 개념이 거울이 갖는 현실의 직설적인 반영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 작업엔 밝고 여린 분홍색을 띠는 ‘설레는’과 짙은 회청색의 ‘두려운’이 들어갔는데, 이는 거울 앞에 선 사람의 심리를 반영하기도 한다”고 작업을 설명했다. 이승환 본부장은 “두 작가의 협업이 개념적인 이야기를 위트 있게 풀어낸 결과물로 나온 것 같아 흥미롭고 또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한편 이경 작가는 작품들과 함께 에디션 작업도 이번에 선보인다. 이번 전시의 주요 콘셉트인 ‘소중한’과 ‘여유로운’을 500개 한정판 노트로 제작했다. 스웨이드 질감의 노트 표지에 이경 작가가 하나하나 붓질을 하며 색을 칠했고, 뒤표지에는 에디션 넘버를 적었다. 그리고 판권에는 도장까지 찍어 단순한 노트가 아닌 각각이 하나의 에디션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경 작가는 “이틀에 걸쳐 노트에 하나하나 붓질을 하며 에디션을 완성했다. 한 번 붓질로 끝나는 게 아니라 5~7번 붓질을 해야 하기에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색 또한 균일하게 맞추기 위해 신경 썼다”고 말했다. 이승환 본부장은 “단순히 아트상품으로서의 개념에서 접근하지 않고, 이 또한 에디션 작품으로서 관람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 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제작은 에이루트의 에디션 브랜드인 에디션(eddysean)이 담당했고, 판매는 가로수길 챕터원과 프린트베이커리의 삼청점, 그리고 논현동 에이루트 아트플랫폼에서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