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평소 지론은,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유럽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최소한 미국만큼이라도 해라”입니다. 그래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된 지금, 미국과 한국의 사법제도, 특히 법원 제도가 어떻게 다른지 좀 들여다봤습니다.
그간 많은 학자-법조인들이 꾸준히 얘기해왔지만, 일반 국민들은 거의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미국과 한국의 법원 제도가 많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오늘은 법원-판사에 대한 국회-국민의 ‘시민 통제’ 정도를 한번 들여다볼까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관계되는 이른바 ‘BBK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놨었던 김경준이라는 재미동포 금융인이 있습니다. 그가 쓴 ‘BBK의 배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별난 책입니다. 김경준은 미국에서 코넬대 경제학과 →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MBA)를 밟았으니 그야말로 경제학 분야에선 ‘세계 1등 학교’만 다닌 셈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온라인판 화면.
"미국 판사는 변호사 생활 20~30년 훌륭히 마쳐야 가능"
BBK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씁니다. “
미국 판사는 대단한 직업이지만 변호사 생활을 20, 30년 마친 훌륭한 법조인만 가능하다”고. ‘미국 판사에 비하면 한국 판사는 실력이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근거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시험만 통과해 바로 판사가 되는 시스템엔 문제가 있다. 풍부한 경력을 거친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아직 전폭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실정에서 보면, 20~30년간 훌륭하게 변호사 생활을 마친 법조인만이 판사가 되는 미국 시스템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법학자 김두식은 저서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 리가 사는 법’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단 한명의 검사가 기업을 완전히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판사 한 사람의 결정이 한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다. 매일 그런 엄청난 일들을 처리하는 흔치 않은 직업이 바로 판검사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것처럼 법원-검찰도 마찬가지일 뿐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막강한 권한만큼 강한 직업윤리가 요구된다.
이번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에서도 보이듯, 판사의 결정은 작게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런데, 판사 나름의 결정 근거를 법률 조항을 근거로만 제시할 뿐, 그러한 결정이 사회적 여론-상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도 않는 경우가 한국에선 태반입니다. 물론 법적 판결이라는 게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국민의 상식과 완전히 동떨어진 판결이 불쑥불쑥 나와 이 나라의 흐름을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놓는 것 만큼은 막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판사의 책임에 대해 전남대 김상봉 교수(철학)는 연세대 박명림 교수(정치학)와 함께 쓴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이런 주장을 합니다.
의사는 아무리 선의의 실수라도 의료 사고에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그런데 왜 법조인은 공적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나. 미네르바에 대한 영장 청구 검사와 발부 판사를 시민 법정에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성을 그들이 설득 못하면 권력남용죄로 처벌해야 한다. 인권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
의사는 의료과실 처벌받는데, 판사는 판사과실 왜 처벌 안 받지?
우리 사회에서 최고로 공부 잘하고 머리 좋은 사람이 선택하는 게 문과에서는 법대고, 이과에서는 의대라는 게 상식인데, 의사는 의료 과실에 대해 책임을 지는데, 법관은 잘못 판결해도 아무 책임도 안 지지요? 두 분야 모두 사람의 인생-목숨을 좌지우지 하는 분야입니다. 외과의사의 작은 칼질 실수 하나가 목숨을 빼앗고, 판사의 판단 하나로 기업-기업인의 경제적 생사가 갈리는데, 왜 한쪽에는 엄중한 책임을 지우면서, 다른 한쪽은 그냥 방임하고 있지요?
이렇게 판사의 역할과 책임이 중대하기 때문에 유럽 또는 미국에서는 정치인의 운명을 유권자가 결정하듯, 판-검사에 대해서도 일정한 한계는 있지만, 유권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고 있답니다.
미국의 경우를 들어보죠.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미국의 경우 연방판사와 연방검사는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를 받아 임명한다. 주법원 판사는 순수 지명 방식, 정당의 공천과 주민투표, 공천 없는 주민투표, 법관임명위원회의 인준 또는 추천과 주지사의 임명 방식 등이 있으나 보편적으로 선거를 통해 임명-연임이 이뤄진다. 주 검사장은 대부분 선거로 선출된다.
고려대 법학대학원의 박경신 교수가 책 ‘진실유포죄’에서 전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은 범죄수사 및 기소의 95%가,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검찰이 아니라 주 정부의 카운티 검찰에 의해 이뤄지며 카운티검찰의 95%가 선출직이다. 검찰도 교육처럼 중요하다면 '분권화+직접선거'가 가능하다.
우리와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지요? 일반 국민이 당하는 수사 및 기소의 95%를 각 주가 관할하는 주 검찰이 진행하며, 그 검찰 인력의 95%를 유권자가 선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 관할 사항이 아니라, 연방법 관할 사항(주로 중범죄 등)만 관할하는 연방 판-검사는 상원의 동의를 받아야 임명이 가능하다는군요.
지역 차원에서는 직접선거를 통해 검찰-법원이 주민의 의사와 동떨어진 판결을 내리지 못하도록 막고, 연방 차원에서는 국민이 직접 뽑은 상원의원을 통해 유권자의 관여 여지를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직접선거 또는 국회의원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대해 유권자가 관여할 여지가 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원 역시 ‘있는 자 편’이라는 지적 역시 존재합니다.
미국 법원도 '부자 편향'이라지만, 한국과는 하늘과 땅 차이
미국의 대표적 진보학자 중 한 명인 하워드 진은 ‘A People's History of America’에 이렇게 썼습니다.
법관의 출신 성분이 부자이고 돈 많이 버는 변호사인데 어딜 가랴? 흑인 재산을 정부가 빼앗지 못하도록 수정헌법 14조 만들었더니 기업 이익을 주(州)법으로부터 지키는 데 사용됐다. 대법원은 기업에 유리한 판결을 내려 왔다.
법조인에 대한 직접선출 또는 의회를 통한 견제권을 부여한 미국에서도 이처럼 법관들이 있는자 편을 든다는데, 이런 간섭 여지가 거의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고, 윗사람과 조직의 논리에만 충실하면 국민 눈치 볼 필요없이 위로 위로 쭉쭉 승진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은 한국에서, 판-검사들이 있는자 편향적 수사와 판결을 지속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앞에 든 인용문 중 김상봉 교수가 부당한 판결에 대해서는 해당 판사를 시민법정에 세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권재판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유럽에는 그런 게 벌써 존재한답니다.
제러미 리프킨이 ‘유러피언 드림’에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EU는 회원국과 그 관할 내에 살고 있는 4억 5500만 인구를 대상으로 보편적 인권 조항을 집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역사상 최초의 비영토 기반 정치 체제다. 모든 EU 시민들은 국내 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을 유럽인권법원에 항소할 권리를 갖고 있다. EU는 인권을 영토와 분리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영역으로 진입했다.
자국 법원의 ‘이상한 결정’에 대해서는 유럽 전체를 통괄하는 상급 재판소에 ‘인권’의 이름으로 항소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놨다니 그저 유럽이 부러울 뿐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 우리 실정에는 ‘유러피언 드림’까지 꾸긴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저, 소박하게, 미국처럼 지역 검찰의 일부라도 책임자급은 선거로 뽑고,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 등의 부당한 결정에 대해 우리 손으로 뽑은 국회의원들이 일정한 한도 내에서나마 견제할 수 있는 ‘미국식 시스템’이 도입되기를 간절히 바라볼 뿐입니다.
박명림 "심하면 검사에서 퇴출시키고 변호사 개업도 불허해야"
박명림 교수는 위에 든 책 ‘다음 국가를 말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법원과 검찰에 대한 강력한 의회 통제 및 시민 통제가 필요하다. 재판 과정에 대한 시민 참여를 획기적으로 높이고. 특정 검사가 기소한 사건에 대해 일정 비율 이상 유죄 평결을 못 받으면 승진 및 변호사 개업을 제한하고, 심하면 검사에서 퇴출시키고 변호사 개업을 불허해야 한다.
재판 과정에 대한 시민 참여를 획기적으로 높여야 함은 물론, 잘못된 기소로 무죄 판결을 자주 받는 검사에 대해서는 승진도 못하게 하고, 변호사 개업도 못하게 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최근의 △서울시 간첩사건(유우성 피고)부터 △멀리 1975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사형 판결 뒤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채 8명에 사형 집행. 30여 년이 지난 뒤 재심이 진행돼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음) △1991년의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 사건 등 숱한 오심 사례들이 있습니다. 인혁당 재건위 피고들을 형 선고 뒤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처형해 버린 1974년 4월 9일은 세계 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국제적으로 기억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의사의 과실로 환자가 숨지는 의료사고가 있듯, 이러한 ‘사법 살인’은 판-검사의 과실로 인한 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뒤 재심 결과 무죄 판결 등이 숱하게 다시 내려져도 당시 오심을 내린 판사들 중 처벌을 받거나, 처벌까지는 안 가더라도 스스로 잘못했다고 사과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작은 실수로 의료사고 처벌을 받고, 이러한 사고로 인한 큰 손해를 막기 위해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잘못된 판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시스템이 거의 없는 법조인들이 무척 부러울 듯 합니다.
한국에 독특한 이런 ‘법조인 맹신’ 풍조, 즉 ‘판-검사를 인간이 아닌 신의 경지로 올려놓는’ 관행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요?
정치평론가 박성민은 저서 ‘정치의 몰락’에서 “
국민이 뽑은 국회가 결정하면 국민이 코웃음치지만, 시험 치러 자리에 앉은 판사가 결정 내리면 고개를 끄덕거린다”고 한국인의 행태를 비꽜습니다. 국회의원은 4년에 한번씩 유권자 앞에 고개를 숙이니까 만만해 보여 이처럼 국회가 결정하면 코웃음을 치고, 국민에게 절대로 고개 숙일 일 없이 군림하는 판사님들은 무서워서 뭔 결정을 하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일까요?
시사인의 주진우 기자는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에서 “판사들은 세상에 판사가 있고 일반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썼습니다. 판사와 일반국민은 종(種)이 다르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문화부 고위 관료가 “국민은 개-돼지”라고 발언한 게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다 이런 연원이 있는 것입니다.
김두식 교수(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가 법조인들의 행태를 다룬 자신의 책 제목을 ‘불멸의 신성가족’이라 붙인 것도, 법조인들이 스스로를 ‘신과 동격인 신성(神聖)가족으로 생각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법조인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신과 동격’이라고 생각하게 됐을까요. 바로 한국의 엘리트주의, 저 멀리 과거시험 전통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트가 세상을 지배하고, 엘리트는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합니다.
박경신 교수는 이에 대해 “실력 있는 사람은 누릴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는 매우 불공평하며 복지국가를 막는 길이다. 법조인 정원제는 능력주의의 기념비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실력있는 사람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면, 대통령을 민주 선거로 뽑을 필요가 없습니다. ‘철인 통치’를 주장한 플라톤의 말처럼, 가장 뛰어난 철학자가 대통령을 해야 하며, 요즘으로 치환한다면 정치학, 복지학, 경제운용학, 국민소통학, 문화융성학 등의 대통령 자격에 필요한 시험을 엄격하게 치러, 최고점 받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고 절대적으로 복종하면 됩니다. 시험에서 1등만 하면 되니까 한 사람이 수십년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최고 실력이 최고로 누려야 하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엘리트 주의, 즉 명문대 나오고, 사법고시 패스한 사람을 존중하며, 그들에게는 누릴 자격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번 돌이겨 생각해보십시오. 학교에서 전교 1등 하던 친구가 모든 걸 가져야 합니까? 그 친구가 모든 걸 가졌을 때 당신에게는 도대체 무슨 이익을 주지요? 머리좋은 사람이 양심적이라면 좋겠고, 그래서 그 좋은 머리를 양심적으로 잘 활용해 천재 1명이 둔재 10만 명을 먹여살리는 시스템을 만들면 좋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번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서 보듯, 머리좋은 사람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자기 자신의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에 대해 악착같이 챙기며, 자기 아래 사람들, 특히 저 아래의 개-돼지 같은 인간들 입으로 뭐가 들어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관심이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김두식 교수는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머리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깨는 것이 양극화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양극화를 깨야 한다고 입으로들은 말하면서, 막상 선거철이 되면 후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만을 따지고 있으니, 즉 더욱더 양극화를 부추기는 쪽으로 투표들을 하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이런 문제점에는 문유석 판사가 ‘개인주의자 선언’이란 재밌는 책에서 아주 명쾌한 답을 내렸습니다. ‘스펙은 탁월함까지 증명하지 못한다’라는 선언입니다. 스펙이 탁월함을 증명한다면, 명문 대학을 나오고 게다가 사법시험까지 패스한 인재들에게 모든걸 맡기면 됩니다. 그러나 명문대를 나오고 어려운 시험을 패스했다는 것은, 시험 잘보는 능력, 부모나 선생님이 시키는 일을 인내심을 갖고 잘 따라했다는 증거는 되지만, 어떤 일을 남보다 훨씬 잘 해낼 수 있다는 탁월함의 증거는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한국인의 엘리트 신봉주의는 ‘스펙은 곧 탁월함’에 빠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이런 미신에 빠져 있기에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면서 헬조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변리사 최덕규는 자신이 직업 현장에서 만난 판사들에 대해 저서 ‘법! 말장난의 과학’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 소개합니다. “판사들은 답이 있는 사건을 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사기치고 로비와 돈 받아 처먹은 대로 횡설수설의 판결문을 갈겨 쓴다”고.
외국인이 쓴 책 중에서 한국을 가장 먼저(이미 1968년도에), 그리고 가장 잘 파악한 책으로 그레고리 헨더슨 저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가 있습니다. 헨더슨은 이 책에서 한국의 판-검사에 대해 “전문적인 기준보다는 오히려 정부에 대한 충성을 지켰으며, 정부 외의 피고와 변호인을 자기들의 공적인 도덕적 기능과 지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재판은 대체적으로 절차와 상관없이 유죄 판결을 주기 원하는 행정부의 요구를 공공연히 따르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법과 사법부는 행정권에 대한 주요한 억제 요인이 아니라 독재의 중요한 수단이 됐다”고 짚었습니다. 1960년대에 외국인이 본 한국 법조계의 풍경은, 50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얼마나 바뀌었나요?
조국 교수(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는 ‘진보집권 플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전세계 검찰 중 한국만큼 많은 권한을 가진 검찰은 없어요. 검찰에 대한 통제 장치가 법원 외에는 없는 상황이에요”라고. 검찰은 그래도 법원의 통제라도 받는다지만 법원에 대한 국민의 통제는 거의 완전하게 없는 게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절망할 일만 남을 걸까요? ‘불명의 신성가족’들이 결정하는대로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전혀 없나요?
류동민 교수(충남대 경제학과)는 책 ‘굿바이 삼성’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의 법과 제도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수준에 머물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굿바이 삼성’(2010년)이 출간된 지 7년이 지난 시점에서 2017년 촛불시민은, 미국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유권자 통제가 전혀 불가능한 사법 체계 속에 살고 있지만, 그래서 대개의 법원 결정이 유전무죄 원칙에 따라 이뤄지고 있지만, 그래도 촛불을 높이 치켜듦으로써(비록 광장의 추위를 무릅써야 하고, 최소한 100만 명 정도는 모여줘야 겨우 그 목소리가 들릴까 말까 하긴 하지만) 무릎걸음 걷듯이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있습니다. 류 교수가 얘기한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증명되고 있습니다.
최영태 기자 dallascho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