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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야쿠츠크] 시베리아 유형지의 푸른 강변에서 힐링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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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3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7.02.20 10:01:42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4일차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츠키 → 야쿠츠크 도착) 

너무 짧았던 캄차카 일정

쌀쌀한 아침, 공항행 버스는 지난 밤 내린 비를 촉촉하게 머금은 원시림을 뚫고 달린다. 도로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곧바로 대자연이다. 태고의 자연을 닮은 이곳에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짧은 2박 3일이 아쉽기 그지없다. 캄차카 일정이 짧아진 것은 야쿠츠크행 항공기의 출발 일자 변경으로 전체적으로 일정을 축소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항공기가 뜨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공항 활주로 저편에 야쿠티아 항공기가 와 있다. 캄차카에서 야쿠츠크로 곧장 가려면 여름철에만,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다니는 이 항공기가 유일한 방법이다. 원래대로였다면 하루 이틀 더 캄차카에 머물면서 아바차만 보트 투어 또는  아바친스키 화산 트레킹 등을 하려고 했다. 참 아쉬운 일이다. 

황량한 시베리아 vs 짙푸른 야쿠츠크

항공기는 정시에 출발했다. 보잉 737-800 중형 여객기인데 20명도 채 안 되는 승객만을 싣고 떠난다. 여객 수요가 거의 없는 구간임에도 항공기 수급을 위해 임시로 운항하기 때문이다. 캄차카에는 해군뿐 아니라 공군도 매우 큰 규모로 배치돼 있다. 여객기가 이륙한 후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공항 깊숙한 곳에 수십, 수백 대의 최신예 러시아 전투기들이 계류 중인 것이 보인다. 항공기는 북서 방향을 향해서 날아간다. 아한대(亞寒帶) 시베리아의 척박한 산들을 아래로 본다. 나무가 자라기에는 이미 너무 추운 지역이라 이끼만이 자라기 때문이다.

세 시간, 1200마일 비행 끝에 드디어 레나(Lena)강, 그리고 그 건너 강 서안(西岸)에 자리 잡은 야쿠츠크 도시가 보인다. 숲과 나무가 울창하다. 동위도 다른 지방과는 달리 방대한 초지가 발달했다. 여름 날씨가 상대적으로 덥다는 얘기다. 거대한 레나강을 건너니 곧 공항 활주로다. 북위 62도. 평생 밟아본 땅 중에서 가장 위도가 높은 곳이다. 캄차카 시간대에서 세 시간을 서쪽으로 이동해 한국과 같은 시간대로 돌아왔다. 짧은 여름을 틈타 공항은 활주로 확충과 건물 신축 등 각종 공사로 분주하다.

▲레나강 중류의 습지와 드넓은 백사장. 해마다 봄이면 야쿠츠크의 레나강 유역에는 홍수가 빈발한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북극권에 서다

야쿠츠크는 러시아 영토의 18%를 차지하는 사하공화국(인구 96만 명)의 수도로서 북극권(북위 66.5도)까지 450km 남긴 북위 62도에 위치한다. 인구 27만 명으로서 동부 시베리아의 경제, 행정, 산업의 주요 거점이고 과거부터 극동 및 극지방 개척의 전진기지였다. 1632년 표트르 베케토프(Pyotr Beketov)가 레나강변에 도착해 러시아 정착촌을 세우고 제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후 19세기말 도시는 금과 각종 지하자원 발굴로 빠르게 성장했고, 20세기 중반 스탈린 시절에는 시베리아 강제노역소(Gulag, labor camps)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개발이 촉진됐다.

Permafrost, 영구 동토

야쿠츠크는 또한 영구 동토(permafrost)에 인간이 건설한 지구에서 가장 큰 도시다. 건물을 지을 때는 대략 10m 정도 길이의 긴 콘크리트 파일을 수십, 수백 개 영구 동토까지 박아놓고 그 위에 구조물을 올리는 특수 공법을 구사한다. 야쿠츠크는 특이한 기후 현상으로 또한 유명하다. 여름에는 월평균 19로 쾌적하지만 겨울에는 영하 39도까지 내려가는 극심한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비슷한 위도에 놓인 노르웨이 베르겐(Bergen) 같은 곳보다 여름 기온은 더 높고 겨울 기온은 훨씬 더 낮다. 

▲북방 몽골계인 야쿠츠크 사람들의 얼굴은 한국인과 매우 닮았다. 사진 = 김현주

개발로 분주한 도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 탐방에 나선다. 수많은 신축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는 한편 도심 옛 시가지의 수백 년 됐음직한 시베리아식 목조 가옥은 헐려 나간다. 이른바 푸른 초원(green meadow), 레나강의 습지를 따라 쌓은 제방변에 들어선 각종 공원과 광장들…. 돈이 많은 도심임을 느낄 수 있다. 도시 외곽도로에는 남쪽에서 이곳으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트럭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여름철에는 레나강 수운도 분주해진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가 닿는 이르쿠츠크 부근에서 레나강을 따라 페리와 화물선들이 오가고, 심지어 유럽 러시아의 무르만스크, 아르한겔스크 등 항구를 떠나 북극해를 이용한 해운도 열린다.

북쪽으로 흐르는 강

레나강변 제방을 걷는다. 바이칼 서쪽 산악지역에서 발원해 시베리아 동부를 적시며 북북동 방향으로 4300km를 흘러 북극해로 유입하는 세계 10위의 긴 강이다. 해마다 봄이면 야쿠츠크의 레나강 유역에는 홍수가 빈발한다. 하류(북쪽)의 얼음이 녹지 않은 상태에서 상류(남쪽)의 얼음이 먼저 녹기 때문에 중류인 야쿠츠크에서는 물길이 막혀 범람하기 일쑤다. 어느 해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평소보다 수량이 많은 탓에 야쿠츠크가 절반 물에 잠기기도 했다. 

참고로, 러시아에는 북쪽으로 흐르는 큰 강이 몇 개 더 있다. 시베리아 중부를 적시고 북극해로 흘러드는 예니세이(Yenisei)강은 5539km로 길이로 따지면 세계 5위고, 시베리아 동부를 흘러 오호츠크해로 유입되는 아무르(Amur)강은 4444km로 세계 8위의 긴 강이다.  

여기에도 한류

강변 전망 좋은 곳에는 대개 기념비 또는 광장이 있다. 그중 하나가 도시건설 기념비다. 코사크 용병 출신 개척자 베케토프(Beketov)에게 경배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인상적이다. 기념비 부근에서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을 만나 둘러싸인다. 한국을 잘 안다고 하며 몇 마디 한국어를 정확하게 구사한다. 머나먼 시베리아 한복판에까지 퍼진 한류의 물결에 놀라고 한국인을 빼닮은 야쿠트인의 얼굴 모습에 또 놀란다. 과거 제국의 전성기에 이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한 몽골족의 후손들 아닌가? 

도시건설 기념비에서 길 건너편에는 1차 대전 전몰장병 추념비가 있다. 러시아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 출신 전몰장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넣은 석판과 함께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강변을 따라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승리광장이 나온다. 2차 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일을 맞아 최근 조성한 광장이다. 높은 승전 기념탑과 함께 광장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 받는다.

▲승리광장이 보인다. 2차 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일을 맞아 최근 조성한 광장이다. 높은 승전 기념탑과 함께 광장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휴식처로 각광 받는다. 사진 = 김현주

시베리아의 여름

습지 너머에 있는 레나강 본류를 만나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버스에서 내려 강변을 찾아 걸어가는 15분 남짓한 길이 낭만적이다. 어릴 적 서울 신촌 모래내에서 난지도까지 멱 감기 위해 친구들과 걸어가던 길이 꼭 이랬다. 도로 양편에는 목재소가 들어섰고, 고운 모래로 다져진 길 양옆으로는 시민들의 다차(dacha, 주말 가옥)가 드문드문 있다. 시베리아의 낭만적인 여름 풍경을 만끽한다. 다만 기승을 부리는 하루살이만큼은 시베리아 여름의 불청객들이다.

드디어 레나강변 백사장이다. 밀가루처럼 가늘고 고운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영겁의 세월 동안 강물에 쓸리고 쓸린 끝에 이런 모래가 만들어졌다. 넓디넓은 강 유역이 모두 하얀 모래다. 한국으로 실어낼 수만 있다면 대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무릎을 친다. 모래 준설용 크레인, 외로운 강태공, 물살을 가르며 오르내리는 쾌속 페리, 강 건너 중지도까지 어우러져 멋진 그림이 완성된다. 유형지로만 알았던 시베리아는 이처럼 낭만 넘치는 곳이다. 레나강변에 한참동안 앉아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5일차 (야쿠츠크)

매머드 박물관

오늘은 야쿠츠크 대학 부근에서 시내 탐방 이틀째 일정을 연다. 대학가라고 해봤자 패스트푸드점 한두 곳과 미용실, 복사점이 전부다. 대학은 이번 여름방학 동안 고층기숙사 건물을 여러 동 신축하며 신학기 학생들을 맞을 준비에 한창이다. 재정이 무척 여유로운 대학임을 확인한다. 자연과학대학 건물에 자리한 매머드 박물관은 도시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2015년 초 푸틴 대통령도 다녀갔을 정도로 유명하다. 소문난 매머드 머리는 아쉽게도 별도의 장소에 냉동보관 중이라 볼 수 없다.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는 야쿠트 민속박물관 또한 이 도시의 대표 박물관 중 하나다. 전시중인 자기(瓷器)의 정교함에 비추어 볼 때 야쿠트인은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구가했음을 알 수 있다.

▲자연과학대학 건물에 자리한 매머드 박물관은 도시를 대표하는 박물관이다. 사진 = 김현주

도시 탐방

건물들과 광장이 아름다워 레닌 광장을 향해 무작정 걷는다. 오페라 극장 등 우아한 건물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레닌 광장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프레오브라젠스카야(Preobrazhenskaya) 교회의 멋진 종루와 황금 돔을 감상한다. 겉에서는 평범한 교회지만 내부 전면은 러시아 교회답지 않게 화려하다. 교회 옆은 옛 도시, 올드타운이다.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2년 재건했다. 순전히 목조로만 조성된 건축물들과 성곽, 감시탑이 특이한 분위기를 낸다. 차로 두 시간 거리 레나강변, 처음 도시가 섰던 자리에 민속촌으로 조성한 올드타운이 있어서 구미가 당기지만 시간과 교통편이 여유롭지 않아 가지 못한다. 

격조 높은 시베리아

도시 탐방이 끝났다. 꽉 찬 이틀을 돌아다녔으니 샅샅이 살핀 셈이다. 아주 천천히 마지막 광장까지 걸어가서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른다. 세련과 감성으로 넘치는 자유로운 도시를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건축물도 사람도 한껏 멋을 낸 화려한 도시다. 이 도시에는 극장도 많다. 오페라 극장, 드라마 극장, 음악 살롱, 유머와 풍자 극장 등 다양한 극장은 야쿠츠크인의 높은 문화 취향을 보여 준다. 누가 여기를 시베리아 깊숙한 변방 오지라고 하겠는가? 지구상 어디를 가도 그랬듯이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인간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창조해 낸다는 것을 시베리아에서도 확인한다.

▲북극권 야쿠츠크의 백야가 아름답다. 사진 = 김현주

겨울이 더 좋은 시민들

물론 나는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야쿠츠크를 방문했지만 최저 기온이 영하 50도 밑으로 내려가는 한 겨울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야쿠츠크 사람들은 여름보다 겨울이 더 좋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제대로 된 겨울 복장과 모자, 방한화만 있으면 멋진 겨울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도시에 산다는 것을, 그것도 끄떡없이 잘 산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가 보다.


6일차 (야쿠츠크 → 블라디보스토크 환승 → 서울 도착) 

텅 빈 시베리아 vs 꽉 찬 한반도

야쿠츠크를 떠난 오로라 항공기는 3시간 10분 날아서 아침 안개 짙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닿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닷새 전 캄차카로 떠났던 바로 그 자리에 돌아왔다. 다섯 시간을 더 기다려 서울행 항공기에 오른다. 이제 한국이 코앞이다. 러시아의 거대함을 확인한 여행의 끝이라서 두 나라의 관계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무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길목에 러시아가 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멀리 아래에 울릉도가 보인다. 항공기는 울릉도 상공에서 크게 우선회하더니 곧 강릉 남쪽의 동해안을 만난다. 그리고는 20분이 채 안 돼 인천공항 상공이다. 도시와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지난 며칠 동안 눈에 익어 잔상으로 남아있는 광활한 시베리아 대평원과 크게 대비된다. 좁은 반도에서 태어나서 자란 내가 시베리아의 진수를 접한 것은 뜻 깊은 사건이었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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