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호 김금영 기자⁄ 2016.08.12 11:44:05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처음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이었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들이 한데 뒤엉켜 춤을 추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화면에서는 피를 흘리며 다소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의 흑인 한 명을 여러 사람들이 들고 가는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보였다.
고개를 돌려 다른 화면을 보니 이번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이 얼굴을 가린 사람들에게 희롱당하는 모양새다. 한쪽 가슴이 떼어져 나갔고 귀를 막고 있는 아이의 모습도 눈에 띈다. 모든 화면들이 평범함과는 절대적으로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동떨어진 이야기 같았다. 섬뜩했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 화면들이 모두 일부러 과장한 것이 아닌, 그리고 또 다른 가상의 세계의 이야기도 아닌 ‘현재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직접 발견한 광경’이라고 말했다. 청담동에 새롭게 자리를 튼 초이앤라거갤러리의 개관전을 통해 영국에서 주목 받고 있는 신진 작가 데일 루이스(Dale Lewis)가 국내에 첫 소개됐다. 벽면을 꽉 채운 5개의 대규모 회화 작품이 한 공간에 전시된다. 초이앤라거갤러리 측은 “작가의 작업을 보자마자 직접적이면서도 순수하기까지 한 작가의 세계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진지한 그가 그리는 세상이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자신을 영국의 중산층 워킹클래스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그린 화면 속 이야기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고.
“저는 영국 동부 쪽 도시 레이튼에서 살았어요. 저는 중산층 노동자 계층의 삶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서 이들의 삶을 항상 접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중산층 워킹클래스의 삶은 그야말로 희극과 비극이 공존하는 블랙코미디였어요. 사회의 어두운 이면도 읽혔죠.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비판하려 꺼내 놓은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수면 위로 꺼내놓아서 함께 공감하고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죠.”
아름다운 것만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또한 당신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알려주는 것. 한국인은 ‘신사의 나라’ 영국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환상이 있다. 아름다운 거리에서 품위 있는 사람들이 “굿모닝” 하고 인사를 건넬 것만 같다. 하지만 실제의 영국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발전의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범죄·마약
우아함 꿈꾸지만 존재하는 냉혹한 현실
작가가 일어나서 거리를 걸으면 알코올 중독자가 늘 보였다. 학원폭력도 일상이었다. 도시는 겉으로 봐서는 발전을 거듭하는 것 같지만, 부유한 계층이 사업을 확장시켜 꾸준히 재산을 축적하는 반면, 그 이면엔 폭력, 범죄, 마약 등 냉혹한 현실이 존재했다. 사람들은 이런 사회적 문제들을 추상적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직접 이를 목격한 작가에게 이 냉혹함은 허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작가는 자신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광경들을 기억했다가 그림을 그린다. ‘호프 스트리트(Hope Street)’는 약 20년 전 작가가 거리에서 본 풍경이다. 길거리에서 사나운 투견을 기르는 사람이 있었다. 이 투견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뇌가 압축돼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거리는 투견의 폭력 탓에 공포에 질리는 현장이 됐다. 그런데 그 강렬한 느낌이 작가에게 영감을 줬다. 공포에 미칠 지경인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욕망은 존재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화면 한가운데 욕망이 가득해 보이는 여성을 넣고, 투견의 공격성까지 더해 원초적인 도시 풍경을 연출했다.
이 그림의 구도는 피렌체의 궁정화가 브론치노의 ‘큐피드, 어리석음과 세월’에서 비롯됐다. 기존 우아하고 고혹한 자태를 뽐내던 비너스가 작가의 화면에서는 욕망이 가득한 여성으로 대치됐다. 머리로는 우아한 이상을 꿈꾸지만, 정작 실제 처한 현실은 처절하고 또 잔인하다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부처스(Butchers)’는 학원폭력에 희생된 아이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칼에 찔려 죽은 아이를 여러 사람들이 쳐다보는 광경이었다. 작품명인 부처스는 이런 사람들의 시선을 담은 ‘바라보다’는 뜻, 그리고 영국의 ‘푸줏간’을 뜻하는 이중 의미다.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노출되는 소년의 몸은 푸줏간에 전시된 고기와 다를 바 없는 잔혹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림에 등장하는 빨간 스트라이프 또한 영국 가난한 동네의 푸줏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시된 고기처럼 사람들에 의해 끌려 나가는 소년의 모습이 섬뜩하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파티를 즐기러 가는 모습 같기도 한 이중성이 화면에 존재한다.
이 이중성은 ‘성지(Shrine)’에도 등장한다. 이 작품 또한 영국에서 학원폭력으로 희생된 다른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런데 슬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자면 ‘부처스’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무언의 계급 차이가 드러난다고나 할까. 어느 도시든 존재하는 부자동네의 사립학교에서 한 소년이 죽자 친구들이 슬퍼했다. 그런데 이들은 고급 교복을 입고,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있다. 거의 헐벗은 ‘부처스’ 속 인물들과 상황은 비슷해도 느낌은 사뭇 다르다.
“어느 도시든 부자동네가 있기 마련이죠. 제가 사는 곳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부자동네 한구석에는 찢어질 듯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었죠. 두 블록만 걸어가면 바로 분위기가 확 바뀌었어요.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두 풍경이 한 동네에 공존했습니다.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양극화죠.”
과장된 화면?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로테스크
‘피노 그리지오(Pinot Grigio)’는 이런 소비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영국의 금융가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삶은 화려하다. 고액 연봉의 이 여성들은 명품 백과 옷으로 치장됐다. 그런데 힘든 일을 끝내고 고급 와인을 마시며 스트레스를 푸는 이들의 모습이 작가의 눈에는 블랙코미디로 보였다. 밤새 술을 마시다 새벽에 전철이 다니기 시작할 때 비틀비틀 넘어지는 모습은, 화려해 보이는 낮의 삶과는 달리 오히려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비싼 명품 구두는 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고. 소비사회가 주는 허무함, 또는 박탈감을 그만의 방식으로 화면에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마더스 루인(Mothers Ruin)’은 유머러스하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에 가깝다. 이 또한 어두운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한 여인의 이야기다. 이 여인은 백만장자와 결혼해 매우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2008년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삶이 반전됐다. 임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셨고,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은 귀가 들리지 않거나, 눈에 문제가 생겼다. 정부에서 아이들을 데려갔고, 이 여인은 자살 시도를 했다. 작가의 어머니가 이 여인을 돌봤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가져온 혼란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어요. 그 가운데 알코올 중독도 문제가 됐죠. 작품명인 ‘마더스 루인’은 빅토리아 시대 때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던 와인 상표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여성들이 애들을 팔아 와인을 살 정도로 사회적 문제로 야기될 만큼 심각했죠. 그 단면을 다룬 작품이에요.”
작가가 그린 것은 그가 보고 경험한 영국 도시 이야기다. 작가는 “한국 관람객들이 이 이야기들을 이해할지 나도 궁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원폭력, 알코올중독, 소비 양극화 등의 문제는 영국만이 처한 게 아닌, 바로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현실이다. 그래서 그가 그린 화면은 그냥 한 번 쓱 보고 지나칠 수가 없다. 바로 창문 밖 현실이기에.
무더운 여름, 더위를 피하기 위해 납량특집 드라마나 호러 영화를 찾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이중성과 부조리함,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그 속에서도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우리네 삶이 바로 가장 서늘하다. 그 서늘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포장하지도 않은 채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세상에 꺼내놓는 작가가 그릴 다음 화면이 궁금해진다. 전시는 초이앤라거갤러리에서 8월 2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