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하게 반짝이는 커튼과 어슴푸레 빛을 발하는 글자들, 웅성대는 목소리와 구불구불한 골목....
불현듯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흔히 유령 같다고 말한다. 죽은 이의 혼령을 뜻하는 유령은 종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순간적으로 발현했다가 사라지는 기억이나 환상도 마찬가지로 유령이 된다.
대안공간 루프는 손경화 작가의 개인전 ‘도시의 표면과 마음의 깊이(The Surface of the City and the Depth of the Psyche)'를 6월 17일~7월 17일 연다.
번뜩이는 찰나의 순간, 유령과의 조우
손경화는 부재와 현존의 ‘사이’를 탐구하는 작가다. 도시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손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상상력이 발현되는 무대로서의 도시를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손경화에게 도시는 미로와 같다. 걸을수록, 탐색할수록 미분화되는 도시의 미로 속에서 작가는 유령이 돼 나타났다 사라진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가장 집중한 것은, 보이지만 인식되지 않는 존재들에 관해서다. 눈부신 도시의 스펙터클을 담으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매일 새로워지는 도시에서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작가는 도시에서 ‘산보자’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보이던 것들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현상을 발견한다. 도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모든 게 낯설어지는 경험을 통해 새로운 지각이 깨어난다.
1층: 텅 빈 무대의 장막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오른쪽 벽에 걸린 커튼에 시선을 빼앗긴다. 반짝이는 분홍빛 커튼은 파란빛 어둠과 황홀경 같은 홀로그램 반사광을 내뿜고 있다.
우선, 이 커튼 작품의 제목은 ‘He Needs My Eye Looking at Him. He Needs Me To Prove He's Alive(그는 그를 보는 내 눈이 필요해. 그는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할 내가 필요해)’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바로 스틸먼(Stillman)이다.
손 작가는 최근 몇 년간 ‘스틸먼’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에 관해 작업해왔다. 스틸먼은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삼부작’의 ‘유리의 도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그를 모티프로 미궁과 같은 도시 공간을 건축했다. 발터 벤야민의 “산보자의 모습 속에는 이미 탐정의 모습이 예시돼 있다“는 말처럼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퀸, Quinn)과 마찬가지로 스틸먼을 쫓는 탐정이 된다. 작가가 이 수수께끼 같은 존재인 스틸먼을 추적하고 탐색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이번 전시다. 여기서 스틸먼은 앞서 말한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흡사 유령과도 같은 존재다.
작가의 커튼 작업은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미한다. 장막 안의 존재는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커튼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거대한 존재감을 내비치는 커튼은 무언가를 가려버리기 위해 그 자리에 있다. 마치 연극이 시작되기 전 무대의 장막을 보며 느끼는 설렘과 두려움처럼 관람객은 커튼이 만드는 홀로그램 반사광을 어렴풋한 환각처럼 간직한 채 아래층 전시장으로 내려간다.
지하: 언어의 미궁
지하의 전시는 체험의 공간이다. 작가는 자신이 스틸먼을 추적하며 떠나는 도시 속 미로를 전시장에 담았다. 여기서 포착되는 도시의 특성은 걸을 수 있고, 계속되는 소음이 있으며, 빛을 발하는 곳이다.
지하 전시장엔 출구도 입구도, 안과 밖도 알 수 없는 글자들의 미로가 연출됐다. 미로는 즐거움과 기대감을 주는 여행 겸 놀이인 한편, 수많은 장애물과 막다른 길을 만나고 왕복을 거듭하며 심지어 미노타우로스 같은 괴물을 만나게 되는 운명적 방랑이자 삶의 과정이다.
여기서 잠시 전시장에 산재된 글자들을 읽어보자. T과 N이 서 있는가 하면 M, O, G 등의 글자들은 바닥에 누워 사이사이로 길을 만들었다. 글자를 모두 모으면 'STILLMAN'과 ’GHOST'란 단어가 만들어진다. 스틸먼은 유령 같다는 메시지가 되기도 하지만, 이곳에선 스틸먼을 쫓는 우리가 유령이란 의미도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번 전시는 스틸먼을 쫓는 과정을 공간화한 형태다. 작가가 이렇게 스틸먼을 쫓는 이유는 스틸먼의 숨겨진 의미를 알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작가는 도시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경의와 공포의 순간을 스틸먼의 현존으로 비유한다. 그 순간은 기억이나 외부의 충격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미스터리한 흔적들이 혼재한 공간으로서의 도시에서 우연성은 작가가 스틸먼의 정체를 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연성은 바로 작가와 스틸먼이 맞닿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경화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 굳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한 편의 탐정소설처럼 몇 가지 결정적인 단서만을 보여주는 전시의 특성 상 관람객은 온전히 상상력을 바탕으로 공간을 느끼고 탐험할 수 있다. 유령 같은 스틸먼을 우연히 만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전시는 7월 1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