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을 손쉽게 그려내는 이를 요즘 말로 ‘금손’이라고 부른다. ‘금손’을 만나면 늘 따라오는 질문이 “태어날 때부터 그림 잘 그렸어요?”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 물어야 할 타고난 재능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재주가 아니라 그림을 끝없이 그리고 싶어 하는 욕구가 아닐까?
일상 속 주변 사물이나 사람, 풍경을 포착하고, 가장 그림으로 담고 싶은 부분을 빠르게 캐치해 숙련된 필치로 담아내는 일은 실제로 신묘한 재주다. 하지만 대부분 숙련의 산물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그리며 생각할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사진과 다른 그림의 매력을 믿는 이들이 바로 회화 작가다.
무더운 여름,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보는 것도 좋은 피서법 중 하나다. 시원하게 일필휘지로 그려진 드로잉과 회화 작업을 서울 창성동의 갤러리 팩토리에서 만나보자. 수없이 많은 드로잉을 지속해온 엄유정 작가는 자신이 이끌어온 회화/드로잉 작업 백여 점을 모아두고 이들 중 전시 공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들을 골라 전시에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커다란 집게에 매달린 그림들부터 저마다 크기와 재질이 다른 종이와 캔버스가 각 벽면에서 재밌는 리듬감을 만들며 설치됐다. 전시 제목처럼 엄유정의 그림에는 그가 좋아하는,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순간들이 선택적으로 담겼다. 도쿄에서 우연히 발견한 식물,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피아노 치는 모습, 미국의 어느 사막부터 망원동 빵집의 빵까지. 좋아하는 것의 특히 좋은 부분에 집중해 불필요한 부분은 충분히 배제하면서 그려진 그림은 온전히 그가 곁에 두고 싶은 그림이 된다.
실제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치타나 호랑이, 여행을 통해 잠시 들른 타국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린 이유다. 한결같이 자신의 내면을 따라 좋아하는 것, 곁에 두고 보고 싶은 것들을 그려왔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힘을 뺀 그림들이 직접 만나본 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엄유정은 작가 노트를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연습의 과정에 있다. 그것은 물감을 쌓아올리고 뭉개뜨리고 다시 쌓는 것 사이에서 만나는 지점이다. 과거의 그림에서 다음 그림의 색과 형태에 대한 힌트를 찾기도 하며, 이를 토대로 작업은 더 과감해지거나 더 심심해지거나 아니면 전혀 미궁으로 빠져버리기도 한다.”고 자신의 작업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작가는 드로잉 북 6권을 전시장에 비치했다. 전시장 내 작품들의 모티프가 됐을 법한 드로잉부터 역동적인 사람의 형상을 빠르게 캐치한 드로잉까지 상당양의 드로잉이 그의 평소 작업량을 짐작케 했다. 이렇게 연습한 드로잉은 실제 작품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빠르고 거침없는 선으로 탄생한 그의 회화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특유의 강렬한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드로잉 북과 작품들, 전시의 설치 방식 모두 그가 그림을 어떻게 즐기고 훈련해왔는지를 완결성 있게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팩토리가 지난해 진행한 전시, 워크숍, 강연 프로젝트 ‘프랙티스(Practice)’에서 파생됐다. 미술작가의 실기 과정을 영어로는 아트 프랙티스(art practice)라고 말한다. 프랙티스(실천, 습관, 연습)는 작품을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작가 스스로의 수련 및 예술 실천 과정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다시 말해 작업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것을 만들어가기 위한 끊임없는 실천의 과정을 뜻한다.
4개의 전시로 구성된 올해의 전시 프로그램 ‘Practice Series 2016: Making is Thinking' 시리즈(사진작가 김형식, 타이포그라퍼 이경수, 건축가 김대균, 회화작가 엄유정)에서 마지막 차례로 엄유정은 회화작가로서 회화작업과 회화 설치의 ’프랙티스‘를 전시의 형태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책 표지나 잡지의 일러스트로 만나본 독자라면 특히 이 전시가 반가울 것이다. 전시는 8월 1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