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작가! 달 떨어졌어!”
격앙된 중년 남자의 외마디 고함 소리에 박찬국은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기자는 잠시 몇 초 멍한 시간을 보낸 뒤 허둥지둥 박찬국을 쫓았다. 아래로 가야 하나? 위로 가야 하나?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졌다. 계단을 올라 건물 꼭대기로 향했다. 아침나절까지 분명 옥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건이 없다. 휑한 옥상을 가로질러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리의 양쪽에 줄지어선 빌딩 사이에 꽉 끼어버린 달덩어리를 십 수 명의 사람들이 받쳐 들고 있다.
야외 작업 설치를 위해 아침부터 중천에 떠버린 달빛, 아니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 새카맣게 타 버린 작가가 한 숨 돌린 틈을 타, 기자가 첫 질문을 건네던 순간이었다. 제작부터 설치까지 작업과정을 카메라에 담던 VJ 신청년(본명)도 “큰일 난 거예요?”라고 물어보며,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뛰쳐나갔다. 분명 큰일이 난 건 같은데, 청년의 눈은 기대 섞인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이 청년뿐 아니다. 거리로 나서니, 갑자기 떨어진 거대한 달을 높게 치켜 든 사람들의 입 꼬리가 모두 올라가 있다.
달덩어리는 사람들이 피해 다닐 수도 없을 만큼 거리를 단단히 메우고 있었다. 달에 가득 찬 공기를 빼내기 위해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달을 향해 덤벼들었다. 이 북새통에서 가장 신난 건 아이들이다. 바람이 빠져 홀쭉해져가는 달에 몸을 던진다. 아이들을 말리는 어른들도 느닷없이 지상으로 떨어진 달에 즐거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이 모든 해프닝을 지켜보던 주민 중 한 명이 풍선 바람을 빼내고 있던 작가에게 한 마디 건넨다. “박 작가, 이번 작업 대성공이구만!” 5월 14일 한낮, 익산시 중앙동 문화예술 거리에 예술 장터가 선 날 일어난 일이다.
영정통의 영화를 다시 한번
꽤 큰 규모의 아트 프로젝트가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방문한 익산은 그러나 쥐죽은 듯 고요했다. 군데군데 눈에 띄는 적산가옥들에는 리모델링이 덧입혀져 있지만, 그마저도 80~90년대 것으로 짐작돼 침잠한 세월이 느껴졌다.
건물의 삭은 콘크리트 질감에, 니스를 칠하고 벗겨내고 페인트를 칠했지만 그마저 벗겨져나가는 나무 창문틀이묘하게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어릴 적 추억을 자극하는 다방과 미장원, 양복점, 중국집 같은 이름이 붙은 간판들이 최신 유행은 알 바 없다는 듯 무심하게 존재하는 이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길 바라는 것은 서울사람의 이기적인 바람일까?
익산문화재단의 사무국장 이태호는 “문화적으로 척박한 도시”라고 설명한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 안에 토박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란다. 대개의 도심이 그렇듯 익산 역시 신도시 개발로 인구가 줄어들고, 도심 상업지역이 쇠퇴하는 결과를 맞았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가 이뤄진 중앙동 일대는 익산의 구도심이다. 인근의 이리역(현 익산역)이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충이었을 때만 해도 인근 최대의 번화가였다. 하지만 1977년 이리역 폭파사고 이후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런 중앙동 한복판의 중앙로(일명 영정통)에 익산문화재단과 익산창작스튜디오 그리고 공공예술프로젝트 E217의 공간이 있다.
*영정통(榮町通): ‘번영 길’이라는 뜻. 일제 강점기에 가장 번화한 거리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술가가 주민으로, 주민이 예술가로
E217은 동경 217도에 위치한 익산의 지도상 좌표에서 이름를 따왔다. 도시 재생을 목적으로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다. 익산 창작스튜디오가 지역 구분 없이 미술 작가를 대상으로 운영되는 한편, E217은 익산 기반의 예술가를 위주로 분야 구분 없이 운영된다. 중견 소설가 정도상, 영화 평론가 신귀백, 영상 작업을 하는 신청년, 작가 박찬국이 현재 입주해 있다.
이 사무국장은 예술가들과 함께 진행하는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대해 “창작가들과 연계해 도시 이미지를 특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익산시는 백제와 삼한시대의 수도였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미륵사지도 보유하고 있다. 근대 문화유산 역시 인근의 군산보다 많지만, 현재 표방하고 있는 ‘역사 도시’의 이미지가 크게 부각되지 못한 면이 있다.
이런 이유로, 미술 평론가이기도 한 이태호 사무국장은 “모든 문화를 크게 아우를 수 있는 예술의 기능이 필요하며, 예술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더불어, “시각, 영상, 문학 등의 각기 다른 예술 분야가 한 공간에서 활동하며 진행하는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올해 처음인데, 무엇보다 주민들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이라고 전한다.
이날 열린 예술장터 역시 익산문화재단과 주민협의체 주관으로 열렸다. 지역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작품을 내놓고, 시민들과 교류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마련해 진행하는 동안, 거리의 상점주들은 주차를 정리하고, 시민들과 나눠먹을 음식을 마련했다.
‘소유되지 않는 기억’
예술가에 의한 도시재생 시도는 현재 전국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상업화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대책은 당연히 생각돼야 한다. 이 사무국장은 “중앙동 문화예술거리의 예술적 움직임으로 일대의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2011년 시작된 ‘문화예술의 거리 활성화 사업’의 기초가 다져졌고 지금이 전환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지역 사회의 분위기가 활력을 띄기 시작한 지금부터 주민들의 성숙한 의식도 요구된다.
예술장터와 함께 마련된 작가 박찬국의 프로젝트 역시 이런 우려를 포함한다. ‘소유되지 않는 기억’ 프로젝트는 레지던시 E217 소재 빌딩의 옥상에 커다란 달을 설치하는 것이다. 중앙로(영정통)는 가장 번성했다던 100년 전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며 추억과 기억을 묻어둔 거리다. 그런 거리에 대해 작가는 ‘과연 물리적 소유만이 소유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세상 모든 사람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달에 비유한다.
달이 지상으로 떨어진 후, 작가는 구멍 뚫린 달의 여기저기를 서둘러 복구했다. 바람이 너무 강해 고정 줄이 끊긴것이기에 중앙로 중간의 주차장에 다시 설치하기로 했다. 아침 내내 했던 바람 주입 작업을 다시 하는 동안, 한 중년남자는 아예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사투리로 훈수를 멈추질 않는다. 끊임없는 잘못 지적를 보니 이번 행사에 할말이 많은가 싶다.
달이 다시 부풀어 오르고 달 안의 조명이 켜지자 그는 “멋있구먼! 그냥 여기에 계속 두라구!”라 외쳤다. 알고 보니 주차장 옆 상점 주인이었던 것. 사고를 수습하며 분투한 작가에게 보내는 시민들의 박수와 함께 ‘소유할 수 없는 달’은 새롭게 떠올랐다.
박찬국은 이번에 선보인 ‘소유되지 않는 기억’ 프로젝트 이외에도 익산 시민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공공 프로젝트 ‘보이지 않는 기억’을 진행하고 있다. 선착순 300명까지 지원을 받고 있으니, 관심 있는 시민은 익산문화재단으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