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속담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란 말이 있다. 요즘 시대에는 보는 것이 곧 욕망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 같다. 눈에 띄는 모든 것이 갖고 싶고, 되고 싶게 부추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바를 알기 전에 누군가의 욕망을 더 크고 멋지게 보는 시선을 먼저 알게 된다. 또한 본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세상에 부딪히기도 한다. 규범이나 윤리, 예의와 타인의 시선을 이유로 자신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숨기며 살아간다.
누구나 가슴 속에 충동 가득한 욕망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김선용 작가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에 관해 말한다. 염원 혹은 본능으로도 바꿔 부를 수 있는 이 응어리를 시각언어로 풀어낸다. 솔직함. 김선용과의 인터뷰 내내 이 단어가 가장 많이 떠올랐다.
욕망, 모상 통해 지배하기
강렬한 빨간 색이 캔버스의 대부분을 메운 김선용의 그림들은 금기시되는 빨간 책을 연상시킨다. 인간 본성에서 기인한 금지된 욕망들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면서도 숨겨야 할 낙인이다.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을 규제하는 시민사회에서 마음껏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찾았다. 바로 이미지다.
불현듯 솟구치는 강렬한 욕망과 함께 스멀스멀 올라오는 비물질적 사유들을 작가는 직관적인 시각화를 통해 표출한다. 독립성을 띈 주인이 지배하는 하나의 공화국처럼, 자신이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이미지의 공간을 캔버스 위에 그려낸다.
“문명화가 덜 됐을 때, 인류가 미지의 자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던 것처럼 우리는 마음속의 욕망이나 알 수 없는 충동에 두려움을 갖잖아요. 식물이나 동물부터 비, 태양, 번개 등에 이름을 붙이고 그림 그렸듯, 두려운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자신 안에서 정리를 하면 안심이 되요. 그런 식으로 제가 가진 욕망을 통제해보려는 시도예요” 라고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이 방법을 ‘모상을 통한 지배’라고 불렀다.
여기서 모상이란 원형과 가까우면서도 먼 이중적인 플라톤의 개념이다. 현실의 모든 것은 모두 모방된 것이고 진짜는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플라톤은 말했다. 다만 진짜(진리)를 모방함으로써 모방된 것을 소유하고 군림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의 모방론은 '주체란 진리를 모방해 소유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모상은 어떤 대상을 모방해 만든 카피로서, 우리의 지배권 안으로 들어온다. 적어도 모방·복제된 아이콘만은 우리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비정형의 욕망을 모상을 통해 지배함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다.
엉키고 뭉쳐진 욕망 덩어리
그렇다면 그의 욕망의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림을 보면 붉거나 흰 덩어리들이 억눌린 듯 뭉쳐 있거나 서로 엉켜 있고 어딘가 끈적끈적하고 뜨끈해 보이기도 한다. 불규칙하게 축적되는 경험처럼 욕망도 다양한 형태로 경화됐다.
작가는 뚜렷한 밑그림 없이 작업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색감과 구도 등을 가볍게 생각하고 바로 캔버스로 돌진한다. 이 즉발적인 과정에 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큰 캔버스 위에 물감을 쫙 깔고 스케치도 없이 붓이 바로 들어가요.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과정이에요. 본능에 충동적으로 충실한 순간이고, 후에 이성적인 판단을 더해 정리하며 덜어낼 것을 찾죠.”
일련의 즉흥적인 과정은 그가 지속하고 있는 드로잉을 통해 이뤄질 수 있었다. 캔버스 위에서는 색의 진하고 묽기, 곡선과 직선, 마티에르를 실험하지만 특히 조형적 연구가 많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드로잉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기질을 드로잉을 통해 꺼내놓는다.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자주 사용하는 선, 주로 표현하는 덩어리 질감, 공간성, 색감 배치, 선적인 요소 등을 드로잉을 통해 배출하며 “내 안에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자각하곤 한다. 이는 캔버스 작업에서도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색과 욕망
그의 작품은 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주색인 붉은색에 대해 그는 “주로 쓰는 색은 섹슈얼한 느낌이 드는 장밋빛 색감이에요. 전복하거나 투쟁하는 핏빛 붉은색이 아니라 성적 욕망이 대변되는 컬러죠. 매력적이고 섹시하다고 느껴지는 색이지만 붉은색이 가진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었어요. 어딘가 비장한 기분이 들죠. 그런데 미색과 흰색을 함께 사용해 균형을 맞추면 제가 표현하려는 날것의 섹시함이 더 잘 표현되요”라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 중 특히 자화상과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몸을 씻듯 자신을 정갈하게 만드는 공간인 욕실이 자화상의 공간적 배경이다. 욕조와 샤워커튼이 얼핏 보이지만 자세한 묘사는 피했다. 하지만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누군가는 어딘가에 걸터앉아 빨갛고 하얀 기운을 내뿜어내고 있다. 혼자만의 공간인 욕실에서 드디어 자기 자신이 돼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나가면 다시 또 차분한 이성으로 무장해야 하기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 미노타우로스는 신화 속의 반인반우(半人半牛)로, 종국에는 자신의 흉포함(혹은 자연적 본성) 때문에 평생을 미로에 갇히게 된다. 사람도 반인반우처럼 자연의 본성과 인간의 도리 사이의 미궁에서 평생 헤매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과연 당신은 욕망이란 미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Unbridled Lust') 그는 요즘 인물화한 미노타우로스 구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내게 욕망이란 인간 내면에 자리한 비이성적인 광기나 극단, 성적 충동 등을 말한다. 제거되거나 숨기고 살라고 강요받지만 뿜어내고 토해내고 터트리고 싶은 그런 걸 시각화한다. 여러 예술가들이 그러하겠지만 내 욕망을 배출하며 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방탕함이나 방만함과는 다르다는 부분 역시 짚어냈다. “광기나 욕망 등 날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작가로서의 진정성은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작가라면 술, 담배나 마약, 섹스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말하는 욕망은 삶의 방탕함이나 무책임함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는 내 주관적인 시각으로만 풀어내고 있지만, 책임감을 갖고 현 시대를 반영하는 작가로 살고 싶다”고 소신을 밝혔다.
실제로 그는 아침부터 일어나 저녁까지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한다. 여흥이나 패기로 밤을 새며 비효율적인 시간을 보내기보다 작업에 보다 진지하게 임하기 위해 삶의 태도부터 고쳤단다. 중견·원로 작가들을 보며 그들의 진정성 있는 작업 태도에 감명 받았다는 그에겐 예비 작가라는 말이 부족해보였다.
"내가 차마 못하는 것 해내는 김선용"
김근중 가천대 미대 교수의 추천사
김선용 작가는 인간의 욕망을 다룬다. 개인으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내재화되어 내 안의 타자로써 억압되고 소외되어왔던 ‘그것’을 표현한다. 그 방식이 매우 직설적이며 본질적이어서 신선한 날것 그대로다. 주제의식과 표현방식 자체가 단순명쾌한 만큼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메시지가 매우 강력하다. 머뭇거림이 없이 내질러 버리는 대담함에 보는 이가 압도당하며 가슴 또한 시원해진다.
최근 작가들의 작품이 다분히 개념에 매이거나 서술하고 꾸미고 매만지는 것에 함몰되어 있기에 '내가 차마 못하는 것을 너는 하고 있구나'라고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준다. 이 점이 그의 작품의 강점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삶의 방식만큼이나 복잡하고 문제도 많다. 주관적 이성이 폭력화하여 피로에 찌들고 분노가 들끓는 사회가 되었다. 일찍이 주체는 분열되어 이원화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다. 역사 역시 그래왔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이 탈이분법의 틈새를 찾으려 노력해왔지만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밖의 것에 의존하거나 시비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스스로의 문제로 보고 해결하고자 한다. 내 안의 불안, 분노, 탐욕, 성욕, 폭력 등 욕망덩어리 또한 자기임을 직시한다. 내가 버렸던 나를, 나를 가뒀던 그물을 스스로 풀고 드러내어 종내 쥬이상스를 느끼며 충족된 주체로 회복되는 길을 가고자 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며, 예술이 예술로 되는 길이다. 모든 일도 이와 같기에 예술이 아닌 것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마치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는 마음이 아니고선 절대 불가능하다. 그 길을 바라볼 때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사람들이 그 앞에서 머뭇대고 있다. 진솔한 자기고백을 위해 화면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진정 험난한 길. 김선용 작가에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