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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지영 "10년 만에 밑바닥 제대로 경험 중"

뮤지컬 '밑바닥에서'로 카타르시스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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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2호 김금영⁄ 2017.02.10 10:32:19

▲뮤지컬 '밑바닥에서'에 10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배우 서지영.(사진=쇼온컴퍼니)

(CNB저널 = 김금영 기자) 근대 러시아의 어느 허름한 술집. 여기엔 이른바 인생의 패배자 ‘루저(loser)’들이 가득하다. 감옥에 들어갔다가 갓 출소한 청년, 한물간 매춘부, 사기 도박꾼, 알코올 중독인 전직 배우 등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밑바닥을 친 인물들이 모여든다. 이들은 과연 희망의 빛을 맞을 수 있을까?


창작 뮤지컬 ‘밑바닥에서’가 돌아온다. 러시아 극작가 막심 고리끼의 희곡을 왕용범 연출이 새롭게 각색해 2005년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배경을 원작의 지하실에서 선술집으로 변경해 극 중 절망을 맛보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채롭게 풀어내며 인간 군상을 보여줘 호평 받았다. 그리고 2017년 ‘밑바닥에서’가 다시 돌아온다.


왕 연출이 이번엔 어떤 ‘밑바닥에서’를 보여줄지 관심을 모은 가운데, 이 공연을 통해 10년 만에 제대로 밑바닥을 경험하는 배우가 있다. 10년 전 극 속 순수한 소녀 나타샤를 연기했던 서지영이 이번엔 남모를 아픔을 간직하고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타냐 역으로 돌아온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배우로서 굉장히 감정 소모가 크지만, 그만큼 공감도 가고 임팩트도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해요. 배경은 러시아지만 굉장히 한국적인 감성으로 각색돼 저도, 관객도 빠져들었었죠. 그런데 10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만나니 느낌이 남달라요. 공연에 무조건 참여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어요. 그리고 연습을 하면서 제가 느꼈던 그 감정이 역시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어요.”


서지영이 맡은 타냐는 인생이 고달프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남동생을 데리고 살면서 가장 역할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않고 해야 했고, 단 한 번 진정한 사랑에 빠지지만 그 과정마저 순조롭지 않다. 게다가 또 동생은 아프기까지. 절망이 끝났다 생각하면 또 다른 절망이 타냐를 시험하듯 찾아온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공연에 참여하면서 이번엔 새롭게 타냐를 연기하게 됐어요. 나이가 든 탓도 있죠. 하하. 연습하면서 ‘다시 나타샤를 연기하고 싶지 않냐’고 많이들 묻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지금 역할이 정말 좋아요. 나타샤를 연기했을 때도 물론 좋았죠. 그런데 새로운 역할에 대한 갈망이 항상 가슴속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10년 만에 새롭게 만나게 된 타냐가 정말 반가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크다고 그는 고백했다. 서지영은 뮤지컬계에 몸담은 지 어언 20년이 훌쩍 넘었다. 남경주 등 뮤지컬 1세대 선배들과 함께 무대를 지켜 왔다. 하지만 한계를 느낄 때가 있었다고.


“뮤지컬 1세대 배우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은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어요. 이제 막 열심히 발돋움하려는 시기였죠. 뮤지컬 관계자들도 다 젊었기에 해외에서 젊은 성격의 작품들만 잔뜩 들여왔어요. 그래서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설 수 있는 무대가 좁아졌죠. 특히나 여배우들은 나이 제약이 더 심했어요. 과도기를 못 버틴 배우들이 안타깝게도 무대에서 사라졌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맘마미아’ 등 나이가 있는 배우들의 매력이 발휘될 수 있는 작품들도 많이 선보이게 됐어요. ‘밑바닥에서’ 또한 10년 전 참여했던 제가 지금 또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있죠. 참 감사하고 뿌듯한 일이에요.”


유체이탈과도 같은 몰입의 경지 보여주고파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감옥에서 갓 출소한 청년, 한물간 매춘부, 사기 도박꾼, 알코올 중독의 전직 배우 등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밑바닥을 친 다양한 인간군상을 살핀다.(사진=쇼온컴퍼니)

특히 그는 이번에 타냐 역할을 통해 제대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 같다. “타냐를 통해 유체이탈의 경지를 겪어 보고 싶다”는 독특한 발언을 해 궁금하게 만들었다. 타냐가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었다는 게 그의 말.


“옛날에 연기를 공부할 때 선생님이 ‘연기의 신이 되려면 네가 연기하는 걸 스스로가 지켜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하고 답했어요. 그건 마치 유체이탈과도 같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이해가 됐어요. 관객석이고 무대고, 어떤 잡생각 하나 없이 그 공간에 저만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미친 듯 몰입하는 연기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밑바닥에서’의 타냐가 그런 욕망을 많이 채워줘요. 연기를 할 때 타냐는 타냐, 서지영은 서지영 식으로 따로 두지 않고, 무대에 바로 타냐가 된 서지영이 선다는 생각으로 연습하고 있어요. 타냐를 더 마음으로 이해하기 위해 극에는 나오지 않는 타냐의 삶은 어땠을까 상상도 하고, 이 상황에서 타냐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하나하나 생각해보며 점차 타냐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10년 전과 다름없이 다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왕용범 연출은 이런 서지영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배우자이기도 한 왕 연출과의 호흡은 오랜 시간 쌓여 왔다. 뮤지컬 ‘삼총사’ ‘잭 더 리퍼’ ‘신데렐라’ ‘로빈 훗’ ‘프랑켄슈타인’ 등 다양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췄다. 그렇기에 다시 이뤄진 ‘밑바닥에서’를 통해 업그레이드 된 호흡을 보고 싶어 하는 팬들도 많다.


“왕용범 연출은 평생 같이 작업하고 싶은 연출가예요. 배우의 연기가 무대에서 하나하나 다 돋보이게, 멋있게, 잘 보이게 해주죠. 대본을 봐도 알 수 있어요.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게 섬세하게 하나하나 글로써도 잘 표현해줘요. 또 배우가 확신에 찬 연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죠. 왕 연출이 잘 하는 말이 있어요. ‘해보세요’라고. 보통 이 말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정말 마음대로 해보라는 건 연출로서 자신이 그리는 큰 그림이 아예 없을 때고요. 두 번째는 자신이 생각하는 큰 그림이 있는 가운데, 배우가 자유롭게 연기를 펼치도록 둔 뒤 의견을 같이 수렴해 나가는 거죠. 왕 연출은 후자의 경우예요. 연출가로서의 방향도 지녔고, 배우들에 대한 믿음도 보여주죠. 이번에도 좋은 작품이 될 거라고 기대해요.”


그러고 보니 왕 연출을 비롯해 오빠인 배우 서태화까지. 집안에 예술인이 많다.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또 영화에서 활약 중인 서태화는 MBC ‘복면가왕’에 참여해 숨겨진 노래 실력도 드러냈었다. 서지영 또한 “오빠와 배우로서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고 말했다.


“뮤지컬에 제가 먼저 빠졌고, 오빠는 성악을 전공하다가 미국에서 곽경택 감독을 만난 뒤 영화에 출연하게 됐어요. 오빠가 유명한 영화배우라 부담이 된다거나 하는 건 없었어요. 우리 둘 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보다는 서로의 활동을 응원했죠. 제가 출연하는 공연을 오빠가 모두 봤어요. 잘 했을 땐 칭찬해주고,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것도 말해주죠. 저는 복면가왕 방송을 모니터 해줬어요. 하하. 오빠가 원래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데, 배우라는 같은 직종의 일을 하면서 공감대가 많이 쌓이고 의지가 됐어요. 이번에 ‘밑바닥에서’도 보러 온다네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에서 발견하는 내일


▲서지영은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통해 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한 "극한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쇼온컴퍼니)

돌아오는 ‘밑바닥에서’가 남다른 이유가 또 있다. 가뜩이나 힘든 시국에 밑바닥 감정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연 제목 자체가 주는 울림도 크다. 또 “예술가는 관객들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화자”라 이야기해 온 왕 연출은 공연을 통해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 왔다. 혁명을 다루는 ‘로빈훗’에서 진정 국민을 위한 왕의 모습이 무엇인지 짚었고, 이런 이야기는 ‘삼총사’에서도 맞닿았다. 그런데 서지영은 ‘밑바닥에서’가 밝은 희망만을 보여주는 공연은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극 중 인물들의 대사가 있어요. 한 인물이 ‘참 재수가 없다’ 하니 또 다른 인물이 ‘내가 재수가 있으면 이러고 살겠냐’고 답하죠.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저 두 대사가 함축해 보여줘요. 정말 절망적이죠. 바닥 중의 바닥인 밑바닥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타냐를 비롯한 사람들의 삶은 정말 처절하고 아파요. 그나마 가졌던 희망이 좌절되기도 하죠. 하지면 여기에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가 분명히 있어요. ‘이렇게 힘든 와중에 무거운 작품까지 봐야 하나’가 아니라 극 속의 사람들을 통해 밑바닥을 찍어보고, 그간 쌓인 감정을 터뜨리고 펑펑 울면서 오히려 내일을 위해 일어설 힘을 얻는 거죠. 그래서 이 작품이 요즘 같은 때에 사람들에게 더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화 예술인으로서 작품에 임하는 각오도 남달랐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지면서 많은 문화 예술인에 상처를 남겼다. 서지영 또한 여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블랙리스트는 정말 이해가 안 갔어요. ‘이게 현실에 존재한다고?’ 하며 믿기지 않았어요. 예술은 표현됨에 있어서 그 어떤 것보다 자유로워야 합니다. 러시아에서는 발레를 볼 때 관객들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죠.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기는커녕 억압하고 제재하는 것을 만들었다니, 국가적 망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아픈 정신을 치유하는 게 문화 예술의 역할인데, 블랙리스트 논란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죠.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아끼는, 보다 성숙한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을 물어봤다. 배우 서지영의 꿈과, 그를 롤 모델로 삼고 뮤지컬을 꿈꾸는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 먼저 서지영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로 인성과 배려, 그리고 겸손을 꼽았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배우로서 가장 첫 번째 중요한 것이 인성입니다. 왜냐하면 무대 위 캐릭터에서 인성이 묻어 나오거든요. 악역을 해도 착한 사람이 해야 해요. 악역도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진짜 악한 사람이 연기하면 그냥 못된 모습에 그치거든요. 안에 품은 마음이 많아야 캐릭터가 더 다채로운 매력이 생기죠. 또 뮤지컬은 모노드라마가 아니고 함께 호흡을 맞추는 것이기에 상대 배우를 배려해야 해요. ‘나 잘났다’는 식으로, 이제 막 뮤지컬에 첫발을 딛으면서도 ‘난 앙상블은 절대 안 한다’고 자만심이 가득한 경우를 봤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게 겸손함이에요. 자만심과 자신감은 분명히 달라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다른 배우들과 함께 노력해야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배우 서지영으로서의 꿈을 이야기하자 자신 또한 선배를 동경하는 후배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서지영은 “박정자 선생님과 호흡을 맞췄던 뮤지컬 ‘19 그리고 80’을 다시 하고 싶다”며 눈을 초롱초롱 밝혔다.


“박정자 선생님을 정말 좋아해요. 항상 선생님을 보며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배우로서 다져온 내공 그 자체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관객에게 감동을 줘요. 선생님과 뮤지컬 ‘19 그리고 80’에 함께 출연했었어요. 80세 노인과 19세 남자가 사랑하는 내용으로, 남자의 어머니 역할을 제가 했었죠. 막 박정자 선생님을 쏘아보는 연기를 했었어요. 하하. 그때 정말 재미있었고, 선생님을 보면서 ‘나도 저 나이 됐을 때 저 역할을 하고 싶다’ ‘머리가 하얗게 돼서도 무대에 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생각했어요. 정말 할머니가 될 때까지, 제 육체가 허락하는 한까지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도 뮤지컬 배우로서 열심히 달려 왔지만, 앞으로도 꿈을 향해 달려갈 그의 질주. 서지영은 ‘이제 또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무대에 선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학전블루소극장에서 3월 9일~5월 21일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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