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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추천작가 ⑬ - 건국대 예정민] “뾰족한 세계를 풀어헤치니"

선단공포증 극복하며 개인에서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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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6호 김금영 기자⁄ 2016.08.12 10:40:36

▲건국대 현대미술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예정민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뾰족한 게 정말 무서웠어요. 작업의 시작은 거기부터였어요.”
'선단 공포증'이 있었던 한 소녀는 어린 시절 주사 맞는 날마다 늘 울상이었다. 공사장에서 사고로 한 인부의 몸에 대못이 박히는 걸 본 이후로 뾰족한 것을 보면 온몸이 떨렸다. 이 공포증이 심해졌다가 덜해지는 주기가 반복되면서 소녀는 점점 지쳤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방식으로 이 공포에 맞서기 시작했다. 바로 검정스타킹을 뜯어서 재구성하는 ‘해체’(2013, 2014) 작업을 통해서다.


건국대 현대미술학과에 재학 중인 예정민 작가는 어느 날 스타킹을 마구 뜯기 시작했다.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해된 스타킹은 목조 위에서 점토와 만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됐다. 이 작업에서 뾰족한 형태가 보이긴 한다. 하지만 본 재료의 정체를 아는 순간 이 뾰족한 형태는 아프게 찔릴 것 같은 공포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폭신폭신한 질감으로 다가온다. 보다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 이 작업은 공포라는 대상과 자신 사이의 경계점을 찾고, 이 경계점에 서서 공포에 맞서보려는 작가의 노력으로부터 시작됐다.


“공포는 저를 억압하는 심리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억압을 느끼는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해봤더니 문득 스타킹이 떠올랐어요. 한창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이자 혼란이 많은 중학생 때 교칙에 따라 입어야 하는 스타킹이 제게는 억압으로 느껴졌었거든요. 남자 아이들처럼 바지도 허용되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도 여학생들은 이 검정스타킹을 신지 않으면 혼났죠. 한창 공포라는 억압된 심리를 생각하던 찰나, 이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올랐어요. 그래서 저를 억압했던 이 매체를 해체하면 해방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서는 저를 옭아매는 공포에도 직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예정민, '해체'. 석고 붕대에 스타킹, 190 x 166 x 96cm. 2014.

작가의 손을 통해 스타킹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작품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하게 됐다. 억압의 매체에서 창조적인 매체로 재탄생한 것. 이를 통해 선단 공포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다. 그래도 작가는 해체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걸 발견했다. 집에서 고장 난 컴퓨터나 라디오가 있으면 그걸 해체하는 데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 행위는 이분법적으로 나눠지는 세상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반항심이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초창기 작업, 즉 개인적인 공포의 범위에서 벗어나서 좀 더 시야를 넓혀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작가의 태도가 드러나는, 본격적인 두 번째 작업의 메인 테마이기도 하다.


분명 존재하지만 하나하나 포착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들을 해체하니 이렇게 다양한데?


▲예정민, '스테어웨이 투 에레혼(Stairway to Erehwon)'. 싱글 채널 비디오, 00:11:31. 2013.

해체와 이분법이 무슨 상관이냐고? 예컨대 작가에게 억압을 줬던 스타킹은 교칙에 따라 단정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을 구분하는 매체로 쓰였다. 하지만 작가는 스타킹을 해체함으로써 이 경계를 없애버렸다. 꼭 스타킹뿐 아니라 세상은 ‘기다 아니다’식 흑백논리를 강요하는 때가 많다. 수많은 빛의 레이어를 지닌 무지개의 색도 7가지라고 규정짓곤 한다. 하지만 작가의 눈에 그렇게 단순히 구분하기엔 세상은 너무나 많은 색깔을 갖고 있었다.


“세상은 수많은 레이어로 구성돼 있어요. 저는 그 레이어 중 어느 한쪽에 서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경계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더욱 해체 작업에 몰두하게 된 이유이기도 해요.”


▲예정민, '혼신을 위하여'. 혼합 매체. 2014.

최근에 가장 열심히 해체하는 건 시간. 시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밤에 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는 어느 날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고.


“우리가 지구에서 보는 별빛은 지구로부터 몇 억 광년 떨어져 있잖아요? 그 빛이 지구에 도달하기까지는 정말 수많은 시간이 존재하겠죠. 별의 위치에 따라 시간의 차이도 있고요. 그런데 그 수많은 시간의 레이어들을 과거, 현재, 미래 딱 세 가지의 경계로 이야기하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어요.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경계엔 우리가 인지도 못할 정도의 찰나의 시간들이 있죠. 그 시간들까지 쌓여서 현재를 구성하는 거잖아요? 인지 못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시간의 단면들을 포착해서 재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예정민, '썸띵 인비지블(Something Invisible)'. 낚싯대, 낚시줄, 나무, 모터, 알루미늄. 2015.

초창기 작업 땐 설치 작업이 대부분이었는데, 시간을 해체하는 근작은 영상 작업 위주로 이뤄졌다. 영상 작업의 본격적인 시작은 ‘스테어웨이 투 에레혼(Stairway to Erehwon)’이다. 대학로의 한 미술관 나선형 계단 꼭대기에서 촬영한 작업이다. 영상에는 수많은 시간들이 교차한다. 작가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이 화면 여기저기에 각각 펼쳐진다. 그렇게 무수한 시간이 교차되다 보니, 정작 그 공간은 어떤 명확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 의미를 노웨어(nowhere)를 거꾸로 쓴 에레혼(Erehwon)에 담았다.


‘앳 댓 타임 앳 더 타임(At that Time At the Time)’은 쇠구슬이 굴러가는 영상이다. 그런데 평범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쇠구슬이 굴러가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을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리고 쇠구슬이 떨어지는 지점을 기점으로 수많은 프레임들을 하나하나 잘라서 재구성했다. 쇠구슬이 굴러가기 시작한 과거와 굴러가는 현재와 떨어질 미래의 시간까지 복합적으로 뒤섞이면서 수많은 시간들이 교차한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로 딱 구분지어 이야기할 수 없는 시간이 이 작품에 형성된다. 단 하나 명확한 것은 있다. 끊임없이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


초기 설치 작업부터 근작 영상 작업까지
해체와 재구성에 집중


▲예정민, '앳 댓 타임 앳 더 타임(At that Time At the Time)'. 싱글 채널 비디오, 00:01:26. 2016.

‘썸띵 인비지블(Something Invisible)’은 아버지와 낚시를 갔다가 느낀 영감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이다. 작업에도 낚싯대 모양의 설치물이 눈에 띈다. 낚시를 하다가 입질이 올 때 제대로 된 타이밍에는 물고기가 딸려 나오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분명히 낚시 바늘 근처에 존재했을 물고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처럼 존재가 분명하지만 차마 다 포착할 수 없는 느낌이 작가에게는 시간의 존재와도 연결됐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이 매순간 흘러가지만 분명히 있는 시간들. 그 존재를 작가는 세상에 다시 끄집어낸다.


각각의 작업들은 형태가 매우 다양해서 통일성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해체’와 그것을 통한 ‘재구성’이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인 선단 공포증을 해체하는 것부터 시작된 작업은, 이제 더 다양한 세상의 일면을 보고자 경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발전했다.


▲예정민, '모스 부호(Morse Code) SOS'. 싱글 채널 비디오, 00:00:55. 2016.

“작업 주제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즉 일상에서 발견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처음엔 억압된 감정과 저 사이의 경계를 찾으려 했고, 그 경계를 찾다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계에 관심이 가게 됐고요. 거기에 시간도 있었어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있죠. 이 시간에도 숨어있을 많은 이야기를 함께 찾아내고 교류하고 싶었어요. 그걸 풀어내는 과정이 쉽지 않아 슬럼프에 빠질 때도 있긴 해요. 하지만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면서 제 생각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희열 또한 커요. 앞으로도 꾸준히 다양한 해체 작업을 하고 싶어요.”


해체의 사전적 의미는 ‘단체 따위가 흩어짐’ ‘체제나 조직 따위가 붕괴함’ 등으로, 완전한 어떤 하나의 존재의 끝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해체는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존재의 새로운 일면을 이끌어내는 또 다른 시작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과의 반가운 인사를 위해 그의 해체 작업은 오늘도 시작된다.


▲예정민, '대못과 대못'. 2014.


[박지훈 현대미술학과 교수 추천사]
“15% 오류범위 지나친 100%의 보석”


▲박지훈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현대미술학과 교수.

1년 이상 학생들을 바라보면 직관이 만들어 내는 선입견 같은 것이 생긴다. 아티스트로서의 그리고 교수로서의 경험치를 바탕으로 “저 친구는 아마도 50정도일 것이다”라고 판단하면 평균적으로 85% 이상 그 판단이 들어맞는다. 하지만 85%의 확률이 미처 돌보지 않은 15%의 오류가 항상 나의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그 15%의 오류의 범위 안에는 놓쳐버린 반짝 거리는 보석들도 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석들도 섞여 있다.


예정민을 처음 수업에서 만났을 때 나는 확신을 가지고 이 사람이 재능과 열정이 있는 미술학도라 생각했다. 매우 드물게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심리적 편린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과도하지 않게 그것들을 작업으로 표현해 냈다. 그녀의 눈빛과 손의 온도는 그 이후에도 어김없이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냈고 나는 나의 85% 적중률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가 놓쳐버린 15%를 발견한 것은 최근에 와서다. 모범생으로만 여겼던 예정민이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어디에선가 길을 잃은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엔 나의 어리석은 15%의 오류를 나 스스로 질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완벽할 것만 같았던 ‘모범 미술학도’의 짧은 방황을 관망하면서 그녀의 한 단계 더 성숙한 모습을 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예정민은 자기가 믿어왔던 신념과 재능을 회의(懷疑)할 줄 알았고 자신의 현재의 좌표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 했다. 예정민을 추천한다. 100%의 확신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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