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필동 예술통] 예술가도 주민도 떠나지 않고 다 잘살아지네
▲작년 '예술통' 거리에서 열렸던 축제 장면.(사진=예술통)
서울 남산의 한옥마을 바로 옆, 중구 필동의 조그만 삼거리 골목은 여느 골목과는 조금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예술통’이라 이름 붙은 이 골목이 인쇄소와 사무실 빌딩들이 모여 있는 삭막한 대로변과 조금 더 달라 보이는 이유는 상가 건물들을 식물들과 외장 리모델링으로 예쁘게 꾸며놓은 덕분도 있지만, 좁은 골목치고 많이 드나드는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 덕분도 있을 것 같다.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마이크로 뮤지엄.(사진=예술통)
“주민들이 떠나지 않게”
이 골목에 방문하게 된 이유는 미디어아트를 선보이는 ‘마이크로뮤지엄’의 개관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로뮤지엄은 말 그대로 소형의 스크린으로 영상 작품을 선보이는 미술관이다. 박스 안에 들어있는 조그만 스크린을 지나던 사람이 들여다봐야지만 감상을 할 수 있는 형태다. 각 빌딩 앞에 설치된 초소형 미술관과 더불어 건물 옆에 붙은 조그만 공간들이 눈에 띈다. 이 공간들은 ‘스트리트 뮤지엄’이란다. 작은 실내의 전시 공간엔 그림도 걸려있고, 입체 작품들도 설치돼 있다. 이렇게 덧붙여진 공간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예술품들은 이 골목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여느 주거지역 인근의 식당 같은 조그만 가게들이 모여 있었을 공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바뀌게 된 이유는 뭘까. 예술가들이 움직이면 늘 따라다니는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에선 자유로운 걸까. 예술통의 총괄디렉터이자, 광고 회사 핸즈BTL미디어그룹의 박동훈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 대표는 “아마 이 공간은 젠트리피케이션 이후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심화되는 이유가 경쟁력의 문제라고 본다. 거주민들과 예술인들은 외지인들이 몰리고 지대가 상승하면, 각각의 이유로 그곳을 떠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지대가 오른 텅 빈 집들만 남는다. 그는 ‘추억’과 ‘보존’이란 명분과 상업적 이익의 충돌이 있어선 절대 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한다. 건물주는 임대료를 낼 수 있는 사람을 찾게 돼 있고, 상업적 가치가 우선이 되는 상황이 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그런 결과가 나오는 도시재생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가 이 동네에서 예술가들과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자 했을 때,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찾은 해법은 주민들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이 동네에서 거주하는 주민이기도 한 박 대표는 주민들과 함께 직접 아이디어를 짜고 중구청에 건의했다. 보통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 등 관의 주도 아래 이뤄지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는 "관광 특구 지정 같은 사업은 일하러 오는 사람만 있게 되고, 동네에 대한 애착은 줄어들게 된다"며, 도시 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 “첫 번째로 고려돼야 할 사항은 주민들이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 공간 '예술통'의 박동훈 대표.(사진=예술통)
함께 만든 일상의 예술
그렇게 주민들과 함께 진행한 것이 예술통을 만드는 일이었다. 스트리트 뮤지엄은 그 아이디어 중의 하나다. 건물 옆과 도로 사이의 자투리 땅, 육교 밑 등 잡다한 물건들을 적재하거나 관리되지 못한 쓰레기들이 쌓였을 법한, 어둡고 버려져 있던 유휴 공간에 전시 공간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면서 예술을 일상 속으로 끌고 들어오고자 한 것이다. 박 대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덴버의 아스펜 스키장이나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 미술관도 애초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지어진 것이며, 지금도 60~70% 이상의 방문객은 주민이라는 예를 들기도 했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협업은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작년에 치룬 예술통 축제 기간 동안 이 골목에 약 1200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는데, 도로의 통제나 주차 등의 방문객 인원을 조절하고, 음식을 만드는 일 등에 동네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아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은 즐거운 축제 현장을 만들었다. 주민들 역시 그곳에서 발생한 수익을 얻기도 했기에 그야말로 상부상조의 축제가 되었던 것.
▲육교 밑에 설치된 전시 공간 '둥지'.(사진=예술통)
▲미술관 '둥지'의 설계를 위한 박동훈 대표의 아이디어 스케치.(이미지=예술통)
정체성을 지키는 발전
박 대표는 추억과 보존의 논리로 공간이 지켜져야 한다면, 그저 본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특색을 보존한 상태에서 발전해야한다고 본다. 그의 그런 철학은 그가 직접 그린 스트리트 뮤지엄의 건축 디자인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면 원래 빌딩에 덧붙여 만든 ‘모퉁이’ 미술관의 경우, 본 건물이 가지고 있는 디자인이 그대로 연결되게끔 한다거나, 육교 밑에 설치된 ‘둥지’ 미술관의 경우, 그 장소에서 보이는 남산의 나무 꼭대기에 지어진 새 둥지의 모습을 따 왔다거나 하는 식이다. 스트리트 뮤지엄은 예술통 거리를 비롯해 남산 한옥 마을로도 이어진다.
또한, 이런 그의 생각은 미술 작품을 거리에 선보이는 계획에도 반영이 됐는데,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미술을 접할 때, 신경을 쓰고 어렵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발견하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박 대표는 “미술은 어디서든지 존재감이 빛난다”며, “가끔씩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옥마을에 설치된 전시 공간 '우물'.(사진=예술통)
▲전시 공간 '우물'을 위한 박 대표의 아이디어 스케치.(사진=예술통)
박 대표가 보존하고 싶었던 이 공간의 정체성은 한국의 영화, 인쇄, 출판 등 미디어 기술의 근간이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필동은 충무로와 맞닿아있다) 현재 광고 회사 대표인 그가 어렸을 적부터 머물며 일을 배우고 성장한 곳도 이곳이다. 그는 자신의 선생님이 돼 줬던 인쇄소 사람들 등 이 동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개관한 미디어 영상 작품을 소개하는 마이크로뮤지엄은 이런 장소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미디어 작가 13명이 참여한 개관전은 ‘풍경’이라는 주제로 개최된다. 안토리오 트리마니, 피터 캠퍼스 등 외국 작가 4명과 김기라, 도로시 엠 윤, 박제성, 이준, 백정기 등 국내 작가 9명의 작품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일상 공간의 풍경과 함께 시간, 역사, 정치성을 포함한 사회적 풍경을 제시한다. 주최 측은 이와 더불어 “골목 안의 ‘미디어아트’라는 작은 미디어 장치를 활용한 도시 재생 모델을 통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미래 도시의 풍경을 제시한다”는 기획 의도를 밝혔다.
예술통에 설치된 예술 공간들은 스트리트 뮤지엄과 마이크로 뮤지엄 말고도 30개의 작품이 골목 곳곳에 지붕 없이 설치된 ‘오픈 뮤지엄’과 조선 시대 유생들의 교육 장소에 세워진 문화-예술 담론을 위한 공간 ‘남학당’, 그리고 음악 등의 공연을 위한 ‘코쿤홀’ 등이 있다. 박 대표는 미술뿐 아니라, 음악, 요리 등 다양한 분야들이 결합된 판매 가능한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업과 문화-예술이 결합된 사업들이 주로 교육-학술 또는 지원 사업에 치중돼 보이는 반면, 소비 콘텐츠 개발로 예술가와 주민들이 상생하려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마이크로 미술관에 선보이는 도로시 엠 윤 작가의 '8명의 히로인즈.(사진=예술통)
▲이준 작가의 미디어 퍼포먼스 '도축된 텍스트'.(사진=예술통)
▲백정기 작가의 비디오 작품 'Materia Medica: Cinis(약물학: 재)'.(사진=예술통)
▲박제성 작가의 비디오 작품 'The Structure of(더 스트럭쳐 오브)'. (사진=예술통)
김연수 breezeme@cnbnews.com