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학(Science of Design)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낯설다. 우리는 디자인을 단순히 포장하고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란 걸 알게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았다. 하물며 디자인을 학문으로, 또 철학으로 연구한다는 말이 어찌 보면 쉽게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무인양품 MUJI'의 깔끔한 디자인을 시작으로 간결하고 명상적인 일본의 디자인을 떠올려보자. 미니멀한 무인양품의 브랜딩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인 아트디렉터 하라 켄야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무인양품의 벽걸이 CD플레이어를 만든 후카사와 나오토의 디자인은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까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일본의 대표 디자인이다.
이들 디자인의 핵심은 일본의 디자인 철학이다. 많은 후학을 직접 가르치거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디자인 이론가 무카이 슈타로가 현재 일본 디자인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일본 디자인 이론계의 시초이자 거장인 그의 전시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두성종이 인더페이퍼 갤러리에서 5월 16일~6월 30일 열린다.
고요한 우주의 책, 무카이 슈타로의 디자인 이론
‘세계 프로세스로서의 제스처’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보고 있나? 나사(NASA)가 배포한 닿을 수 없는 먼 공간의 사진, 또는 헐리웃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감 넘치지만 가짜인 영상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대리체험과 상상을 충족시켜 주지만, 우리가 이렇게 우주의 스펙터클함에 들뜨기 이전에 인류가 생각했던 우주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우주는 '여기 아닌 먼 곳'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를 뜻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인간의 신체를 소우주(미크로코스모스)로, 대자연을 대우주(마크로코스코스)로 바라봤다. 무카이가 이룩한 디자인 이론의 바탕에는 인간과 우주 속에서 발견한 '형태학(morphology)적인 사고'가 담겨 있다.
인더페이퍼 갤러리의 전시장에 들어선 순간, 오랜만에 숨을 깊이 들이마셔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날것 그대로의 무질서한 자유로움이 주는 매력은 없지만, 엄격하게 완결한 형태를 이룬 전시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견고한 직사각형 구조는 난공불락의 움직이는 성처럼 중력 없는 완전한 세계를 보여준다. 30개의 종이 패널이 가볍게 공중에 매달린 채 파사주(passage, 통로) 공간을 만든다. 파사주 아래 하얀 바닥엔 수십 개의 조명이 만들어낸 소란스럽지 않은 그림자가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공간을 비추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공중에 정밀하게 자리한 책의 우주는 무카이의 디자인 철학을 여실히 표현한다.
‘세계 프로세스로서의 제스처’ 전시는 무카이가 2000년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의 일환으로 본(Bonn)에서 연 ‘오늘은 내일 - 경험과 구성의 미래’에 출품했던 전시다. 무카이가 수집해온 동서고금의 도상과 이미지를 글과 함께 주제별로 분류했다. 전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으로, 책에 빗댄 우주적 공간이다. 한 장, 한 장의 패널은 책의 펼친 면과 같다.
직사각형의 좁은 면에 해당하는 파사주 양쪽 입구의 좌우 패널 2개는, 바깥 면엔 테마의 해설이, 안쪽 면엔 거울이 있다. 따라서 거울면이 공간 내부를 마주보며 서로를 비추기 때문에 이 길쭉한 공간의 앞과 뒤는 무한히 공명한다. 앞과 뒤를 뜻하는 전(前)의 이중적 의미처럼, 공간의 공명은 우주를 순환하는 리듬으로 느껴진다. 이를 느끼기 위해 전시장에 마련된 덧신을 신고 공간 내부로 들어서면, 우주를 이룬 책 속에서 정보에 둘러싸이는 기분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파사주의 입구에 서면 좌우는 각각 우주의 생태와 인간의 생태를 나타내는 제스처로 구분된다. 무카이의 정의에 따르면, 제스처란 '형태'가 탄생되는 일종의 몸짓이자 파동이다. 그는 제스처란 말을 통해 우주와 생명의 생성 리듬을 이해하고, 새 생명의 탄생과 미메시스(재현 혹은 모방)으로서의 생명 재생 처리과정을 응축해 표현한다.
무카이는 인간(소우주)과 대자연(대우주)의 형태적 패턴을 각각 12가지 제스처로 파악한다. 그리고 소우주와 대우주가 서로 보여주는 탄생과 재생의 몸짓(제스처)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이론적 토대를 표현한다. 대우주의 형태적 모방과 인간의 창조성(손)이 만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며, 이는 곧 우주(세계)를 재생하는 방식이 된다는 뜻이다. 이 전시는 무카이의 형태론적 세계관이 가장 잘 표현된 입체적 공간으로, 그것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한쪽 '세계를 생성하는 원상으로서의 제스처'의 각 패널엔 차례로 '1 태양 잔상, 2 미미크리(의태) - 눈 모양 무늬, 3 미메시스(마이너스 의태), 4 양의상(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가 함께 있는 모습), 5 나선-전의상, 6 대기-다의상 …(중략)… 12 원상과 메타모르포제' 등 대우주의 생태가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반대편 패널엔 ‘미크로코스코스 - ‘손’의 세계를 생성하는 제스처'란 주제 아래 차례로 '1 손의 형태, 2 손의 구실, 3 손과 촉각, 4 생식 공간에서의 손의 의미와 척도, 5 도구로서의 손, 손으로서의 도구, 6 언어로서의 손 …(중략)… 12 손과 언어 혹은 언어학적 세계'등의 목차가 정리됐다.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안의 밖에 있고, 밖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신의 세계 - 에피레마’에서
회화적인 문자의 시, 콘크리트 포에트리
무카이는 이 전시의 서시序詩로 괴테를 인용하며 안과 밖, 앞과 뒤가 다르지 않고, 서로 순환하며 연결됐음을 시사한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의 우주론은 결국 소우주와 대우주의 제스처 - '형태의 탄생'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그는 오늘이 어제인 동시에 내일이라 말하듯, 우주의 원형을 통해 미래를 순환시키는 것이 곧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주의 제스처를 걸어나오면 그의 또다른 작품 '콘크리트 포에트리(Concrete Poetry)'를 만날 수 있다. 콘크리트 포에트리란 일부 단어나 글자를 회화적으로 배열해 표현하는 형상시다. 구체시나 시각시로도 불린다.
이 실험적 시와 그 국제적 운동은, 언어를 기존의 내용적·의미론적 기능에서 해방시켜 이미지나 3차원적 존재로 보려는 시도다. 언어가 지니는 자율적이고 구조적인 특성을 탐구하기 위함이다. 1950년대 울름조형대학에서 콘크리트 포에트리의 창시자 오이겐 곰링거로부터 직접 수업을 들으며 초기부터 이 운동에 참여한 그는 콘크리트 포에트리 사조에 빠질 수 없는 대표 시인이다. 그는 일본 문자인 히라가나는 물론, 영어-한자를 이용해 작업했으며, 이번 한국 전시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 위주의 작품을 선보인다.
마을 정 町자 5개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킨 듯한 작품 '마을 /町 / Town'은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밭 전(田)과 고무래 정(丁)이 만난 글자 마을 정 町자가 모여 있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촌락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크고 작은 밭 전자를 통해 흙 냄새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나무 목(木)의 4획으로 4개, 수풀 림(林)은 8획이므로 8개, 수풀 삼(森)은 12획이므로 12개 한자를 사용해 별자리(성좌)처럼 글자 무리를 만든 작품도 있다('나무의 성좌 / 木の星座 / Constellation of Tree', 1965). 이렇게 글자를 이용한 성좌의 발견은 콘크리트 포에트리의 제작 원리 중 하나다.
'인간 / 人間 / Human Being'은 사람(人)은 '사이(間)'를 가운데 두고, 우주 혹은 타자와 맺어지면서 처음으로 인간(人間)이 된다는 의미를 담았다. 우리가 주로 글자의 의미나 소리에 집중하는 반면 무카이는 글자의 형태와 구조로 문자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울름조형대학의 초대 학장이자 건축가인 막스 빌은 무카이의 콘크리트 포에트리에 대해 "설령 (한자나 히라가나, 알파벳 등) 표의문자나 표음문자를 해독 못하는 관람자라도 무카이의 작품이 가지는 맑은 빛의 미적 정보만으로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으며, 기호의 의미를 알고 있는 관람자에게는 한층 더 큰 감동을 안겨줄 것"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그는 이어 "(무카이는) 의미를 지닌 기호인 언어를 하나의 조형으로 재탄생시켜 원초적 형상으로 되돌려, 우리에게 시적 메시지로 순화한 비전을 전해준다"고 해석했다.
그의 시는 읽으며 난해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저 사물을 바라볼 때처럼, 혹은 그림을 볼 때처럼 오감을 통해 생각하고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