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게 빚은 만두나 야무지게 싼 나그네의 괴나리봇짐처럼, 둥글게 감싼 것들에는 어딘가 애틋한 감상이 묻어 있다. 보따리처럼 무엇을 감싼 것들은 그 속의 내용물이 무엇이건 어느새 이미 떠날 채비를 마친 것처럼 다소곳하게 저 먼 곳을 보고 있지 않은가. 둥근 직물 꾸러미를 트럭에 쌓고 어디론가 계속해서 이동하는 퍼포먼스 비디오 ‘보따리 트럭’ 속 작가 김수자는, 바뀌는 풍경들 가운데 등을 보이고 미동도 없이 가부좌를 튼 채 앉았다. 작가는 그때부터 보따리를 통해 침묵과 무위(無爲), 명상의 태도로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론적 질문을 지속해왔다.
‘보따리 작가'의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6: 김수자 - 마음의 기하학’이 7월 27일 개막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진 작가의 개인전을 현대자동차가 지원하는 장기 연례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지난 30년간 회화와 일상 사물로 현대미술의 창작 방식 그리고 행위, 이민, 망명, 폭력과 같은 사회적 쟁점들을 탐구해 온 김수자는 이번 전시에서 신작을 포함한 작품 9점을 공개한다. 활발한 해외 활동에 비해 드물었던 그의 전시 소식에 전시장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수평과 수직의 균형 - 마음의 기하학
입장 대기 줄을 벗어나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지름 19m에 달하는 거대한 테이블을 맞닥뜨리게 된다. 테이블 위엔 이미 많은 관람객이 만들어 놓은 찰흙 공들이 마치 우주를 연상시킨다. 신작 ‘마음의 기하학’은 관객 참여형 워크숍으로, 관람객이 찰흙 덩어리를 구(球)형으로 만들도록 유도했다. 두 손 위에 찰흙을 얹고 양팔을 돌려가며 둥글게 만든 이 공은 몰입을 담은 마음의 보따리가 된다. 테이블에 놓인 수많은 찰흙 공들은 관객 저마다의 정념을 담아 드넓은 테이블 위에 별처럼 남았다.
공처럼 둥글게 만들기 위해 두 손 위에 올려 비비고 돌리면서 찰흙을 치댈 때면, 오로지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8자를 그리면서 양손을 왔다갔다 둥글게 굴리는 태극권처럼, 작가는 의식에 가까운 행위를 유도하며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이끌어낸다. 제목의 ‘기하학’은 작가의 철학이 담긴 은유로, 수직과 수평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음과 양을 연결하는 역학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 얽힌 규범적 문제에 관해 작가의 사유를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수직과 수평을 그 자체로 정반대의 대립적 요소라고 여기지만, 김수자의 세계에서는 씨실과 날실처럼 서로 만나 유기적인 균형을 이룬다. 직물 문화의 퍼포먼스적 요소와 세계의 자연, 건축, 젠더 관계를 탐구하는 ‘실의 궤적 Ⅴ’의 새로운 챕터도 이번 전시에서 공개됐다.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에서 대나무 바구니를 짜거나 실을 잣고 천을 짜는 여성의 노동을 지켜보며 기하학적이고도 건축적인 여정을 담았다. 작가는 세계라는 직물을 짜고, 감싸고, 풀어내는 행위를 내러티브 없는 시각적인 시어로 풀어낸다.
빛과 숨소리 - 호흡
몸과 숨의 기하학적 탐구를 담은 작품들을 보고 전시장 밖을 나오면 김수자의 또 다른 야외 조각과 장소 특징적 설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오방색 띠를 두른 타원체 ‘연역적 오브제’는 ‘우주의 알(Cosmic Egg)’로 알려진 인도 브라만다의 검은 돌에서 영감을 받았다. 작품 하단에는 오브제를 반사시키는 거울이 설치돼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인식시킨다.
전시 마당을 둘러싼 유리벽에 특수필름을 설치한 ‘호흡’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업은 2006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 ‘거울 여인’으로 처음 발표된 뒤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다시 선보인 바 있다. 공간의 허공성을 건축물의 표면으로 확장하고 보따리의 개념을 빛의 언어로 비물질화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작가의 초기 명상의 결정체를 보여준다. 빛과 숨소리 등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끌어들여 그의 바람이 형상화된 공간을 이룬다. 그의 바람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것', 혹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소유와 자유를 갈망하며 무위의 예술을 지속하는 중이다.
작가는 그간 보따리에 많이 담는 것이 아니라 담음으로써 비워내는 과정을 실험해왔다. 김수자를 상징하는 보따리의 정체는 사실 누군가 사용했던 이불보다. 작업 초기에 할머니의 이불보를 발견하며 이불보를 자신의 캔버스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내 바늘과 실은 그의 붓이 됐다. 사람이 눕거나 덮고 자며, 그 위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여행을 목적으로 물건을 싸매던 이불보. 그것은 작가에게 이주와 정착이 교차하는 유목적인 삶을 뜻했다. 전시는 2017년 2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