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호 윤하나⁄ 2016.11.11 17:14:49
정제된 화면 속에서 한 여자가 신중하게 물건을 옮기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키가 큰 화분부터 연필, 실타래, 연필깎이, 그릇 등 작은 소품들을 키순서대로 배열하는 모습이다. 제각각인 사물들이 규칙을 갖고 정리되고 있는 영상에서 고개를 돌리자 전시장 한쪽 구석에 통일성 있는 책상과 탁자 그리고 의자가 제멋대로 쌓여 탑을 이루고 있다.
‘일 이 삼 사(1 2 3 4)’
두산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오민 작가의 ‘일 이 삼 사(1 2 3 4)’의 전시 풍경이다. 피아노와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으로 알려진 작가 오민. 올해만 세 번의 전시를 열었고, 이번 두산 전시에서 앞선 세 전시를 망라해 그가 구축한 시스템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작가 오민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대부분 음악과 디자인, 영상과 퍼포먼스를 꼽지만, 그건 작가가 활용하는 재료이자 방법론에 가깝다. 이를 통해 작업이 드러내는 것은 그가 익힌 연주자로서의 태도다.
“(한때) 악기 연주자로 길러지며 지름길을 바랄 수 없는 태도를 익혔어요. 돌아가듯 전진하는 나선형의 반복을 감내하고, 시간의 구조를 봐야 하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죠. 완벽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도달할 수 있다는 듯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강인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데, 저는 그 순간이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시는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1악장을 주제로, 소나타 형식의 음악 구조를 다른 언어로 전환하는 시도를 순차적으로 선보인다. 첫 번째로 전시장 밖 창가에 설치된 ‘ABA 다이어그램’에서 소나타 형식인 제시부(A), 발전부(B), 재현부(A')의 구조를 도식화했다. 두 번째 단계로 이 다이어그램을 토대로 그래픽 디자인의 언어인 형태, 색, 소리, 시간 등으로 전환해 단채널 비디오로 제작했다. 'ABA 스코어‘ 세 번째로 인물과 일상의 사물들이 구체적인 장면으로 음악의 구조를 표현한 영상 작품 ’ABA 비디오‘가 가장 큰 방에서 상영된다. 그 옆으로 마지막 순서인 ’ABA 퍼포먼스‘의 흔적이 남았다.
불안의 이해
아름답게만 들리는 음악이지만, 그 속엔 엄청난 이성이 숨어 있다고 말할 만큼 논리적이기도 하다. ‘ABA' 연작은 오랜 시간 정교하게 발전해 온 음악의 형식을 통해 작가가 불안감을 발견하고 불식해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초기 작업부터 통제와 불안에 관심을 둔 작가는 모든 것을 관찰의 대상으로 여겼다. 관찰을 통해 패턴과 질서를 발견하고, 이를 구조화시키면서 정리하는 방식이 바로 그가 불안을 떨치는 방법이다.
'ABA'연작은 이 순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우선 시간의 구조가 담긴 음악,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동시에 형식미를 지닌 곡을 골랐다. 이 곡을 관찰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인 다이어그램을 이용해 구조화한다.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으로 개념의 구조를 파악하고, 비디오를 통해 생각과 조형과 시간을 정교하게 계획하고 완성시킨다. 마지막으로 퍼포먼스(공연)를 통해 완성된 구조의 안정감 너머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을 발견하며, 다시금 통제 불능 상태로 환원시킨다. 조형원리를 이용해 음악의 구조를 해석하고, 마지막으로 퍼포먼스를 통해 이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민의 작업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동시에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에 대해 묻자 그는 “제가 작업하듯 제 작업을 분석하고 이해하길 원하진 않아요. 다만 감각의 차원에서 교류하길 바랄 뿐이죠. 제 작업은 관찰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이 관찰이 다른 종류의 감각으로 전환돼 표현됐기 때문에, 관람객도 그걸 관찰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소탈하게 답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감각적이다. 전시는 11월 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