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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움 아트스펙트럼 ① 백정기] 흐물흐물 바셀린으로 돌탑 쌓은 뜻은?

한반도 말라붙게 한 역사의 비극에 '바셀린 치료 탑'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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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5호 김연수⁄ 2016.05.27 18:24:41

▲'아트스펙트럼 2016'의 1층 전시장.(사진=리움미술관)

5월 12일 삼성 미술관 리움(LEEUM)의 ‘아트스펙트럼’전이 시작됐다. 삼성 소속 미술관의 유일한 시리즈 전시인 아트 스펙트럼은 2001년 호암 갤러리에서의 첫 등장부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386세대 중심의 젊은 작가들이 대안공간을 주요 무대로 삼던 현실에서 대형 미술관이 전시 지원뿐 아니라 일부 작품을 구매-소장하는 프로젝트여서 대기업 관련 미술관으로서 새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격년제로 기획된 이 프로젝트는 올해 2016년 전시를 맞기까지 부침이 심한 편이었다. 2001년, 2003년, 2006년 등 3회 개최 후, 삼성그룹 자체 판단으로 중단했다가 2012년 6년 만에 부활했고 2014년에 파격적인 시스템 변화를 꾀했다.


기존의 내부 관계자 추천만으로 이뤄지는 방식을 버리고,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한 추천 위원단과 함께 작가를 선정-초청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전시 지원금을 기존 500만 원에서 1000만 원으로 대폭 올렸으며,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전시기간 중 심사를 거쳐 선정한 한 팀에게 상금 3000만 원을 수여하는 ‘아트스펙트럼 작가상’이 신설된 것이었다. 그 첫 수상자는 올해 디올 전시에서 ‘한국 여자’라는 사진 작품이 논란을 빚었던 작가 이완이 했다.


그렇게 6회째를 맞이한 ‘아트스펙트럼 2016’전에는 김영은(80년생, 사운드 설치), 박경근(78년생, 영상), 박민하(85년생, 영상/설치), 백정기(81년생, 설치), 안동일(83년생, 회화/사진), 옥인 콜렉티브(설치), 옵티컬 레이스(설치), 이호인(80년생, 회화), 제인 진 카이젠(80년생, 영상/설치), 최해리(78년생, 회화, 영상, 설치)등 10팀 13명 작가가 초청돼 40여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들의 관심사, 사회적 이슈로 향해 


이번 전시의 진행을 맡은 이진아 큐레이터는 “과거 전시들이 개인적인 서사나 관심사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았다면, 올해는 대체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업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도 “작업마다 하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에 주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올해 전시에 대해 일각에선 “아트 스펙트럼 작가상 신설 이후, 한 공간에 설치된 작품들 간의 조화가 고려되지 않은 채 공정한 전시 공간 분배에 더 치우친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는 한편, “그래도 2014년 전시보다는 한결 정돈돼 집중하기 좋다”는 분석도 눈에 띈다.


작가들의 진짜 얘기는 어떤 것?


한편 이형구, 문경원, 김성환 및 작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에 초청된 김아영까지 아트 스펙트럼을 거쳐 간 작가들 중 꽤 많은 수가 국내는 물론 해외 미술계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이름을 접하기 어려웠던 것도사실이다. 막상 그들이 어떤 작업을 하는지에 대해 몇 줄로 요약된 전시 내용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도 현실이다.


그것은 현대미술과 사람들의 괴리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진아 큐레이터는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과 작품 소개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 꽤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관람에 있어 큐레이터가 하는 모든 말과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한다. 무겁게 생각할 필요 없이 맘에 드는 작품을 감상하면 된다는 소리다. 덧붙여, 이 큐레이터는 “작품 이해를 위한 쉬운 설명부터 전문가를 위한 자료 구비까지 폭 넓은 창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작가들이 작업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자료들과,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영상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룸 ‘아트스펙트럼[x]’가 마련돼 있다. 전시 작품을 감상한 뒤 작가(팀)별로 준비된 자료를 참고하면 이해와 공감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CNB저널은 이번 아트 스펙트럼전 초청 작가들의 작품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한다. 현대미술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미술언어로 무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작업일지라도 작가의 작업은 특정한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싶은 특정한 감정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작가만이 가진,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모두 가졌을지 모를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알아볼 첫 순서는 세상의 치유를 기원하는 작가 백정기의 작업이다.


▲백정기 작가.(사진= 김연수 기자)


백정기, 치유의 시작


백정기 작업세계의 출발에서 그의 손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입은 왼손은 물리적 삶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치유’에 대한 열망을 품게 했다. 치유의 개념은 투구나 방패 등의 보호구로 나타나는 형상화 과정을 거쳐 바셀린과 같은 물질의 특성에 도달한다.


전환기라 할 수 있는 2007년경부터, 금속으로 작업하던 그의 작업에 바셀린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셀린은 직접적으로 치유 기능이 있는 물질이기도 하지만, 물과 기름이라는 서로 섞일 수 없다고 생각되는 양극의 물질이 섞여있다는 상징성이 있다.


개인의 문제에서 시작한 작가의 관심은 외부 사회로 확대됐다. 그가 보는 사회는 좌우, 남북, 동서의 개념에서 비롯한 철학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비롯해 정신과 물질, 관념과 실제, 주술과 과학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들로 정의된 세상이다. 작가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정의되어 분열되고 상처입은 세상을 치유하려는 시도를 시작한다.


백정기는 그가 주목한 물질, 바셀린의 치유기능과 더불어 바셀린을 형성하는 물의 생명력과 치유 기능에도 주목한다. 그는 물 부족으로 갈라진 땅을 통해 이분법으로 분열된 세상을 은유하며, 치유의 물을 기원하는 기우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것은 갈라진 땅을 찾아 틈을 바셀린으로 메꾸는 퍼포먼스 형식의 작업이었다.


▲백정기의 '악해독단' 설치 전경.(사진= 리움미술관)


악해독단, “정신 에너지가 물리적 에너지로”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악해독단’은 4개의 설치작품으로 구성됐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사회 기저에 깔린 이분법 중에서도 주술과 과학의 융합을 시도한다. 모두 기원의 장소나 형상물의 재현이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실내에 심어진 한 그루의 느티나무가 보인다. 나무 앞에 설치된 촛불의 모습이 우리나라 전통 토템인 당산목을 떠올리게 한다.


나무 앞에 켜진 촛불은 열에너지를 발산한다. 기원을 담은 열에너지는 작가의 과학적 연구에 기반을 둔 장치로 안테나가 된 살아있는 나무를 통해 음원으로 변환-송출된다. 송출된 음원은 전시장 내부의 오디오에서 들을 수 있다. 내용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와 작가의 우리나라 전통의 기원 방식에 대한 것이다. 정신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백정기, '악해독단'. 나무, 목재, 전선, 송신기, 양초, 열전소자, 유리, 방열판, 혼합재료. 2016.


오디오가 설치된 맞은편에는 이번에 선보이는 작업의 중심 격인 기념비 형태의 작품이 있다. 악해독단은 조선시대 서울의 오방(동, 서, 남, 북, 중앙) 중에서 남방에 있던 기우제단의 이름이다. 대부분의 기우제단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됐고, 근대화 이후 기우제 전통 역시 맥이 끊겼다.


악해독단은 2005년 용산 미군기지 내에서 그 터와 주춧돌이 발견됐는데, 주춧돌은 시멘트와 붉은벽돌로 덕지덕지 발라져 미군의 바비큐 그릴로 사용되고 있었단다. 게다가 서울의 5방위 중 남쪽은 풍수지리 상 불의 기운이 제일 강한 곳인데, 바비큐 그릴로 사용됐다는 것은 물과 관련된 기우제단의 속성과 상극을 이루는 것일뿐더러 화기를 더하는 것이기도 했다고.


작가는 근대화의 상징인 시멘트와 붉은벽돌은 전통의 단절과 무관심, 그리고 상처받은 치욕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라져야 하지만 잊히면 안 되는 붉은벽돌 기념비를 전시공간에 재현했다. 특이점은 벽돌의 틈을 바셀린으로 메웠다는 것이다. 작가는 “바셀린으로 세워진 벽돌 기념물은 단단한 견고성이 제거되고, 소멸과 변화의 과정에 놓인 자연물이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치유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백정기, '악해독단'의 토룡. 흙, 바셀린, 대나무, 마그네슘, 동, 전선, 식물 재배 램프, 쑥, 유리, 혼합재료. 2016.


그 옆에 설치된 토룡은 전통적인 기우제에서 모셨던 흙으로 만든 용이다. 실제 악해독단에서 이뤄졌던 ‘토룡기우제’는 흙으로 만든 용의 형상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리며 비를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작가는 조선총독부에 남아 있던 문헌을 바탕으로 토룡을 재현했다. 더불어 이 역시 바셀린과 과학적 장치를 이용해 수분을 유지시킴으로서 안테나 및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는 배터리의 역할도 한다. 그가 만든 토룡이 생성해내는 에너지는 식물 재배 램프를 통해 실제 살아 있는 쑥을 자라게 한다.


그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물과 바셀린에 대해 “그 물질들이 가진 성질에 대해 물성이라기보다는 '동시성'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단단한 것은 강하지만 죽어 있고, 촉촉한 것은 약하지만 살아 있다'는 노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런 속성이 이분법적인 사고를 흔들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백정기는 “전시공간에서 설치로 완성해야 했던 이번 전시의 작업 과정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작업의 시각적 완성도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어떤 작업이든 미술작업은 시각적 감동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작업 지론”이라고 밝혔다.


기우제의 주술행위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을 그는 ‘의례의 효용’으로 정의한다. 행위의 시도조차 없다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 즉 “실천은 자신을 돌아보고 희망을 가지게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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