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현 시대의 신파극은 싫다. 본래 신파극은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를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을 뜻한다. 그러나 요즘은 뻔하디 뻔한 막장 코드나 억지 울음을 쥐어짜는 극을 풍자하는 의미로 흔히 쓰인다. 예컨대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이 등장한 드라마 ‘함부로 애틋하게’는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흐름으로 “그저 그런 신파극이 됐다”는 비판 또한 피하지 못했다.
문화 기자로서 공연 편식을 하면 안 되지만 공연을 볼 때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하게 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되도록 밝은 느낌의 공연을 주로 찾아봤었다. 연극 ‘안녕, 여름’도 이런 생각에서 찾았다.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줄거리를 찾아봤을 땐 로맨틱 코미디 장르 같았다.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먼저인 결혼 6년차 부부 태민과 여름이 주인공이다. 태민은 사랑이 귀찮기만 하고 여름은 여전히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 부부를 중심으로 연애가 어렵기만 한 남자 동욱과 세상에서 연애가 제일 쉬운 여자 란, 마지막으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꽃중년 조지까지 저마다의 매력을 지닌 5명이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소개돼 있었다. 그래서 영화 ‘러브 액츄얼리’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처럼 다양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나 보다 하는 편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처음엔 생각대로 공연이 흘러갔다. 예상보다 등장인물들이 더 사랑스럽기는 했다. 웃음 코드도 만연했다. 소극장 무대라 배우들의 얼굴 표정이 하나하나 다 보이는데 특히 태민 역의 김도현과 여름 역의 최주리의 케미가 돋보였다. 아내 여름이 여행 간다고 잠시 나간 그 사이에 란을 사진 촬영 핑계로 집에 끌어들여 수작을 부리다가 여름이 짐을 잊고 나갔다며 다시 돌아오자 미친 듯 당황하는 태민. 힘든 부부관계에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면서도 남편 태민과 재미있는 사진 촬영을 이어가는 여름까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두 배우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설현의 유명 포즈를 취하는 여름의 모습은 특히 압권이다.
란 역의 김두희와 동욱 역의 김기수도 풋풋한 사랑을 보여준다. 앞선 두 배우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부부로서의 케미를 보여준다면, 이들은 젊은 느낌의 보다 화끈한 사랑을 보여준다. 동욱의 순애보와 그런 동욱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다시금 동욱을 찾게 되는 란의 모습은 특히 10~20대 젊은 커플이 공감하고 환호할 만하다. 이들은 동욱과 란 역할 이외에도 안마 치료사, 청소부 등 다양한 역할로 등장해 웃음을 선사한다. 조지 역의 조남희는 그야말로 신스틸러다. 신체는 남자이지만 여자의 마음을 가진 그는 시종일관 독특한 복장으로 등장해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란과의 기 싸움도 볼만하다.
그렇게 공연 초반부는 웃기에 바쁘다. ‘안녕, 여름’의 웃음 코드가 특히 매력적인 이유는 억지스러운 상황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웃음을 만들기 때문이다. 한 예로 건강을 위해 늘 당근차를 만드는 여름과 이 당근차의 요상한 맛에 마시자마자 뱉어내는 남편 태민의 표정에 관객은 폭소한다. 그런 태민에게 이어지는 여름의 잔소리와 이를 피해 다니는 태민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공연장 곳곳에서 “당신이 저래” 하는 목소리가 은근 들린다.
양말 줄줄 흘리는 모습에 “당신이 저래” 웃었던 관객들
일상 속 소중한 사랑 깨달았을 때 눈물이 줄줄
그런가 하면 여름은 깔끔하게 정리정돈을 하는 성격인데, 여름이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집은 폭탄을 맞는다. 태민은 발가락으로 옷을 집어 올리고, 빨래해 온 세탁물들을 구겨진 채 둘둘 말아 접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남자 관객들이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꼭 달달한 상황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슬럼프에 빠져 사진을 찍지 못하는 태민을 걱정해 여름이 이야기를 꺼내지만 자존심에 상처 입은 태민은 큰소리를 내고 만다. 관계 회복을 위해 여름이 여행을 가자고 하자 태민은 대뜸 “내 밥은?”이라고 되물으며 그야말로 무뚝뚝한 남자의 표상을 보여준다. 서로 간의 오해가 생겨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화해하기도 하고, ‘안녕, 여름’은 그런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담담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 사랑스럽기만 했던 극이 점점 흐르면서 뒤통수를 치기 시작한다. 초반에 웃었다면 후반엔 메이크업 걱정을 해야 한다. 진짜 간만에 코끝이 아플 정도로 눈물을 참아본 것 같다. 여름이 떠났던 여행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던 것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인물들 사이의 갈등도 극대화된다. 사진을 찍지 않고 술만 마시는 태민을 지켜보던 제자 동욱은 “이젠 좀 그만하라”며 스승이 올바른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 와중 란은 또 다시 동욱의 순애보에 상처를 주고, 이를 봉합하기 위해 조지가 나선다.
인물들의 갈등이 극대화 되고 점차 풀리면서 극은 “지금 당장 당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 말하라”는 메시지를 향해 나아간다. 평범하고 쉬울 것 같지만 정작 익숙한 것은 잃어버려야 안다고, 이것 하나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던 관객들이 눈물을 훔친다. 꼭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 친구 사이의 관계에서도 공감할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 자체는 특별할 것 없이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랑하고, 싸우고, 오해를 풀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뻔할 것 같은 스토리 라인에 일상을 녹여낸 공감 가는 대사 하나하나, 그리고 이 대사에 생명력을 불어 넣은 배우들의 활약이 이 극을 ‘뻔한 신파극’이 아닌 심장을 들었다 놨다, 웃기고 울리는 또 다른 의미의 심쿵극으로 만든다. 여기엔 반전도 숨어 있다. 그리고 화려하지 않은, 심플하게 구성된 무대 세트와 조명 또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극이 모두 끝나고 다시 한 번 심쿵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배우들이 끝마무리 인사를 할 때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이고 코끝이 빨개진 채 극 속의 태민, 여름, 란, 동욱, 조지로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소극장에서 이뤄졌기에 더욱 느낄 수 있는 감동이다.
‘안녕, 여름’은 드라마 ‘워터보이즈’와 연극 ‘뷰티풀 선데이’로 알려진 일본의 극작가 나카타니 마유미의 ‘디스 타임 잇츠 리얼(This Time It's Real)’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지난 10년 동안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제작됐는데, 올해 국내에서는 뮤지컬 중심 콘텐츠를 개발해 온 공연 전문 제작사 알앤디웍스가 연극으로 제작했다. 국내 연출은 오루피나가 맡았고, 최종윤 작곡가와 박연주 무대디자이너가 뭉쳤다.
원작자인 나카타미 마유미는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능한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글을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오루피나 연출은 “점점 시간이 빨리 가면서 잊어버리는 기억 중 슬펐던 기억이 많다. 그런데 그 슬픔이 잊히지 않고 더욱 또렷이 생각난다면 얼마나 버티기 힘들까. ‘안녕, 여름’은 그런 슬픔뿐 아니라 누구나의 인생 켜켜이 녹아 들어 있는 행복과 희망, 감동을 함께 그리며 공감하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어머니가 늘 차려주는 아침밥과 퇴근길에 붕어빵을 사 오는 아버지, 늘 다투기 바쁜 형제자매 등 일상 속 너무나 당연하게 익숙해져 버린 존재들의 일부다. 하지만 그 소중함을 당연하게만 여기지 말라고, 한 번 흘러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 동안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고 또 이야기해주라고 ‘안녕, 여름’은 계속해서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다. 공연은 유니플렉스 2관에서 10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