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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현판.(사진=위키미디어)
정국이 '대통령의 비선실세'라는 한 여성으로 혼돈의 시기를 맞이한 한편, 문화계의 각 분야는 성추문 논란으로 또 다른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다. 성추행 및 성폭행 논란은 문화계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서 없었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주 웹툰 작가 이자혜가 미성년자 성폭행을 종용했다는 한 트위터 이용자의 고백은 문학 및 미술 등 예술계 전반에 걸쳐 각종 성폭력을 당했다는 엄청난 양의 고발이 이어지게 하는 촉발점이 됐다.
이번 사태 취재의 목적이자 결과를 미리 밝히자면, 현재 문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지난 5월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여성 인권의 문제 및 ‘메갈 논쟁’으로 이어진 ‘여혐 vs 남혐’이라는 국소적인 시각을 벗어나 사회 전반에 걸친 권력과 위계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자혜 작가 관련 사건이 드러난 이후 정확히 일주일이 흐른 현재, 해시태그(#) 문단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을 타고 이어지는 고백들은 각 분야 종사자에게 크고 빠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예술 전문 섹션 ‘다아트’(www.AAArt.co.kr)를 통해 미술 소식을 전해왔던 주간지 CNB저널은 문화계 중에서도 미술계에서 일어난 사태를 정리해봤다.
사례 - 독립 예술 공간부터 국립미술관까지
이자혜 미성년자 성폭행 방조 논란이 채 식기 전인 10월 21밤, 한 예술대학 여대생(@_Soma_Kim)은 온라인 필기장인 에버노트를 통해, 유명 사립미술관의 큐레이터 A가 자신에게 한 성추행 이야기를 털어놨다. 자신이 남자친구가 있다고 밝혔음에도 큐레이터 역시 "나도 여자친구가 있다"며 지속적인 만남을 요구해왔고, 학부생으로서 유명 미술관의 현직 큐레이터로부터 직접적인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만났더니 차 안에서 원치 않은 신체접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큐레이터 A씨는 온라인에서 빠르게 '일민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 함영준'으로 추측됐고, 뒤를 이어 '함 큐레이터에게 나도 성추행을 당했다'는 추가 고백들이 잇따랐다.
추가 고발 내용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증언은 술을 마시고 자다가 깨어보니 낯선 집에서 함 큐레이터가 자신의 속옷에 손을 집어넣는 등의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언론에 가장 많이 인용보도 됐다.
이어 10월 23일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최 모 큐레이터의 성추문 의혹이 제기됐다. 조 모 작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최 큐레이터를 지목하며, 자신의 전시 기간 중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공개적으로 초대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와 양심이 있다면 등장하라는 것이었다. 조 작가는 이날 미술계에 막 발을 들여놔 어리바리하던 자신에게 최 큐레이터가 “(내가 밀어준) 저 작가는 이제 미술관급 작가가 됐다”고 말했고, 작가끼리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억지로 입을 맞추고는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야, 지금 내가 너한테 같이 자자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등의 말을 했다고 밝혔다.
거론된 최 큐레이터는 기관을 옮겨 다닐 때마다 성추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뒤따르고 있으며, 이어 "도덕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가 뒤따르는 기획자가 어떻게 유력 국공립 기관의 큐레이터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함 큐레이터의 추문 의혹이 제기된 이후, 여러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며, 큐레이터의 위치를 갑으로 보고 작가를 을로 보면서, 미술계의 갑을관계로 해석하는 관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어진 SNS를 통한 고백 대열에는 여성 큐레이터들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미술 기자이자 독립 큐레이터를 하고 있는 L 씨의 경우, 갤러리 대표와 작가에게 각각 당한 성추행을 고백했다. 자신을 큐레이터라고 밝힌 또 다른 트위터 사용자는 추행당한 사실과 더불어 “일을 하며, 기득권 미술 관계자 남성들의 온갖 술자리에 불려 다녀야 했다"며 "그들이 저지른 성적 일탈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으며, 내 경험 역시 당연한듯 물어봤다”고 털어놨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미술계 종사자 여성들이 실명 혹은 익명으로 가해자를 지목하며 자신이 당한 추행 사실을 고백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SNS의 ‘#미술계_내_성폭력' 물결을 탄 고백 릴레이가 도착한 곳은 학교다. 이번 사태 초기에 함 큐레이터의 추행 사실을 고백했던 학생이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부터 홍익대학교를 비롯한 각 대학의 예술 관련 학과들은, 각각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과내의 교수 및 선후배 사이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고발하는 성토의 장을 펼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최 모 큐레이터를 초대하는 조 모 작가의 페이스북 글.
대처 - '잘못했다'와 '억울하다' 혹은 침묵
이자혜 웹툰 작가는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공개 고백을 인지한 이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몇 번의 변명을 반복하다가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를 했다. 함영준 큐레이터는 발빠르게 공개사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민미술관은 10월 25일 그의 책임 큐레이터 직을 해임시켰다고 발표했다. 이어 가해자로 지목된 대부분 남성 미술계 종사자들의 공개 사과문 릴레이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함 큐레이터는 성추행을 했다는 자신의 잘못은 시인하지만, 추가된 폭로 중 속옷에 손을 집어넣었다든가 하는 행위는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 중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야설 수준의 장광설을 올리기도 했다.
현재 미술계의 관심이 가장 쏠려 있는 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이다. 미술관 측은 “추문은, 언급된 큐레이터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하기 이전 기관에서 발생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며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한 후 관계 규정에 따라 엄정히 조치할 계획”이라고만 밝혔다. 이어 28일 현재까지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으며, 이에 정확하게 입장을 내놓으라는 온라인에서의 요구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반응 - 실체 드러낸 묵인의 그림자
이자혜 작가와 함영준 큐레이터의 사건이 미술계에 크고도 거친 반향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보다 이들이 미술계 안에서 젊은 세력을 형성하는 축인 것과 더불어, 여성주의적 입장을 공공연히 내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함 큐레이터는 영등포 사창가 근처의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 개조한 커먼센터의 운영부터 시작했다. 즉, 미술계의 변두리로부터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주요 미술관의 책임 큐레이터까지, 즉 변방에서 주류로 편입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기획력이나 미술계에 발굴되지 않은 젊은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했기에, 그에 대한 2, 30대 작가들의 실망감과 허탈함이 동반되는 형편이다.
이와 더불어, 지속된 고백 릴레이에서 이자혜 작가를 포함해 지목되는 가해자들 중에는 미술계의 젊은 세대를 이끌어가고 있거나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하는 작가들과 기획자들 그리고 예술 공간 운영자 등의 비율이 높아 보인다.
현재, 이번 사태는 최순실 씨 사태가 터진 이후 미술계 내부의 논의로만 좁혀진 듯하다. 초반의 반응은 ‘이렇게나 많을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한 다리 건너 아는 좁은 미술계에서 동료 혹은 지인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알고 대부분 공황상태를 맞은 것처럼 보였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태도는 반성이었다. SNS를 통해 드러나는 심경들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상황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목소리 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성별에 상관없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었다. 그간 이런 목소리가 없었기에 악습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며, 그 악습을 앞에서는 반대하면서도 뒤에서는 묵인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23일 함영준 큐레이터 규탄 시위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 일민 미술관.(사진=장지우)
해석 - '권력의 카르텔' 무너뜨리기
이번 문화-예술계의 추문 사태를 바라보며 몇 몇 언론과 그에 따른 의견들은 예술인들 특유의 개방적인 성문화에서 비롯된 사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들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부의 종사자들은 예술-문화계가 사회 집단의 표본으로서 불평등한 위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이라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좁은 사회에서 형성된 위계가 존재하고 주류로 편입하기 위한 통로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번 함 큐레이터 사건과 관련한 증언들 중에는 성적으로 추행한 문제뿐만이 아니라 작가에게 폭언과 부당한 대우를 한 증거들이 따라왔다. 이와 함께, 수면위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올해 봄 미술계 안을 한 번 휩쓸었던 1세대 대안 공간 큐레이터의 여자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가격했던 사건. 박봉을 받고 전시 기회를 얻으려 일하는 예비 작가와 인턴 큐레이터 등의 사례 등은 미술계 내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하나의 모습이다. 특히, 여성 (특히, 미술계의 경우 여성 인구가 더 많이 때문에 오히려 소수의 남성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 더 잘 작용한다는 의견도 있다)이 받는 불평등은 성적인 방법으로 나타나곤 한다.
이번 사태의 또 다른 특징은 피해자들의 고소-고발에 대한 언급이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고소-고발로 이어져 가해자를 엄중 처벌을 해야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고 고백한 여성들은 가해자의 공개 사과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돼는 건이 늘어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제 살 깎아먹기’같은 이런 행동들은 개인의 복수심 차원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지는 장의 위한 변화의 자정 작용 및 미술계 내부에 공고히 쌓아올려진 ‘권력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를 지목한 조 작가 역시 법적 소송에 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그럴 생각이 없다. 내 의도는 드러내는 것”이라며, “나는 내 식대로 윤리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런 악습 철폐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더불어, 몇 몇 젊은 미술 세력들과 흐름을 같이 했던 교수들이나 큐레이터를 제외하고 막상 지속적으로 만행을 저질렀던 기득권 세력의 인사들은 거론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이와 맥락을 함께 한다.
전망 - 분기점 맞이한 미술계
이번 사태는 최소한 미술계 내부에서는 커다란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SNS라는 매체를 통해 폭로와 사과가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시간 내에 빠르게 이뤄졌고, 꽤 많이 거론되어야 할 문제들이 남았다. 우선 실명 공개를 담보로 피해 사실을 고백한 피해자는 이미 묻어뒀던 상처를 다시 꺼냄으로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할 것이다. 피해자들은 공통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도움을 청했을 때, 받을 수 있었던 도움의 손길들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이 사태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중 정말 억울한 사람이 없다고 볼 수만은 없으며, 비단 한 성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오너인 사립기관에서는 남자 큐레이터들이 술자리에 자주 불려가거나 성희롱 및 추행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증언 또한 발견된다.
무엇보다, 그나마 가해자가 이름이 그나마 알려져 있기에 거론 될 수 있는 피해 사례와 얘기 해봤자 알려질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 속만 태우는 무수한 사례들 또한 존재하며, 법의 비호를 쉽게 받을 수 있는 기득권의 인사가 관련된 사례는 법적 분쟁으로 갈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현재, 이 순식간의 과정에서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던 젊은 세력이 빠르게 이합집산 하는 형상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당분간 내부의 상처는 한동안 지속되는 동시에 한국 현대 미술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첫 번째로 미술인들은 위계의 카르텔을 무너뜨리는 시도로서 미술계 최고 권력 집단 중 하나인 국립현대미술관의 입장 발표를 압박하는 중이다. 또 다른 흐름은 연대의 조직하려는 움직임이다. 편중된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혹은 미술계에서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미술인 주체의 시스템 마련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눈에 띄고 있다.
김연수, 윤하나 기자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