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바기오] 범죄의 나라라고? 필리핀인들 이리 선량한데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6일차 (코타키나발루 → 마닐라 버스 환승 → 바기오 도착)
마닐라공항에 도착
새벽 2시 15분, 세부항공기로 코타키나발루를 떠난다. 잠시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착륙한다는 소리에 잠깨니 마닐라공항이다. 곧장 파사이(Pasay) 빅토리 라이너(Victory Liner) 버스터미널로 이동하니 바기오(Baguio)행 버스가 막 떠난다. 버스 창에 기대 졸며 깨며 루손(Luzon)섬 중북부 풍경을 즐긴다. 버스는 수없이 많은 도시들을 지난다. 성당, 타운홀, 졸리비(Jolibee, 필리핀 로컬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체인), 맥도날드, SM몰, 이런 모습들이 반복된다. 사람도 많고 도시도 많은 나라다. 인구 1억 명이 넘지 않는가?
외모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곳
지나는 도시 이름과 스치는 사람들 얼굴은 순간 내가 멕시코 어디쯤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필리핀 사람들의 용모는 매우 다양하다. 한국인과 매우 비슷한 모습의 중국계부터 메스티소, 혼혈 정도에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 사람과 구분이 안갈 정도의 얼굴까지 나타난다. 여성들 중에는 눈에 번쩍 띄는 미인도 적지 않다. 거리에서 나에게 타갈로그어로 말 걸어오는 현지인들이 적지 않았으니 필리핀 여행은 최소한 생김새 때문에 불편할 일은 전혀 없다.
멀리 산들이 보이더니 버스는 곧 산악도로에 접어든다. 공항과 철도가 없는 바기오는 도로만이 유일한 접근로인 만큼 도로는 꽤 붐빈다. 물자를 공급하거나 티타늄, 몰리브덴 등 이 지역에서 나는 특수 광물을 운반하는 대형트럭 때문에 버스는 굼벵이 걸음을 한다. 버스는 마닐라에서 254km를 7시간에 주파해 오전 12시, 바기오에 도착했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바기오시 전경을 내려다봤다. 아름다운 석양이 깔렸다. 사진 = 김현주
바기오의 랜드마크 시청사
호텔에 짐을 풀고 도시 탐방에 나선다. 오늘 최고기온 23도, 황홀한 날씨다. 해발 1540m에 자리 잡은 고산도시 바기오는 평소에도 26도를 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측 기록상 30도를 넘은 적이 없다고 한다. 호텔 부근에 있는 시청사부터 찾는다.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시청사는 바기오를 여름 수도로 지정하기 위해 미국 통치 시절인 1910년 건립했다가 2차 대전으로 파괴된 이후 1950년에 재건축한 이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시내 중심을 항해 걸음을 재촉한다.
시내 한복판에 넓게 조성된 번햄 공원(Burnham Park)과 호수, 공원을 중심에 놓고 행정-상업-주거 지역으로 이어지는 방사형 구조와 일방통행로, 로터리, 레이크 드라이브, 넓은 보도, 이런 것들이 미국식 도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평균적인 필리핀 도시와 날씨, 풍광은 물론 분위기까지 제법 다르다. 낡은 지프니의 디젤 매연이 옥에 티일 뿐이다.
▲제법 큰 규모의 국제콜센터 용역회사. 영어는 필리핀의 국가 산업이다. 필리핀 사람들도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 사진 = 김현주
▲SM몰 내부.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는 쇼핑, 음식, 오락 종합 콤플렉스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방문한다. 사진 = 김현주
바기오의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 바기오박물관을 찾는다. 비기독교 소수민족인 산악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소개하는 것이 주요 테마다. 시내 가장 높은 언덕에는 SM몰이 거대한 성처럼 우뚝 서 있다. SM(Super Mall)몰은 아얄라몰(Ayala Mall)과 함께 웬만한 도시에는 다 있는 쇼핑, 음식, 오락(영화관) 종합 콤플렉스다. SM몰 발코니는 도시 전망을 만끽하기에 최고다. 멀고 가까운 산들로 사방이 둘러싸인 도시 전경을 굽어본다.
바기오성당에서 가슴을 울린 구절
SM몰을 나와 세션로드(Session Road)를 한 바퀴 돈 후 바기오성당을 찾는다. 세션로드는 1904년 미국 통치 시절 바기오를 여름 수도(summer capital)로 지정할 것을 공식 제안했던 장소로, 바기오의 고급 호텔과 음식점이 모여 있는 우아한 거리다.
고딕 양식의 첨탑을 얹고 있는 성당에서는 토요일 저녁 미사가 열리고 있어서 나도 들어가 앉는다. 신앙심 가득한 필리핀 사람들의 행복에 찬 얼굴이 성당을 한가득 채웠다. 오늘 기도는 세부에서 열린 세계성체대회가 무사히 끝난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절 영어 봉독이 또렷이 들린다. ‘사랑이 없으면’의 구절구절이 오늘따라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는다.
▲바기오 성당의 모습. 방문 당시 토요일 저녁 미사가 열렸다. 신앙심 가득한 필리핀 사람들이 성당을 한가득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 김현주
영어 실력이 뛰어난 필리핀 사람들
필리핀 사람들의 영어는 매우 유창하다. 항공기 기장, 승무원, 호텔 프론트, 박물관 큐레이터 등 여행자가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상당히 잘한다. 악센트가 거의 없는 미국 표준영어 발음과 저렴한 인건비 때문에 바기오는 세계 다국적 기업들의 콜센터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필리핀 공용어 타갈로그어에는 스페인어 단어 4000개, 영어 단어 1500개가 통용된다고 하니까 영어를 잘하기 위한 조건을 많이 갖춘 셈이다. 필리핀 사람들의 영어 실력은 이 나라의 국가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7일차 (바기오 → 비간)
과거 중국으로 향하는 바닷길 출발점 비간
오전 11시, 버스로 바기오를 떠나 비간(Vigan)으로 향한다. 아름다운 산악도로를 한 시간 남짓 내려오니 역시 덥다. 잠시 다른 우주에 다녀온 듯, 바기오에서 보낸 지난 24시간이 아련하다. 버스가 라우니온, 산페르난도, 산타마리아, 산타루시아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을 지나는 사이 행정구역도 벵겟(Benguet) 주에서 일로코스 수르(Ilocos Sur) 주로 바뀐다.
버스는 바기오를 출발한 지 195km, 5시간 30분 걸려 비간(Vigan)에 도착했다. 정말 멀리까지 왔다. 비간은 루손 섬 북서쪽 깊은 해안, 과거 중국으로 향하는 바닷길 출발점이었다. 유럽인이 도래하기 훨씬 전부터 중국 상인들이 왕래했고, 그 중 더러는 현지인과 결혼해 정착했을 뿐 아니라 개종, 개명으로 현지에 완전히 흡수됐다. 1572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점령했지만 스페인 통치 기간 내내 저항의 본거지였다.
▲시내 한복판에 넓게 조성된 번햄 공원엔 호수가 있다. 사람들이 보트 위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사진 = 김현주
예의바른 필리핀 사람들
내일 밤 출발하는 마닐라행 버스표를 예매하고 호텔을 찾아 들어간다. 내일 밤 버스로 비간을 떠나기 때문에 가급적 호텔에서 늦게 체크아웃하고 싶은데 혹시나 해서 부탁해 보니 늦게 떠나도 좋다면서 추가 요금 없이 내일 저녁 6시까지 머무르게 해준다. 내일 비간에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밤 버스, 새벽 귀국 비행기로 이어지는 여정이 한결 여유로워질 것이다.
이쯤에서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느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 사람들은 점잖고 예의바르다. 거리에서 소리 높여 떠들거나 찡그린 얼굴을 보기 어렵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투철하다. 연장자나 상급자에게는 말끝에 깍듯이 ‘Sir’를 붙여 존중을 표한다. 선한 사람들의 나라가 애석하게도 한국에서는 ‘위험한 나라’나 ‘총기의 나라’, 또는 ‘소매치기의 나라’로 알려졌으니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동안 경험했던, 그리고 이번에 다니고 있는 필리핀은 그런 표현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