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외로운 한인 작가 좋아한다”던 조영남 씨, 代作과 노동착취는 구분해야지요?
때는 11년 전인 2005년. 장소는 각국의 외교 공관들이 정갈하게 자리잡고 있는 미국 워싱턴 매사추세츠 애비뉴의 워싱턴 한국문화원.
‘조영남의 최근 작품전(Recent Paintings)' 전시장에 트레이드마크인 검정 물들인 군복 외투를 걸쳐 입은 조영남 씨가 선글라스를 쓴 채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워싱턴 지역 한인언론의 기자들을 만났다.
현지의 한인 언론사들은 한국의 주류 언론에 비한다면 그저 소규모 지역언론에 불과하다. ‘작은 기자들’을 상대로 조 화가는 말을 아꼈다. “오전 시간이라 말하기가 귀찮아서? 아니면 여행의 피로감 때문에 그런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짧은 기자회견에 불과했지만, 이날 그가 남긴 말 중에 한 마디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올해, 그의 대작(代作) 시비가 불거지면서 11년 전의 그 한 마디가 불현듯 새 의미를 담고 퍼뜩 다가왔다.
자신의 ‘화투 작품’ 앞에서 사진촬영을 당하는 그에게 물어봤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냐’고. 유럽 또는 한국의 미술대가 이름이 나올 걸로 기대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의외였다. “외롭게 외국 현지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만 몰두하는 해외 한인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뉴욕의 누구 같은”이라고 이름까지 얘기했지만, 그 뉴욕 소재 작가가, 이번 대작 시비를 발설한 장본인인 송기창 작가(그는 뉴욕에서 활동했었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굴 속에 파묻힌 듯 작품만 하는 해외 한인 작가들
‘해외에서 외롭게 창작활동에 임하는 한인 작가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해외 생활을 10년 한 기자의 고개 역시 저절로 끄떡여졌다. 아, 역시 뭔가를 아는 사람이구나. 한국인이 해외에 사는 자체가 외롭다. 그런데 그 안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는 어떻겠는가? 한국 안에서라면 여러 매체가 부족한 대로 예술가들의 활동을 소개하므로, 미술작가들의 활동과 작품이 언론을 탄다. 네트웍과 연줄, 언론을 잘 이용하면 유명작가로 가는 데까지 걸리는 공력과 시간을 단축시킬 길도 있다.
그러나, 해외에선 이런 경로가 거의 없다. 한국과의 연줄이 없는 현지 작가라면 그저 굴 속에 파묻힌 곰 또는 개미처럼,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고, 외국 현지의 화랑과 미술 거래상에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들고 가 그야말로 ‘연줄 없이 작품만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고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아니, 잠깐. 조영남 씨가 좋아한다고 한 작가가 만약 송기창 씨라면, 좋아하고 아끼는 작가의 노력을 겨우 작품당 10만 원이란 염가에 구매했다는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이다.
조영남 씨는 ‘송기창 씨를 도와준다는 생각에서 일을 시켰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헌데, 송 씨 같은 해외 작가를, 조영남 씨처럼 한국에서 온갖 빵빵한 네트웍을 다 동원할 수 있는 실력자가 도와주는 길이, 겨우 열정페이-임금착취뿐일까?
기자가 조영남의 입장에 있었다면, “작품당 10만 원씩에 10점을 그려라”고 지시하는 것보다는, 외롭게 작품과 씨름하는 한인 작가를 그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소개하는 데 더 힘을 썼을 것 같다. 그 해외 작가가 성공해야, 그를 소개한 나의 가치도 올라가므로. 또한 화상이 아닌 바에야 굳이 남의 작품을 염가에 구입해 착취할 필요도 없으니까.
열정페이 또는 착취를 ‘도움’이라고 한다면 위선
도와준다고 다 도와주는 게 아니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돈을 주는 것, 또는 ‘어차피 너의 장래를 위해 하는 일이니 일하는 거 자체를 행복하게 생각하라’는 열정페이를 우리는 도와준다기보다 착취라고 부른다.
조영남 씨의 대작(代作) 행위가 미술개념적으로 합당한지 아닌지는 미술 전문가들이 결정할 문제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는 그런 개념적 다툼 이외에 또 하나의 문제로 착취냐 아니냐가 존재한다.
조 씨가 활용한 대작 작가들은 송 씨 이외에도 몇 명이 더 있다고 한다. 만약 그들 역시 외로운 해외 한인 작가들이었다면 사태가 좀 더 분명히 드러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