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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사의 공공사사(公共私事)] 우리에게는 빵과 장미, 웃음이 필요하다

정치와 고전, 카니발의 내면적 결합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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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7호 김연수⁄ 2016.10.28 14:29:02






(CNB저널 = 김집사 인문예술공유지 문래당文來堂 운영자, 생존인문 팟캐스트 '너도 고(古)양이로소이다' 진행자)


일본에서 ‘학계의 천황’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사상’에서 제도로서의 사회조직이나 개별적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사고 양태를 크게 ‘이다’ 가치와 ‘하다’ 가치로 구분한 바 있다. ‘이다’의 가치가 선천적ㆍ전통적 권위가 자동으로 승인되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신분과 혈연, 지연에 의거한 공동사회)의 세계 태도라면, ‘하다’의 가치는 그러한 권위에 대해 그 현실적인 기능과 효용을 매일매일 의심하고 스스로 행사함으로써 겨우 완성되는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조약과 계약, 협정에 의거한 이익사회)의 세계 태도이다. 햄릿이 살았던 중세라면 전자의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to be or not to be)”라는 질문이 중요했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후자의 “행동하느냐, 행동하지 않느냐(to do or not to do)”라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횔덜린을 읽는

나아가, 그는 현대 일본에 있어 “‘하다’ 가치가 필요한 영역은 도리어 ‘이다’ 가치에 강박돼 있고 반대로 ‘이다’ 가치가 용인되어도 좋을 영역은 오히려 ‘하다’ 가치에 침범당하고 있다”면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지적 태도는 “래디컬(radical, 급진적인)한 정신적 귀족주의와 래디컬한 실천적 민주주의의 내면적 결합”이라고 했다. 이른바 토마스 만이 '괴테와 톨스토이'에서 말한 '마르크스가 횔덜린을 읽는' 세계와 같다. 

전자가 예술과 학문에서의 고전과 교양 같은 ‘문화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사회와 경제에서의 자유와 평등 같은 ‘정치적인 것’이다. 예술과 학문으로서의 문화는 그것의 쓰임새보다 ‘그것 자체’에 가치가 있는 반면, 사회와 경제 영역에서의 정치는 그것 자체보다는 ‘그것의 쓰임새’에 가치가 있다. 고전과 교양의 영역에서 게으름이나 휴지(休止: 하던 것을 멈추고 쉼)는 꼭 나태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악에서의 쉼표처럼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반면, 자유와 평등의 영역에서 민주와 주권이라는 가치는 게으르거나 휴지(休止)하는 순간 소멸되어버리는, 곧 매일매일 현실에서의 실천적 행사에 의해서만 간신히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자가 그 자체로서 심미적 대상인 꽃이라면, 후자는 그 효용과 결과를 끊임없이 검증해야 되는 과실(果實)이다. 후자가 현대의 정치-사회-경제 영역에서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빵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인문-예술-문화적 영역에서 삶의 존엄을 누리기 위한 장미 또한 필요하다. 

바흐친의 카니발적 세계감각

한편 장미에서 빵으로의 전환기,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르네상스)에 새로이 주목받은 미학적 태도가 ‘라블레적 민중예술’의 세계감각이다. 러시아 비평가 바흐친(Mikhail Bakhtin)은 카니발(Carnival), 즉 육식을 금하는 사순절 직전의 사육제(謝肉祭) 기간 동안 광장에 모인 민중의 거리낌 없고 속된 축제와 그에 연관된 어릿광대와 익살꾼들의 소극(笑劇) 및 예식의 패러디에 나타나는 세계태도를 ‘카니발적 세계감각’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성(聖)과 속(俗), 정신과 육체의 위계는 혼돈 속에 역전된다. 카니발적 세계는 출신과 신분에 따른 모든 위계적 특권과 전통적 규범을 전복시킨다. 불경(不敬)한 욕설과 더러운 성적 농담, 불룩한 배와 식욕, 질펀한 대변과 같은 산초의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물질주의는 돈키호테의 고립되고 추상적이며 무감각한 권위적ㆍ봉건적 고전주의를 유쾌하게 뒤흔든다. 모든 고상하고 정신적이며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은 물질과 육체의 차원으로 격하되고 조롱되는 것이다.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기반이 상실되니, 현기증이 난다. 안정된 것은 더 이상 없으며, 광기와 가면의 모티프 속에서 우리는 괴물로 변신한다. 권위는 웃음에, 정신은 육체에, 귀족은 민중에 굴복한다.

▲이탈리아 첸통의 전통 카니발. (사진=위키피디아)


고전적 프랑스 연극과 토착적 스페인 연극

바흐친의 반대편에 그와 동시대의 스페인 비평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가 있다. 그는 예술의 두 형식을 ‘고전적 프랑스 연극’과 ‘토착적 스페인 연극’으로 유형화했다. 전자는 귀족의 예술로서 행동과 사건 및 스토리는 최소로 환원되어, 타오르는 감정과 인물의 핍진한 형상화보다는 하등의 극적 흥미도 끌지 못하는 역사물의 캔버스에 서너 개의 유의미한 개념적 모티브만을 배치함으로서 격정의 뒤엉킴보다는 격정의 ‘분석’을 통해 전통적이며 규범적이고 윤리적인 관조로서 향유된다.

반면에 후자는 민중의 예술로서 통속적인 감정과 인물의 핍진한 묘사를 통해 행동과 사건을 가급적 풍부하게 쌓아올림으로써 격정과 격정이 드라마틱하게 뒤엉키는 것을 즐긴다. 전자에는 신과 영웅처럼 고귀하고 초월적인 존재들이 등장해 자유로이 자신들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갈등에만 정신을 쏟는다면, 후자에는 평범한 보통 민중들이 등장해 현세적 삶의 절박함과 격정에 쉽게 좌우되거나 이를 저속한 언어적ㆍ축제적 광란을 통해 세속적 욕망을 과잉하여 분출한다.

따라서 귀족적인 고전적 연극은 고도로 세심한 양식적 정확성을 통해 시적이며 문법적인 법도 내에서 말과 몸짓을 최고의 원숙하고 규제적인 규범이라는 ‘비인간화’된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민중적인 토착적 연극은 우스꽝스럽고 그로테스크한 활기 속에서 모든 가치의 열광적 전복을 통해 통속적 욕망이 분출되는 ‘인간화’된 난장으로 들끓는다. 한쪽에선 고전적이면서 종교적인 태도로 고귀하고 조화로우며 엄정한 것을 지향하면서 그 이상적 삶의 방식을 ‘자제(自制)’에 두고 있는 데 반해, 다른 한쪽에선 삶을 통속적이고 풍부한 감정의 격랑에 내맡기고 무의식과 열광, 광기의 카니발 속에 자신을 송두리째 ‘방기(放棄, 내버리고 아예 돌아보지 아니함)’하는 것이다. 가세트는 전자를 후자보다 우위에 놓고 현대 예술은 ‘비인간화’된 귀족적 고전주의로 다시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빵과 장미, 그리고 웃음

여기에 세 가지의 세계감각이 있다. 하나가 엄숙한 고전주의라면 다른 하나는 유쾌한 카니발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천적 정치주의이다. 그중 마지막의 것을 연극 형식으로 분류하자면 체호프의 새로운 사실주의극과 같은 ‘리얼리즘적 러시아 연극’이라 할 것이다. 곧 ‘고전적 프랑스 연극’과 ‘토착적 스페인 연극’과 ‘근대적 러시아 연극’의 세 유형이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중세의 귀족적 정신주의, 이행기의 민중적 육체주의, 근대의 시민적 리얼리즘이다. 이 세 가지는 고전적 ‘이다’ 가치, 카니발적 ‘웃다’ 가치, 정치적 ‘하다’ 가치와 짝을 이룬다. 이들 각각이 내면적으로 결합된다면, 이른바 “마르크스가 횔덜린, 그리고 바흐친을 읽는 세계”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빵과 장미, 그리고 웃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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