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사할린] 혹한 사할린스크의 인구 8 중 하나는 한국계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일차 (서울 → 유즈노 사할린스크)
슬픔의 바다 위를 날다
인천 공항을 떠난 아시아나 항공기는 2시간 30분 후 사할린 서쪽 모네론(Moneron)섬 상공 위를 난다. 1983년 9월 1일 뉴욕발 서울행 비운의 대한항공 007 여객기가 소련 공군기의 미사일에 격추돼 269명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해역이다. 지난 세기 살벌했던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희생된 약소국의 상징처럼 기록된 사건이다.
나는 바로 그 슬픔의 바다 위를 날아 러시아 사할린주의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Yuzhno Sakhalinsk)에 도착했다. 아무리 좋게 엮으려고 노력해 봐도 우리와는 비운의 땅, 슬픔의 땅으로밖에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랬던 두 원수의 나라가 이제는 비자 없이 서로 방문하는 사이가 됐으니, 조석변개하는 국제질서의 냉엄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머나먼 변방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섬. 면적 7만 2429평방킬로미터. 남한의 80% 면적인 사할린섬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어서 동서는 25∼170km, 남북은 948km이다. 묘하게도 북위 50도가 남과 북의 거의 중앙을 가른다.
서쪽으로는 타타르(Tatar) 해협 건너 러시아 본토와, 남쪽으로는 라페루즈(La Perouse) 해협(일본은 이 해협을 소야해협이라고 부름) 건너 일본 홋카이도와 마주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1만km가 넘고 항공기로 11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변방이지만 석유와 석탄, 천연가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천혜의 어장에 무한한 목재 자원까지 있어 극동 러시아의 보배와 같은 땅이다.
무시할 수 없는 소수, 사할린 한인
섬의 남북 방향으로 험준한 산맥 여러 갈래가 달리는 모습도 보인다. 사할린주 인구 58만 명 중에서 한국계가 3만 명(5.4%)이 넘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소수다. 게다가 러시아 백인은 아무도 들어와 살려고 하지 않았던 척박한 땅에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한인이 일찌감치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사할린 거주 역사가 오래 됐고,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섬을 이만큼 발전시킨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으니 사할린에서 만큼은 한인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사할린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일본이 번갈아 가며 섬을 통치하거나 소유하려고 갈등을 벌였던 땅이기도 하다. 섬의 원주민은 아이누(Ainu)였으나 일본의 패전 이후 이들 대부분은 홋카이도로 옮겨 갔다.
13세기에는 몽골 제국이 섬에 관심을 두어 조공을 받아갔고 이후 명, 청 시대에도 영향권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사할린섬에 서 있는 명나라의 영토석(영토비)이 이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네덜란드, 프랑스 등이 섬을 답사하거나 섬 주위를 항해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인의 관심권에 들어왔다. 동해에서 북태평양으로 빠져 나가는 매우 중요한 길목에 사할린이 있기 때문이다.
▲홈스크 해안(동해안)을 마주했다. 이 바다를 곧장 건너면 북한 청진과 나진이라는 생각에 일없이 가슴이 설렌다. 사진 = 김현주
사할린 남북 분할
일본은 1807년 이후 여러 차례 쿠릴열도와 함께 사할린섬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또한 19세기 중반 사할린에 탄광, 학교, 형무소, 교회, 관청 등을 세우며 정착민들을 보냈다. 이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는 1855년 시모다(Shimoda) 조약을 체결해 대체로 섬의 북쪽은 러시아가, 섬의 남쪽은 일본이 지배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이후 맺어진 아이훈(AIgun)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으로 사할린섬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가 합법적으로(국제적으로) 인정되면서 러시아는 사할린을 유형지(penal colony)로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일본이 지배하던 남부 사할린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1875) 이후 러시아의 지배로 넘어가고 대신 일본은 쿠릴열도 남부 4개 도서를 얻었다.
▲사할린 서쪽 모네론섬 부근. 1983년 대한항공기가 격추된 해역이다. 슬픔의 바다 위를 날아 러시아 사할린주의 수도 유즈노 사할린스크에 도착했다. 사진 = 김현주
러시아의 사할린 재탈환
그러나 러일전쟁 말기 일본은 사할린을 다시 점령했고(1905) 포츠머스 강화조약(1905)으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남부 사할린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2차 대전 말기 일본 항복 며칠 전 소련군은 당시 남사할린의 수도 토요하라(豊原, 현재 유즈노 사할린스크)를 함락해 사할린은 온전히 러시아(소련)의 영토로 귀속됐다.
항공기 하드랜딩
얼어붙은 내륙 호수를 지나니 곧 유즈노 사할린스크 상공이다. 거대한 설원, 아니 동토 한 가운데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유즈노 사할린스크는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해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어느 도시를 가도 있는 그 흔한 예쁜 러시아 정교회당 하나 없이 소비에트식 아파트와 회색 건물만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시 모습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아시아나 항공기가 활주로를 지나쳐 내리는 바람에 급격하게 제동을 거니 소지품이 쏟아져 내리는 황당한 경험마저 한다.
대중교통망이 잘 갖춰진 도시
유즈노 사할린스크 공항은 작은 시골공항이지만 입국 절차는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무뚝뚝한 입국 관리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입국 허가 스탬프를 찍어 준다. 공항 터미널 바깥에서 기다리는 63번 시내버스에 오르니 곧 시내 중심 역 광장 부근에 내려 준다.
버스들은 새벽부터 밤중까지 도시 외곽과 주변 위성도시들을 쉼 없이 오간다. 한국제 중고버스들인데 이 지독한 추위에 잘도 견딘다. 승객들이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를 즈음이면 어김없이 다음 버스가 도착하니 변방 치고는 대중교통이 아주 잘 갖춰진 셈이다.
▲무채색 도시 유즈노 사할린스크. 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 한국계 인구가 3만 명이나 돼 무시할 수 없는 소수를 형성하고 있다. 사진 = 김현주
루블화 가치 폭락
밤이 되니 도시가 예뻐진다. 시내 중심 가로를 따라 장식한 일루미네이션이 제법 세련된 모습을 연출한다. 변방 중 변방, 추운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정성스럽게 가꾸는 러시아인은 추위에 관한 한 전문가다.
속이 출출하니 컵라면을 사려고 키오스크에 들른다. 초코파이, 과자, 스낵, 라면 등 절반이 한국 제품이다. 그러나 최근 루블화 가치 폭락으로 88루블 하던 초코파이 한 박스 포장이 155루블이 돼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다고 키오스크 주인아주머니는 울상이다. 루블화 폭락으로 도움을 입은 나 같은 여행자는 공연히 미안하다.
북방의 짧은 해
북방의 해가 일찍 저무니 길고 외로운 밤을 맞이해야 한다. 다행히 호텔 창문은 역 앞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과 차량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더 멀리 산언덕에는 제법 근사한 스키장이 있어서 눈을 즐겁게 해 준다. 3개의 리프트와 9개의 슬로프, 2.5km 길이의 최신형 곤돌라까지 갖춰 놓고 밤 10시까지 손님을 받고 있지만 슬로프는 언제나 텅 비어 있다.
2일차 (유즈노 사할린스크 ↔ 홈스크 왕복)
한국계가 유달리 많은 유즈노 사할린스크
인구 18만의 유즈노 사할린스크는 일본 통치 시절 토요하라(豊原)라고 불렸으나 이제 일본의 흔적은 도시 어디에도 거의 없다. 유즈노 사할린스크에는 한국계가 특히 많아서 도시 인구의 12%(약 2만 명) 정도를 차지한다. 사할린 이주 1세들은 이제 세상을 떠난 분들이 많지만 그들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2세들은 이제 중노년이 됐으니, 그들의 후손인 3세, 4세들이 사할린 한인의 다수를 차지한다.
러시아 내 다른 지역 한인들과 비교해도 그렇고 다른 나라 거주 동포들과 비교해도 사할린 한인들은 이상하게도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동기가 강하다. 1949년 시작해서 아직도 발행 중인 ‘새고려신문’, 1956년 러시아 최초의 조선어 방송국으로 시작해 현재는 TV방송까지 내보내고 있는 ‘사할린 우리말 방송국’이 특히 유명하다.
▲시내 중심 역 광장 부근에서 야경을 감상했다. 시내 중심 가로를 따라 장식한 일루미네이션이 제법 세련된 모습을 연출한다. 사진 = 김현주
▲홈스크 행 버스에서 운전기사 전 씨를 만났다. 속일 수 없는 한국 얼굴이다. 사진 = 김현주
버려진 세대, 사할린 한인 1세대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해방 후 소련의 출국 금지와 일본의 비협조(책임 회피)로 사할린에 남겨진 ‘버려진 세대’다. 더구나 돌아가고 싶은 남쪽 조국은 당시 소련과는 국교도 없었으니 현실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런 끝에 북조선으로 간 한인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소비에트 해체와 한·러수교(1990) 이후 일본 정부의 재정 지원과 한국적십자사의 진행으로 마침내 사할린 동포의 남한 영구귀국이 실현됐다. 그에 따라 1500명 정도가 영구 귀국했으나 그중 더러는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가족과 친지가 있는 사할린으로 돌아갔다.
종류가 다른 추위
오늘 아침 사할린 날씨는 생각보다는 덜 춥다. 가장 추운 1월이 지나기도 했지만 해양성 기후(난류)의 영향으로 동위도상의 아시아 대륙 내륙보다 기온이 높다. 오늘은 아침 최저 영하 12~13도, 낮 최고는 살짝 영상으로 오른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여기는 매일 날씨가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이 큰 차이다.
게다가 바다가 가까워 습도까지 있으니 추위는 한국의 그것과는 종류가 다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한국에서는 평소 추운 겨울에도 잘 입지 않는 두꺼운 겨울옷을 준비해 갔으나 은근히 스며드는 사할린 추위에 결국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또 하나, 낮에는 해가 있으니 견딜 만하지만 해가 떨어지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추워진다는 것도 사할린 추위의 특징이다.
▲사할린 도심 풍경. 러시아에서 가장 큰 사할린섬은 동서로 좁고 남북으로 길어서 동서는 25∼170km, 남북은 948km이다. 사진 = 김현주
동해를 만나다
홈스크(Holmsk)행 버스에 오른다. 현대 카운티 중형버스다. 익숙한 엔진음과 디젤 냄새로 출발한 버스는 88km의 거리를 두 시간에 주파한다. 버스의 엉성한 창문 틈새로 칼바람이 매섭게 들어온다.
버스 기사는 한국인 전 씨다. 속일 수 없는 한국 얼굴이다. 무한히 넓은 대지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다. 버스가 유즈노 사할린스크의 남서쪽 방향 홈스크를 향해 달리는 사이 해가 중천에 떠올라 비로소 차내에 온기가 돈다. 출발 한 시간 반, 버스는 산맥을 하나 넘어 바다를 만나니 그곳이 곧 홈스크, 그리고 동해바다이다. 이 바다를 곧장 건너면 북한 청진과 나진이라는 생각에 일없이 가슴이 설렌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