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의 외곽, 짙은 녹색 나뭇잎이 우거진 숲길을 한참 걸어가면 다소곳이 자리 잡은 작가 강다영의 작업실이 있다. 작업실 앞의 작은 정원에는 땡볕이 내리쬐더라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테라스의 지붕그늘이 있고, 그걸 지나 들어선 작업실에는 시원하면서도 아련한 물의 풍경이 펼쳐졌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물의 세상
작업실 여기저기에 놓인 캔버스는 물을 담고 있다. 그 물들은 주변의 모든 형상을 반사해 비춘다. 물가의 알록달록 물든 단풍은 잔잔한 물결과 만나, 독특한 질감을 가진 물속에 사는 다른 한 그루의 단풍나무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얼어붙은 회색의 겨울 호수는 저 멀리 아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검은 산을 비춘다. 어둠이 내려앉아 제 것을 잃은 물색은 남아있는 햇살 조각의 황금빛을 강조한다. 강다영은 물이라도 바다의 파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물리적 힘이 아니라, 주로 잔잔하게 흘러 다른 대상을 비추는, 다시 말하면 다른 대상의 존재를 포용하는 물에 집중하는 듯하다.
생명의 근원인 물과 그것이 가진 다양한 모습 중 포용성에 이끌리는 작가의 작업은, 모성 충만한 여성성을 부정하지 않는 작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기에 그가 표현한 여름 바다의 파도조차 위협적이거나 장중하지 않고, 작가 앞에서 장난치는 개구쟁이 아들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여성성이 아닌 자연이 알려주는 우주의 원리
강다영이 소재의 여성성에 끌리고 있음은 전작에서도 발견된다. 프랑스 유학 시절 작가를 사로잡은 소재는 양귀비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화려한 색과 주름 잡힌 꽃잎의 형태와 질감을 여성의 생식기에 비유하곤 했다.
강 작가는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형상 이면에 치명적 마약 성분을 함유한 양귀비꽃의 이중적인 면에 매료됐다. 양귀비에 대한 작업은 꽃의 형상에 집중해 트레이싱지(기름종이) 위에 목탄만으로 표현한 드로잉 작업부터 그것이 가진 색에 집중한 작업으로 발전해나갔다.
하지만, 강다영은 자신이 작업이 여성적인 작업으로서 정의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연물을 매개로 한 자연의 원리에 대한 탐구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가 한창 양귀비를 그릴 때의 작품은 꽃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상화 과정이 진행된 상태였다. 그는 “바라보고 그리다 보면, 점점 자세하게 알게 되고 그 안의 세상이 확대되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점, 선, 면 같이 단순한 요소로 이뤄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른 형상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모두 같은 요소, 즉 지(地), 수(水), 화(火), 풍(風)에서 출발하고 돌아감을 느꼈다고 했다. 다른 생명 혹은 다른 자연에 대한 연구는 결국 자신을 찾고자 하는 과정이었으며, 자신도 결국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물 만난 자유로움
강다영은 최근의 작업에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작가 자신의 만족이 우선해 안으로 침잠해서 나온 결과물과 그것을 감상하는 관객과의 간극도 느껴졌지만, 다시 한 번 대상과의 거리감을 두고 아이의 마음으로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의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은 소재 선정이 다분히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여성적으로 보이는 반면, 그것을 표현한 붓 터치는 남성의 것으로 느껴질 만큼 매우 과감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얽매이기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격의 반영이자, 마음의 질서가 잡힌 자신감의 증거인 듯도 하다. 이와 더불어 흑백 그림을 흑백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원색으로 물들인 오브제(닥종이 같은)를 붙인 것 같은 시도는 부정적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위트와, 변화를 추구하는 격정적인 모험심을 엿보이게 해 매력을 더한다.
작가는 어릴때부터 정갈하게 준비하고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하는 할머니를 보며 자랐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신이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단다. 그래서 자연을 보며 답을 찾고자 했다. “자연은 너와 나의 기준이 없다”며,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며 자연스럽다는 것은 이타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전한다.
작가 강다영은 이렇게 자연의 모습에서 인간 혹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선보인 개인전 '물만난 풍경'을 연다. 언어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때로 심각한 방해가 될 수 있다. 강다영의 작업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누군가는 그의 그림이 추상, 혹은 반추상이라고 분류를 먼저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추상이란 단어는 그의 그림 한 폭이 가진 많은 이야기들과 다양한 감성을 너무 단순하게 축소시켜 버린다. 어떤 선입관도 없이 자연스러운 자연과 작가, 혹은 자아를 전시장에서 느껴보길 바란다. 전시는 인사동 가나아트 스페이스에서 8월 10~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