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민 해먹기 참 힘들지요?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중에서도 큰 건, 정치적 부정과 비리입니다. 정치인이나 관료가 국민을 개-돼지로 알기 때문에 지들 맘대로 밀실에서 궁리-작전을 짜내 밀어붙이고, 문제가 되면 “국난을 극복해야지요”라면서 국민에게 덤태기를 씌우는 나라입니다. 고 김영삼 대통령이 잘못된 재정 정책으로 나라 살림을 거덜내자 언론들이 “장농 속 금붙이를 갖고 나오라”고 명령한 게 바로 ‘사고는 정치인-기업이 치고, 책임은 국민에 지운다’는 한국적 원칙의 대표 사례이지요.
대한민국 국민 해먹기는 항상 힘들었지만, 요즘 역시 머리 아프고 속이 터집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TV 좀 보자면 울화통부터 터집니다. 특검이 연장되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하는지, 왜 정세균 국회의장은 직권상정을 못하는지, 헌법재판소의 정원이 7명으로 줄어들면 도대체 어떤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지 등 온갖 공부를 해야 합니다. 주말에도 편히 못 쉬어요. 광화문광장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나가지 못하면 “내가 안 나가 참여 숫자가 줄어드는 건 아냐”라면서 걱정까지 해야 하니.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여기가 고대 그리스의 아테나였다면, 즉 민의가 즉각 정치에 반영되는 직접민주주의의 나라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입니다. 작년 10월말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 이후 국민 80%는 줄곧 대통령 탄핵을 원해왔습니다. 따라서 아테네에서 이런 국정농단이 일어났다면 시민이 모인 민회(民會)에서 진즉에, 아주 이른 시점에 탄핵이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됐을 것입니다. 특검 설치도, 연장도 80%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하니 일사천리로 진행됐겠고… 아테네 식 직접민주주의라면 국민이 지금처럼 머리 아프고, 이런 저런 공부를 끊임없이 해가면서 국회나 헌재, 청와대 쪽만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았을 테지요.
▲아네테의 전설적 웅변가였던 페리클레스 장군이 민회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페리클레스는 정적을 헬리아이아에서 도편추방(오스트라시즘)하면서 권력을 잡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오스트라시즘을 당했다. (이미지=위키피디아)
아테네의 최고 대법원은 헬리아이아(Heliaia)로 불렸다고 하네요. 구성은 아테네의 여섯 부족이 각기 1000명씩을 배심원으로 헬리아이아에 내보내 총 6000명이 재판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문제를 일으킨 공직자에 대해 헬리아이아의 총대장 격인 헤게몬(hegemon: 뜻은 ‘리더’)이 탄핵 취지를 발표하고, 이에 맞서 피고인이 항변의 웅변을 하고, 시민들도 시끄럽게 설전을 벌인 끝에 깨진 도자기 조각(오스트라콘)을 통에 던져넣는 비밀투표를 해 탄핵 여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미국 식으로 말하자면, 6000명의 매머드급 시민 배심원단이 웅변으로 진실과 허위를 가려냈다는 것이지요. 6000명이 한 자리에 모여 토론하는 게 대단히 힘든 일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네요. 그리스뿐 아니라 로마 공화정에서도 “로마인들은 몇 주에 한 번씩 모였고, 때로는 몇 번씩도 모였다. 이들은 일련의 사무를 처리했고, 소송사건을 재판했다. 모든 사람은 그 공적인 회합 장소에서 시민이라기보다는 판사처럼 보였다”(장 자크 루소. 조유진 저 ‘헌법 사용 설명서’에서 재인용)니 말입니다. 시민이 재판관이 되는 건, 원래의 직접민주주의 또는 로마 공화정에서는 당연한 모습이었던 듯 합니다.
일본이 배출한 국제적 지성인 가라타니 고진은 저서 ‘일본 정신의 기원’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테네는 국가의 관리직을 제비뽑기로 선출하고, 나아가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로 선출한 배심원이 있는 탄핵재판소를 통해 철저하게 감시했다. 이런 개혁을 완수한 페리클레스 자신이 나중에는 탄핵재판에 걸려 실각했다.
추첨으로 관리를 뽑음으로써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는 민주(民이 주인이 되는) 제도를 만들었고, 추첨으로 뽑힌 관리가 주어진 권한을 악용해 못된 짓을 하면(이런 사례가 많았다고 하지요) 民이 판사가 돼 자리를 뺏는 시스템입니다. 고로, 아테네에서는 힘센 자리라도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나 맡게 해줬고, 그러다가 공직남용이 발생하면 또한 쉽게 그 자리를 뺏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와는 달리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은 간접민주주의 또는 대의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지요. 그래서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80%가 원하는 탄핵, 특검연장 또는 특검연장법의 직권상정은 그저 뱅뱅 맴을 돌고 있을 뿐입니다.
작년 12월 9일 전국민이 가슴을 졸이는 가운데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 많은 국민들이 TV를 보며 환호했고, 광장에선 춤을 췄지요. 하지만 자조의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국민 80%가 원하는 탄핵을, 국민이 뽑은, 즉 그래서 머슴인 국회를 통해 통과시키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이라는 탄성입니다. 헌재의 심사결과를 조마조마하며 쳐다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에선 분명히 주인이 국민인데, 실제 상황에선 마름이 주인에게 “아참, 당신이 됐고!” 이러면서 맘대로 하고 있는 꼴입니다. 선진 민주국가 사람들이 보면 참 웃기겠지요?
이런 꼴을 보자면, “내가 사는 이 나라가 정말 민주주의 국가 맞나?”라는 생각이 강력히 듭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자인 빈곤자가 소수의 부유계급을 억누르고 재분배에 의해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었다”는. 아니, 민주주의라는 게 가난뱅이들이 부자들을 억누르는 시스템이라고? 북한보다 100배 나은 민주주의를 한다는 한국에서 부자들이 가난뱅이들을 하도 업신여기고 죽여서 ‘헬조선’이라는데 대체 이게 뭔 소리람?
아테네와 한국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한국이 그냥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자유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심의 민주주의 등 별의별 민주주의들이 많지만, 유신 시대 때 우리가 경험한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랬듯, 형용사가 붙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앞의 형용사에 방점이 찍힙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을 때, 그걸 민주주의를 하자는 의미로 알아듣는 바보가 있었다면 그 사람은 그 당시에 이미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한국은 안보-분단 상황이 특수하니 진정한 민주주의를 할 수는 없고, 변형된 민주주의, 즉 왕과 다름없는 총통(박정희)을 뽑아놓고, 그가 죽을 때까지 영구집권을 허용한다”는 게 유신헌법이니까요.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강제 주입당한 한국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세계최고 표준으로 알고 있지만, 민주주의의 본고장 유럽인들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삼권분립의 개념을 처음 만든 프랑스의 몽테스키외. 그는 "대의제란 귀족정이나 과두정을 말하고,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비뽑기에 있다"고 말했다.
삼권분립 개념을 처음 세웠다는 몽테스키외(1689~1755년)는 “
대의제란 귀족정이나 과두정을 말하고,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비뽑기에 있다”고 말했답니다(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에서 재인용).
대의제라는 게 처음부터 귀족정-과두정을 의미했다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귀족), 아니면 권력자(대개 대통령 아니면 최순실 같은 실세) 주변에 붕당을 이룬 소수 엘리트가 국정을 농단하는 2016년 한국의 민주주의와 신기하게 딱 들어맞지요?
중국의 대표적 신좌파 정치학자인 왕 샤오광(王紹光)은 ‘민주사강(民主四講)’에서 “민주주의의 개념은 인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by the people)에서 인민이 권력의 근원이 되는 정치체제(government by the consent of the people)로 슬며시 바뀌어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초등학생도 아는, 그 유명한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에 나왔다는 명문장,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의미는 “국민이 소유하고(of), 국민이 다스리고(by), 국민이 향유하는(for)” 정치라는 의미입니다. 한국에서는 이 세 가지 중 실제로 이뤄지는 것은 for the people뿐이고(청와대 등의 관공서에 있는 위민실/爲民室, 즉 민을 위해 일을 해준다는, 가엾어서 베풀어준다는 부서의 이름에 요 for the people이 구체화돼 있지요), 나머지 of the people과 by the people은 유럽에서나 가능한 얘기지요.
이러한 현실에 대해 ‘헌법 사용설명서’를 쓴 조유진은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정치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 코넬대학에서 정치학을 배운 왕샤오광은 미국의 경우 by the people이 원칙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government by the consent of the people, 즉 국민이 선거를 통해 ‘당신들이 알아서 통치하시오’라고 권한을 넘겨버린 나라라고 비꼽니다. 미국에서만 발견되는 우스운 정치, 즉 작년 대선에서의 힐러리 클린턴이나, 2000년 대선 때의 앨 고어처럼 실제로는 수십 만 표를 더 받고도, 선거인단을 통해 대리선거를 하는 이상한 방식에 따라 낙선하는 게 바로 미국 민주주의이지요.
요런 현상의 원인을 더글러스 러미스는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게 못할 것인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미국 새 헌법의 초안은 해밀턴, 매디슨, J. 제이 등이 신문에 게재한 논문에서 비롯됐고 이 논문들이 나중에 ‘페더럴리스트’라는 책으로 엮였다. 그 내용은 ‘우리가 추진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제다. 과반수의 민중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세밀하게 배려돼 있으니(선거에서 엘리트밖에 선출되지 않도록 해 놨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미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의도가 없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대개 돈 많고 노예를 거느린 지주들이었으니, 이들은 어리석은 우중들의 투표를 통해 ‘듣보잡’이 당선되는 걸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를 한 번 더 뒤틀어 ‘국민 다수의 표를 받은 사람이 반드시 대통령이 되지는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는 설명이지요.
혁명으로 출발한 나라 프랑스의 헌법에는, 한국처럼 ‘국민 주권’이 당당히 명시돼 있지만, 미국의 헌법은(영국도 마찬가지) 헌법에 ‘국민 주권’이라는 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조유진 처음헌법연구소 소장은 전합니다. 그는 “미국은 국민을 국가적 의사 결정에서 전적으로 배제하는 대의제를 확립했다. 영국과 미국의 헌법에는 지금까지도 국민주권이 명시돼 있지 않다”(‘헌법 사용 설명서’)고 썼습니다.
▲미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며 미 연방을 출범시킨 건국의 아버지들을 그린 그림. 전원이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부자들이었다. (이미지=위키피디아)
미국이 이럴진대, 미국에 훨씬 못 미치는 대의민주주의를 운영 중인 한국의 꼴은 아주 심각합니다. 국회의원이 되는 게 국민의 종이 되는 게 아니라,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자랑되며, 대통령이 되는 것은, 국민의 우두머리 종이 되는 게 아니라 ‘왕이 되는 것’으로 통합니다. 대통령-국회의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조선왕조 시대의 백성과 왕-중신의 관계와 크게 다룰 바 없는 이유입니다.
정당학(政堂學)의 최고 권위자 중 하나인 최장집 교수는 이를 ‘위임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유명한 책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나오는 문장을 뽑아봅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책임성 원리에서 나타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집권정부가 의회-사법부 같은 다른 기구-제도에 의해 항상 견제되는 수평적 책임성의 제약 아래 놓이지만, 위임 민주주의에선 대통령은 정당, 조직화된 이해의 상위에 위치하고 의회-정당-법원은 방해하는 제도로 인식되거나 우회된다. 따라서 대통령 주도 아래 정책의 수립과 변경이 쉽게 이뤄지며 집권초 사회의 조화로운 이익을 실현하는 것으로 환호된다. 그러나 곧 예상치 못한 비용이 발생하면서 반발-저항이 나오고, 정책의 실패는 제도화 수준이 낮기 때문에 대통령 개인에게 돌아가고 집권말 저주에 가까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지도자의 역사적 결단을 강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병행하기 어렵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초판이 나온 게 2002년인데, 15년이 지난 2017년에도 책에 나오는 딱 그만큼의 현상, 즉 대통령이 의회-정당-법원을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기면서 제멋대로 비선실세와 국정을 농단하는 현장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으니, 참으로 한국의 지난 15년 정치는 뭐였나는 한탄이 터져나옵니다.
좀 오래된 책이지만 영국 더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을 지낸 마이클 브린은 1999년 저서 ‘한국인을 말한다’에서 “한국인에게 민주주의란 독재자를 뽑는 것을 의미한다”고 혹평했습니다.
언론인 박에스더는 ‘나는 다른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2012년)에서 “한국 사회는 시끄러운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않다. 시민들은 오히려 당국, 특히 청와대나 대통령의 한 방 개입에 더 익숙하다. 아마추어 케네디식 리더십에 지친 한국인들이 대안으로 떠올리는 리더십이 결국 독재 리더십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내 대신 누군가 위에서 정리해줬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대의민주주의도 아닌 겨우 위임민주주의밖에 못하면서, 그나마도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를 겪은 탓에 선거를 통해 겨우 독재자나 뽑고, 연약한 국민을 爲民하기 위해 위에서 힘으로 꽉꽉 눌러가며 뭔가를 해줄 영웅급의 대통령(박근혜 같은)이나 뽑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지요.
왕샤오광은 선거에 대해 말하면서 “영어의 election(선거)과 elite(엘리트)는 같은 어원”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은 참 기특하게도 어원에 딱맞는 선거만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릴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게 아니라 내 위에 군림할 ‘엘리트 쥔장’을 뽑으니 말입니다.
선거에 대한 한국인의 이상한 행태는 인기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 저)에도 나옵니다. 소설 속 인물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중략)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합니다. 국회의원을 ‘부리러’ 뽑는 게 아니라 ‘모시러’ 뽑으니 뽑아놓고는 부러워하기만 하고, 뽑힐 리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는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요? 대통령 탄핵정국의 광화문광장이 해답 아닐까요? 탄핵 정국에서 ‘엘리트들’이신 정치인-교수님들은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 △질서있는 퇴진 △“대통령이 물러나는 걸로 충분히 모욕적인데 형사처분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대통령이 탄핵되면 보수 유권자가 동정심-위기심으로 결집할 테니 야권 대선 후보에게 불리하다” 는 등의 근엄하고 점잖은, 이익에 밝은 말씀들을 했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촛불시민은 이런 수작들을 단호히 거부했고, 국회에서의 탄핵에서부터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2016-2017년의 강추위를 뚫고 의지를 관철해내고 있습니다.
어차피 대의제 민주주의는 귀족-엘리트를 위한 것이니 근본적으로 한국에선 일반 국민이 직접 하는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는 절대 이뤄질 리 없다는 사실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몸은 조금 피곤해도 이 한몸 부대껴 직접 외치고 주장하고, 보수든 진보든 국민의 뜻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정치인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전화질해대고, 문자보내는 행동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해 부족하나마 국민이 직접 하는(by the people) 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는 게 순서겠습니다.
물론, 스위스 등에서 실시 중이라는 국민발안 제도(국민들의 직접 서명을 통해 법 제정이나 기존 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제도), 또는 현재 대통령만이 가능한 국민투표 발의 권한을 국민 절대다수가 원할 때 가능하게 하는 직접민주적인 제도의 도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지요.
▲국민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일정 금액을 기본소득으로 주자는 발안을 끄집어낸 스위스의 시민운동가들이 전국에서 모은 동전을 광장에 쏟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이들의 시민발안으로 2016년 스위스 국민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스위스에서는 이처럼 국민이 직접 법을 만드는 과정을 주도할 수 있다.(사진=위키피디아)
한국 국민이 헌법 제1조에 명시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밖에 없습니다. 사법부 쪽엔 입 한 번 뻥끗 못하고, 지방정부 아닌 중앙정부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잘해주길 바라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미국, 일본, 스위스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국민소환제, 즉 중앙정부의 공무원을 임기 만료 전에 국민 발의로 파면-소환하는 제도가 한국에는 없으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저 선거 때만 반짝 절을 받는 존재이고, 어느 고관이 적확하게 표현했듯 정치적으로는 “그냥 개-돼지”일 뿐입니다.
입법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민주주의를 찬양한 장 자크 루소는 “국민은 행정부와 사법부가 지켜야 할 법률을 장악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모든 국가기관'을 장악할 수 있다” “인민이 직접 승인하지 않은 법은 어떤 법이든 무효다. 그러므로 그것은 법이 아니다”라고 말했답니다(‘헌법 사용설명서’에서 재인용). 헌데, 한국에선 국민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테러법이라든지, 다수 국민이 원치 않는 미디어법 같은 게 척척 입법되고 있지요?
더구나 한국에서 법률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은 기본적으로 국회에 부여돼 있지만, 대통령도 법안을 제출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뽑은 상하원에서만 법을 만들 수 있고, 대통령은 법안 작성에 전혀 관여할 수 없는 미국과 다른 점입니다. 국민이 승인하지 않은 법은 법이 아니라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정신에 따른다면 한국에는 법 아닌 법, 엘리트만을 위한 법이 숱한 셈입니다.
▲히포크라테스의 아들 메가클레스에 대한 탄핵에 찬성한다고 쓰여진 도자기 조각(오스트라콘). 이런 시민의 도편추방이 가능했다면 한국에서처럼 국민 절대다수가 원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일은 없을 듯하다.(사진=위키피디아)
입법권이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만 있으니, 여기서도 한국인은 그저 개-돼지일 뿐입니다. 국민 80%가 원하는 법을 스위스에선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국민 100%가 동의해도 국회가 거부하면 만들 수 없습니다. 법을 주물럭대는 관리나 국회의원 입장에서 국민이 어떻게 보일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요?
2016~2017년 광화문광장과 전국을 뒤흔든 ‘피플 파워’가 앞으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한국 정치에 팍팍 버무려넣으면서, 국민이 ‘법에 손도 못 대는 개-돼지’ 신세에서 벗어날 새 시대가 열릴지 기대해 봅니다.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dallascho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