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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커버작가 공모 ④ 전주연] 무의미의 세계에서 '감히' 의미 마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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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2호 윤하나⁄ 2016.09.23 17:41:57

▲전주연, '아나바시스 - 더 져니(Anabasis - The Journey)'. 유토, 흑연, 탁자, 가변 크기(세부사진). 2015. (사진 = 전주연)

 

완벽한 의사소통은 꿈처럼 아득하다. 매일 말과 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지만 언제나 미숙하고 힘든 것이 바로 언어다. 한국 안에서도 말 때문에 신경 쓸 일이 한 둘이 아닌데, 말이 다른 외국에서는 오죽할까. 타국의 낯선 언어와 문화에 맞닥뜨려 살다보면 말이 주는 스트레스는 그 강도를 더하기 마련이다. 오랜 해외 체류 끝에 전주연 작가는 한국에 돌아와 그길로 미술을 시작했다말이란 장벽에 늘 맞닥뜨렸던 경험 때문에 택한 미술에서 다시 말의 의미를 고민하는 전주연 작가를 만났다.

 

▲전주연 작가. (사진 = Bohemio)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얇고 가느다란 말들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두 점 사이를 잇는 말의 포물선을 시각화한 긴 몸을 가진 말의 행적은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전주연의 초기작이다. 작가는 대화란 두 사람 사이에서 탁구공이 떨어지지 않고 라켓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쇄기로 잘라낸 종이 위에는 무수히 많은 화살표와 글이 담겼다. 어떤 대화는 느슨하며 또 어떤 대화는 팽팽하게 긴장감을 주고받는다. 마치 카페에 앉아 웅성거리는 소리의 근원을 파악하듯,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대화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작가가 작품에 쓰는 언어는 모두 영어다.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사용해도 되는데, 굳이 영어를 쓰는 건 어쩌면 여전히 극복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제가 극복하려는 대상은 언어 그 자체인데, 특히 영어는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더 그런가 봐요.”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던 전주연은 어느 날 홀연히 돌아와 미대에 진학했다. 현재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할 거 다 버리고 갑자기 미술이 하고 싶었어요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논리로 가득한 말의 세계를 탈피해 감각적인 방식으로 근본에 다가가고 싶었다고 말이다. 이런 이유로 시작된 그의 작업들을 지켜볼 때면, 작가가 오랜 시간 고민하며 최대한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쓴 문장처럼 느껴지곤 한다. 금세 휘발되거나 오해와 후회를 야기하는 말이 아니라 온전히 정수를 담은 말만 남긴 듯 간결하다. 그는 언어를 극복하기 위해 표피적인 언어를 벗겨내고 오해와 갈등이 없는 의미의 진수를 발견하길 시도한다고 말했다.

 

▲전주연, '긴 몸을 가진 말의 행적'. 종이 위에 연필, 240 x 100cm. 2014. (사진 = 전주연)


텍스트의 표면에서 의미 길어 올리기

 

작가는 언젠가부터 작업실에서 유토를 조금씩 떼어내 매일같이 종이의 텍스트 구멍 아래 흑연을 깔고 그 위에서 유토를 굴렸다. 연필로 쓴 글자를 지우개로 지우다가 지우개똥이 뭉치는 것을 보고 시작된 이 작업을 매일 놀이처럼 지속했다. 지우개로 뭉쳐진 글자나 유토가 끌어올리는 글자 모두 흑연으로 끌어올린 텍스트의 정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의 제목 '아나바시스(Anabasis)'는 그리스어로 해안에서 뭍으로 올라오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작가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온다는 아나바시스의 의미가 마음에 들었다. 아래에서 위로, 가슴 속에서 입 밖으로 떠오른 말의 의미가 더욱 진실에 가깝다고 느끼며, 언어의 바다 위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과정을 수행처럼 반복한다. 그렇게 텍스트가 올라붙은 공들이 모여 하나의 구(), 의미의 세계를 이룬다.

     

구를 반으로 자르면, 유토가 텍스트 위를 구른 궤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자르기 전까지는 하나였지만 그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면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에 관해 작가는 국내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모두 서로 다른 마음으로 다른 말들을 하지만, 구 안에서는 하나가 되는 그런 세계를 꿈꾼다고 말했다.

   

▲전주연, '아나바시스 - 온 더 텍스트(Anabasis - On the Text)'. 종이, 유토, 흑연, 비즈 왁스, 두 겹의 90 x 60cm. 2015. (사진 = 전주연)

 

의지와 의문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

 

작업 두 아이 데어?(Do I Dare?)'의 각목 양 끝에는 T.S. Eliot의 시에서 발견한 주저함과 대범함의 시구절이 자리했다. ‘Do I dare?(내가 할 수 있을까?)’'Disturb the universe?(이 우주를 한번 흔들어 봐?)‘가 쓰여 있는 나무가 양 끝에 꽂힌 각목은 뾰족한 돌부리 위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서있다. 작가는 주변의 작은 진동, 각목 자체의 비틀리는 성질만으로도 쉽게 무너져버리는 이 불안정한 조각에 대해 작가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말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워놓고 작업실을 나가기 전 몇 번이나 되돌아보며 텍스트가 잘 서 있는지 확인해도 다음 날 텍스트 나무는 작업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종이 표면을 긁거나 텍스트 표면 위를 유토 공으로 굴리던 작업은 모두 표면 속에 자리한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불안정함이란 숙명을 지닌 언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회의감도 때때로 느낀다. ‘두 아이 데어?(Do I dare?)'온 우주를 통달해 보겠다는 의지와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란 의문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작가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쉽게 무너지기도 하지만 기어코 서 있을 수도 있는 돌부리 위의 나무처럼, 작가가 발견해 나가는 의미의 세계는 어제보다 깊고 견고한 형태로 매일 새롭게 서 있을 것만 같다.


▲전주연, '두 아이 데어?'(Do I Dare?)'. 나무, 돌, 160 x 90cm. 2016. (사진 = 전주연)

▲전주연, '레이닝(Raining)'. 돌, 연필, 종이, 철, 유토, 가변 크기. 2016. (사진 = 전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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