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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칠레 푼타 아레나스] 헐렁~하게 짜야 겨우 맞는 남반구 여행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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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6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10.24 09:25:47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6일차 (칠레 산티아고 → 푼타아레나스)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착륙

리마발 산티아고행 란(LAN) 항공기는 자꾸만 출발을 늦춘다. 게이트를 바꾸기 여러 번, 1시간 30분 늦게 출발한 항공기는 도착예정 시각을 훨씬 넘겨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아침 7시가 넘어서 착륙했다.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행 항공기 출발 시각까지 공항에서 4~5시간 때우기로 한다. 산티아고 공항에도 한국이 압도한다. 삼성 대형 전광판에서는 가전제품과 모바일 광고가 번갈아 나오고 터미널 빌딩 바깥 택시 승차장에는 현대 쏘나타 차량이 고급택시로 둔갑해 손님을 기다린다.

푸른 눈의 란 칠레 스튜어디스

거의 여섯 시간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행 란 국내선 항공기에 오른다. 그곳에서 환승하면 드디어 남미의 가장 남쪽, 아니 지구의 가장 남쪽에 도착한다. 닷새 전 키토를 나와 쿠스코(Cuzco)행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리마 공항에서 밤을 샌 후, 지난 밤 리마-산티아고 야간 비행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정에서 가장 힘든 밤이 지났음에 안도한다.

항공기는 안데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만년설로 덮인 안데스 준봉들이 항공기와 어깨를 견준다. 그리고 그 사이 관개를 잘해 옥토로 가꿔 놓은 해안 평야가 펼쳐진다. 란 항공 스튜어디스들의 용모가 멋지다. 회색빛이 도는 푸른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다. 홀드 팝가수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노래로 유명한 ‘스패니쉬 아이즈(Spanish Eyes)’의 바로 그 푸른 눈이다.

산티아고 이륙 1시간 10분 후 푸에르토 몬트에 도착했다. 바람이 매우 거세 비행기가 출렁거리는 통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넓고 좁은 빙식(氷蝕) 피요르드만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마젤란 해협까지는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산티아고에서 푼타 아레나스까지 직항이었으면 좋으련만, 저렴하게 구입한 내 항공권 때문에 이렇게 여기서 두어 시간 쉬었다가 환승해야 한다.

공항 터미널 바깥으로 나가 공기를 쐰다. 바닷가라서 바람이 강한 것 말고는 영락없이 북위 50도에 해당하는 미국 캐나다 국경 부근 여름 날씨와 비슷하다. 바로 그 만큼의 햇살이다. 지구 가장 남쪽으로 가는 길은 이처럼 멀기만 하다. 이미 칠레하고도 남쪽 거의 끝에 왔는데 여기서 1300km를 더 내려가야 내 여행의 남쪽 꼭짓점에 도착한다. 어젯밤부터 거의 20시간째 계속되는 비행기 여행에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푼타 아레나스 거리를 거닐었다. 푼타 아레나스는 영어로 ‘모래곶(sandy point)’이라는 뜻이다. 사진 = 김현주

하염없이 연발하는 푼타 아레나스행 란 항공기

지금 시각 18시 55분. 17시 55분 출발 예정인 푼타 아레나스행 항공기가 기별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상악화. 산티아고에서 날아와 여기 잠시 기착 후 푼타 아레나스로 가는 항공기가 오지 않는다. 남미 특유의 불확실성, 불예측성을 어젯밤과 오늘 저녁 연거푸 경험한다. ‘아스타 마냐나(Hasta manana)’, 즉 기약 없는 헤어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스페인어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지루하고 고단하지만 언젠가는 오겠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어젯밤에도 결국 그렇게 해서 리마발 산티아고행 항공기는 떠나긴 떠났기 때문이다.

같은 칠레 땅이지만 여기서 푼타 아레나스는 육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항공기 혹은 선박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어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여기 사람들은 따지거나 항의하지 않는다. 하늘이 길을 열어 주지 않는다는데 무슨 항의가 소용 있겠는가? 빠듯한 일상을 쪼개고 또 쪼개며 바쁘게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관념이지만, 나는 결국 거대한 남미 대륙을 이동하며 체념 속에 이곳 문화에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당초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북반구 여행과는 달리, 조금씩은 여유롭게 짜놓았다는 것이다. 각박한 스케줄이었다면 지금쯤 애간장이 타고 있을 것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꽤 추워서 가방 바닥 깊숙이 넣어 두었던 긴팔 옷과 두꺼운 바지, 외투를 꺼내 입었다. 남위 50도의 여름은 이렇듯 황량하다. 그 사이 항공기 출발 예정 시각은 더욱 늦춰져서 예정보다 2시간 30분 늦은 저녁 8시 20분으로 바뀌어 있다. 그나마 그 시각에라도 출발해 준다면 좋으련만. 드디어 란 항공기가 도착했다. 내리는 승객들에게 물어보니 푸에르토 몬트 상공까지 왔다가 강한 바람 때문에 내리지 못하고 다른 도시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마젤란 해협. 1520년 섬과 섬들이 미로처럼 얽힌 바다를 빠져나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항로를 개척한 에르난데스 마젤란의 이름을 붙인 해협이다. 사진 = 김현주

백야의 남위 53도

남쪽 끝으로 항공기가 난다. 지금 시각 밤 10시지만 사방이 훤하다. 남위 50도의 여름 해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처럼 길고 길다. 안데스 산맥을 덮고 있는 구름바다가 장관이다. 푼타 아레나스는 냉대 툰드라의 척박한 땅이다. 칠레 공군과 함께 사용하는 푼타 아레나스 공항에는 전투기와 수송기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기나긴 비행 끝에 남위 53도,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닿으니 감개무량하다. 사실 진짜 남쪽 끝은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더 떨어진 칠레 푸에르토 윌리암스(Puerto Williams) 또는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Ushuaia)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알려진 푼타 아레나스를 편의상 남쪽 끝이라고 기억한다.

공항에서 택시로 시내 들어가는 길, 단층 주택들이 넓게 퍼진 시 외곽은 미국 서부 어느 마을을 연상시킨다. 여긴 영락없이 남미하고도 변방, 아니 지구의 변방이다. 백야의 저녁노을이 아주 힘겹게 해를 넘겨 보내며 너른 들판을 오랫동안 붉게 적신다. 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 이제야 어둠이 내렸다.

푼타 아레나스는 영어로 ‘모래곶(sandy point)’이라는 뜻이다. 인구 11만 6000명의 이 도시는 1848년에 생긴 이후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 전까지 발전했다가 쇠락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아르헨티나 우슈아이아(Ushuaia),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와 함께 남극대륙 관문으로서(남극대륙 해안까지 1418km) 각광받기 시작했다. 또한 포클랜드 전쟁 이후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로 연결이 끊긴 대신 칠레 푼타아레나스를 통해 외부 출구가 열려 있다. 피노체트(Pinochet) 군사독재 시절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17일차 (푼타 아레나스 → 푸에르토 나탈레스)

푼타 아레나스에서의 아침

상쾌한 아침이다. 호텔 아침 식탁에서 자동차 여행 중인 브라질 가족을 만났다. 내 여행에 관심이 많은 그들이 무슨 일로 푼타 아레나스에 오게 됐냐고 묻기에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가는 것과 함께 남쪽 끝 땅을 밟아보고 싶은 내 스스로의 기록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호텔을 나와 항구 쪽으로 걷는다. 

지구의 변방 이곳에도 아침은 활기차게 열린다. 한국 초겨울 같은 날씨가 막 비가 올 듯 축축하기까지 하니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항구에는 컨테이너가 제법 쌓여있고 트럭들이 오간다. 앞 바다에 마침 도착한 대형 크루즈 유람선에서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온다.

▲푼타 아레나스 항구가 보인다. 미국 대륙횡단 철도 개통과 파나마 운하 개통 이전까지 미국 동해안(대서양)과 서해안(태평양)을 잇는 중간 기착지로서 분주했다. 사진 = 김현주

마젤란 해협

바다 가까이에서 마젤란 해협(Estrecho de Magallanes)을 바라본다. 1520년 섬과 섬들이 미로처럼 얽힌 바다를 빠져나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항로를 개척한 에르난데스 마젤란(Hernandes Magellan)의 이름을 붙인 해협이다.

경위야 어쨌든 500년 전 나침반과 별자리에 의지해 선원들의 반란을 다스려가며 미로의 바닷길을 석 달 헤맨 끝에 태평양으로 빠져 나온 마젤란 항해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 해협이 아니었다면 배는 여기서 수백 킬로미터 남쪽 케이프혼(Cape Horn)의 더 험난한 남빙양(南氷洋)을 수천km 더 돌아야 두 대양을 이을 수 있다. 말이 해협일 뿐 생각보다 훨씬 넓다.

세멘타리오(Cementario) 공원묘지로 갔다. 묘지라기보다는 아주 예쁘게 꾸민 공원에 가깝다. 이 땅에 이민으로 들어와 살다 간 사람들의 크고 작은 무덤이 예쁘게 가꿔졌다. 역시 크로아티아계 슬라빅(Slavic) 이름들이 많다. 시내 중심에는 크로아티아(Croacia) 거리도 있다. 푼타 아레나스 인구의 50% 정도가 크로아티아계라고 하니 당초 크로아티아 이민자들이 많았던 것은 아마도 20세기 초에 번창한 양모 산업과 관련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푼타 아레나스 세멘타리오 공원묘지는 공원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민와 살다 간 사람들의 크고 작은 무덤이 예쁘게 가꿔졌다. 사진 = 김현주

▲아르마스 광장에 예쁜 상점들이 늘어섰다. 광장 중앙에는 마젤란 해협 항해 400주년을 맞아 1920년 건립한 마젤란 동상이 있다.

여기도 아르마스 광장

예쁜 상점들이 늘어선 시내 중심가를 걸어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에 닿는다. 이것저것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 가운데 달력도 파는 것이 우리와 비슷해서 반갑다. 광장 중앙에는 마젤란 해협 항해 400주년을 맞아 1920년 건립한 마젤란 동상이 있다. 마젤란의 손은 해협 쪽 어딘가를 가리킨다.

크루즈 유람선에서 쏟아져 나온 관광객들도 공원에 가득하다. 거리에는 해군 복장 남성들이 많다. 중요한 칠레 해군기지가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거리 악사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멋진 기타 솜씨로 연주하니 여기가 칠레 남쪽 끝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인근 해양 박물관에는 남미 각국 해군 활동과 해군 휘장이 전시돼 있고 파타고니아 항해 역사가 기록돼 있다. 쇠락한 항구의 거리들을 걸으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까지 보태져서 왠지 서글픔이 인다. 남위 53도의 여름은 이처럼 소박하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출발한 버스는 마을 하나 없는 광활한 대지를 3시간 달린 끝에 푸에르토 나탈레스(Puerto Natales)에 도착한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푼타 아레나스 북쪽 247km, 인구 1만 9000명의 소도시로서 양모 산업 번창에 따라 1911년 도시로 성립했다.

또한 울티마 에스페란사의 주도인데 ‘마지막 희망(Ultima Esperanza)’이라는 주 명칭은 마젤란 해협의 미로를 지나는 선박들의 마음을 상징한 것이다. 뒤로는(동쪽) 안데스, 앞으로는(서쪽) 태평양을 품은 아담한 항구 도시다. 이제 한국에는 없는 스텔라 자동차, 구형 쏘나타 같은 차량들이 잘 굴러다닌다. 

등산 준비 완료

내일 토레스 델 파이네 등반을 위해서 재킷과 등산바지, 등산화, 스틱을 렌트했다(30유로). 내일 등반 중에 먹을 음식과 마실 것을 시내 대형 그로서리에서 구입하니 준비 완료다. 밤 11시가 돼서야 겨우 해가 진다. 변방의 밤은 꽤 차갑다. 누추한 호스텔 방이지만 그래도 독방이다. 전 세계 유명 관광지 어디든 그렇듯 여기에도 유럽인 관광객들이 많다. 내 옆방은 바르셀로나에서 온 스페인 남녀, 건넌방은 프랑스인 부부다. 옆방 남녀들이 이베리아 본토 스페인어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낡은 합판을 뚫고 다 들려온다.

스페인어의 중요성

남미를 여행하며 스페인어의 중요성을 자주 느낀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으므로 남미 여행에서 스페인어는 필수다. 스페인 대제국이 남미 전역을 비롯해 전 세계에 퍼뜨린 스페인어는 오늘날 4억 5000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한다. 중국어 다음으로 모국어 사용자가 많은 언어다.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카리브해 지역 몇 개 작은 나라를 제외하고는 남미 전역, 아프리카 일부 지역까지 거대한 스페인어권이 형성돼 있다. 히스패닉 인구가 늘면서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스페인어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거대한 남미 대륙 전체가 정확하게 같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어가 들어온 후 500여 년 동안 토착 언어와 결합하거나 역사적, 지정학적 조건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스페인어 변종이 생겼다.

예를 들어 산중에 고립돼 바깥 세계와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에콰도르 같은 지역에서는 스페인어 원형이 잘 유지된 반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음운학적으로 가장 변종이 심한, 즉 가장 강한 억양의 스페인어 지역 방언으로 정착됐다. 페루, 볼리비아, 파라과이에서는 토착 인디오 언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브라질과 우루과이 국경처럼 스페인어권과 포르투갈어권 경계 지역에서는 융합어 포르투뇰(Portunol)이 나타나기도 한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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